324화
챕터: 크로노스, 시간의 축
푸하!
수면 위로 올라가 숨을 가득 들이 쉬었다. 통증이 일던 흉부에 산소가 들어찬다.
"후우!"
호흡이 진정될 즈음 나는 다시 물
속으로 풍덩 들어갔다.
여기가 몇 번째 차원인지는 몰라 도 온통 물로 가득 찬 세계였다. 공간 간섭을 펼쳐봐도 사방이 죄다 물이었다.
아래로 힘껏 헤엄치자 잔뜩 성난 이무기가 날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부우웅!
'공간 간섭.'
쿠과과광!
바위 한쪽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 안에 숨어 있던 물고기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요리조리 도망다니는 기술만 좋 구나.
싸우지 않고 저 안에 들어가는 방 법은 없는 것 같은데 큰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는 여기가 물속이라 내 움직 임에 제약이 많다는 거고.'
부우웅, 다시 한번 이무기의 꼬리 가 날 향해 내리쳐진다.
후욱!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그 꼬 리를 피하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물 속이라 제대로 움직이기 쉽지가 않 았다.
결국 한 번 더 공간 간섭을 이용 해 아예 공간 좌표를 재설정했다.
움직임의 제약은 스킬을 이용해 보완할 수 있었다.
'둘째는 금방 숨이 막힌다는 거 지.'
이게 아주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탕, 탕!
노이트는 마력탄이라 수중에서 조 금 느려진 것 말고는 크게 영향이 없었다.
이무기는 답지 않게 잽싼 몸놀림 으로 탄환을 피해냈다.
그 움직임을 예측하고 공간 간섭 으로 녀석의 등 뒤를 점했다.
철컥, 탕!
비늘에 정통으로 명중했는데 흠집 조차 나질 않았다.
-이 몸은 900년 묵은 이무기다! 곧 있으면 용이 될 운명이지. 그런 내게 조잡한 술수가 통할 것 같으 냐!
이무기가 크하하하, 호탕하게 웃었 다.
그러자 곧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한 번 더 수면 위로 올라가려는데
이무기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린 다.
-내가 900년 동안 여기서 신선놀 음만 한 줄 아느냐?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에 내 주변 물살이 점점 빨라지는 게 느 껴 졌다.
이무기가 앞발에 달린 기다란 발 톱을 빙그르르 휘젓자 그에 따라 물결이 마치 사슬처럼 내 몸을 휘 감았다.
'공간 간……!'
- 잡았다!
덥석!
빠져나가려는 순간 이무기가 앞발 로 날 꽉 잡아챘다.
'커험!'
꼬르륵.
그 충격에 입 밖으로 공기 방울이 새어나갔다.
-이놈을 어떻게 처리한담? 널 구 워 먹을까, 삶아 먹을까. 으웅?
혼잣말하는 이무기에겐 미안하지 만 인간은 물 안에서 뭐라 말을 꺼 낼 수 있는 생물이 아니었다.
꽈아악!
더구나 이렇게 온몸이 붙잡힌 상 태에선 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네.'
최대한 특수 탄환은 아껴두고 싶 었는데.
이무기는 내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며 아직도 뭐라뭐라 중얼대고 있 었다.
-비록 내가 지금 덕을 쌓는 증이 라 직접적인 살생은 어렵지만, 이렇 게 자연적으로 익사한 먹잇감은 충 분히 먹을 수 있지! 간만에 포식하 게 생겼구나!
녀석이 군침을 질질 흘리는 것과 동시에 노이트가 알림을 울렸다.
[알림: 특수탄환 '찬동하는 목책' 이 사용자의 의지에 찬사를 보냅니 다!]
빛나는 고리가 두세 겹 서로 엇갈 리며 내 주변을 감싼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이무기가 당 혹스레 눈을 뜬다.
[알림: 특수탄환 '찬동하는 목책'
이 시전자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알림: 17분 동안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턱 끝까지 차오르던 숨이 이젠 아 무렇지도 않았다. 단숨에 침착함을 되찾는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죽을 때가 됐는데 왜 갑자기 살아난 거지?!
이무기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 이민다.
녀석이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을 듯이 입을 쩍 벌렸다.
철컥, 탕!
탄환이 이무기의 입 안을 꿰뚫는 다. 제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입 안 쪽까지 단련할 순 없을 테니까.
-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손아귀 힘이 느슨해 진다.
탓!
나는 녀석과 떨어진 다음 곧장 스 킬을 발동했다.
'공간 간섭!'
슈욱!
녀석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지자 이무기가 이글이글 분노에 찬 눈빛 으로 날 노려봤다.
-감히 내게 이런 짓으을!
슈우우욱!
눈 깜짝할 새에 녀석이 내 코앞까 지 다가왔다.
'공간 간섭!'
콰득!
내가 서 있던 곳에서 힘껏 입질을 해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하마터면 저 이빨에 뚫려 그대로 죽을 뻔했 다.
-짜증 나게 구는구나아아아……!
나는 최대한 도발적인 표정을 지 으며 녀석에게 까딱, 손짓했다.
그러자 대단한 모욕을 받은 것처 럼 녀석의 눈빛이 회까닥 돌았다.
-네 녀서어어어억!
휙!
나는 전체적인 움직임에 신경 쓰 며 녀석의 공격을 피해냈다.
성격이 단순무식한 것 같아 다행 이었다.
속으로 시간을 가늠하며 이리저리 지형지물을 이용해 놈을 피해낸다.
텁!
녀석이 또 허공에 입질을 했다. 바 로 코앞에 있는 날 향해 한 번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턱, 뭔가에 걸 린 듯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으웅?
그제야 녀석도 뭔가 이상하단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 어어어어?!
이리저리 휘감은 탓에 놈의 기다 란 몸이 제멋대로 꼬여 있었다.
-으으윽! 조금만! 조금만 더어 어……!
녀석은 무리하게 목을 앞으로 빼 려고 애를 썼다. 그럴수록 몸은 더 욱 단단하게 조였다.
나는 그런 이무기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줬다.
-가, 감히이이!
녀석은 더 분해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이따위 허접한 술수에 내가 걸리 다니! 풀고 나가기만 하면 네놈을 당장……!
탁.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한 것 같아서
노이트를 녀석의 입 안에 가져다 댔다.
_흡!
그러자 두려움을 느꼈는지 입을 꽉 다문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다.
나는 입을 뻐끔대며 말문을 열었 다.
"크로노스를 만나게 해줘."
인간인 내 귀에는 물속이라 이상 하게 웅얼대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 만 녀석에겐 똑똑히 들렸는지 표정 이 잔뜩 일그러진다.
-크로노스 님은 너 같은 인간 따
위가 함부로 만나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이 침입자가 대체 무슨 소 릴 하는…….
철컥.
"안 돼'?"
한 번 더 묻자 이무기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정말 안 돼?"
노이트를 더 깊숙하게 집어넣자 녀석이 결국 수긍의 말을 내뱉었다.
-됩니다…….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채로 애써 대꾸한다.
"허락해줘서 고마워. 내가 급한 용 무가 있어서."
-허락이 아니라 협박이겠지…….
쓸데없는 소리는 무시했다.
"근데 내가 저 안에 다녀오는 동 안 네가 마음을 바꿔먹을까 봐 고 민이 되네."
혹여라도 아이템을 구하고 돌아오 는 길에 녀석에게 공격을 당할 수 도 있으니 미리 대비해둬야 했다.
-공격 안 할게! 안 하면 되잖아!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용언으로 맹세할게!
"이무긴데 용언을 쓸 수 있다고?"
이게 어디서 이렇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쳐. 내 얼굴이 험악해지자 녀석이 다급하게 뒷말을 이었다.
-물론 난 이무기지만! 곧 용이 될 예정이라 용의 권능을 어느 정도 빌려 쓸 수 있단 말이야!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녀석이 뭔가 다른 언어를 내뱉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신비한 떨림이 그 안에 담겨 있었 다.
- 됐지?
나는 그 정도면 만족스러웠기 때 문에 노이트를 거뒀다.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잘 풀고 있어."
-뭐? 야! 집주인도 없이 들어가는 게 어딨어!
"내가 한시가 급해서."
지금쯤 다른 이들은 치열하게 싸 우고 있을 텐데. 이 용이 되다 만 미꾸라지 녀석과 태연하게 농담 따 먹기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으, 으으…… 잠시만 기다려 봐.
녀석이 잠시 바르르 떨더니 이내
팡! 하고 변신했다.
연기가 걷히고 보니 인간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었는데, 한 가지 특이 한 점이 있었다.
"……900년?"
"900년을 살진 않았지만, 900살 묵은 이무기랑 비슷한 힘을 갖고 있다고."
열두어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 이의 모습이었다.
물론 진짜 열두 살은 아니겠지만 어찌 됐든 900살보단 덜 먹은 게 분명해 보였다.
"따라와."
녀석이 새초롬하게 내뱉고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동굴 앞에 서서 녀석이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스르륵 장막이 걷혔다.
신기하게도 동굴 안은 물 대신 공 기가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내부는 답지 않게 아기자 기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래서 안 보여주려고 한 건가.'
나름의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이곳 출신은 아닌 것 같고.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건
가?"
" 맞아."
"쳇. 그럴 줄 알았어. 날 보고 넙 죽 엎드리지 않는 것부터가 이상했 다고. 차원을 건너온 놈들은 규격 외의 존재니까 상대하지 않는 게 좋다고 그랬는데……
성큼성큼 걸어가 가장 깊숙한 방 안쪽으로 날 안내한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그 안은 마치 신전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한가운데에 드높이, 내가 익히 아 는 그것이 놓여있었다.
크로노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모래시계가 허공에 부유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크로노스 님 옆을 지 켰지만 지금까진 아무런 반응도 없 었어."
전에 본 적이 있었다.
회귀 전 나도 모르는 기억을 보고 만 직후에.
전쟁을 끝낼 방법이 있다며 이운 우의 만류를 거부하며 와인잔을 기 울이던 그 기억 말이다.
직접 목격하자 모든 게 다 명확해
졌다.
'내가 회귀한 것도 크로노스랑 연 관이 있는 게 분명해.'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로노스는 그저 성스러운 빛을 흩뿌리며 높은 곳에서 날 내려다보 고 있었다.
:k * *
털썩!
"이거 놔! 놓으란 말……!"
퍼억!
다니엘의 주먹이 셀의 뺨을 거세 게 내려쳤다. 셀은 잠시 침묵하더니 퉤, 핏물 섞인 침을 뱉어냈다.
"명하신 대로 잡아왔습니다, 폐 하."
"훌륭하군, 다니엘!"
시온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다 니엘을 꼭 끌어안고 말았다.
다니엘은 사무적으로 '옷이 더러우 니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하고 대꾸했으나 시온은 아랑곳하 지 않았다.
마력 제어구를 단 채 결박당해 끌 려온 셀의 몰골이 잔뜩 엉망이었다.
그는 방금 두들겨 맞은 한쪽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허벅지에도 길 게 검상을 입었다.
제일 심각한 부상은 등 뒤에 새겨 진 것이었다. 아직도 피가 줄줄 흘 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내 이 녀석의 얼굴을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지……
시온이 광소를 흘리며 셀에게 다 가갔다.
여전히 셀은 무척 반항적인 표정
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하등 잘못 한 것이 없다는 듯한 뻔뻔함이 배 어나오고 있었다.
"감히 내 기사에게 손을 댔을 땐, 너도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겠지. 안 그래?"
"각오는 일찍이 되어 있었지."
셀이 잔뜩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시온을 도발했다.
"혁명군이 되기로 한 그 순간부터 말이야. 이름 모를 기사 하나 죽인 건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뭐……?"
시온이 셀의 멱살을 덥석 잡아끌 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게 그딴 헛소릴 지껄여?! 기억할 거 아냐! 즉위관 에서 네가 그 마법으로……
"아
셀은 그제야 기억난다는 듯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기사?"
"그래! 세드릭을, 그를 네가 무참 히 죽이지 않았느냐!"
그러나 여전히 셀은 태연한 얼굴 이었다.
"그때 죽인 기사가 한둘이어야지. 당신은 당신이 죽인 혁명군을 전부 기억해?"
셀은 통증을 이겨내며 겨우 입꼬 리를 말아 올렸다.
"나는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하는 편은 아니라서. 얘길 들어도 잘 모 르겠는데?"
스릉!
시온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옆 에 있던 기사의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었다.
"다시 지껄여 보거라."
서슬 퍼런 칼날이 셀의 목덜미 위 에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