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졸업시험 당일이 되어서야 페일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r예절 실습 q조 줄리아 베넷 -페일 레크틉.j'■사교 춤 실습 K조 줄리아 베넷 - 페일 레크틉.j「기초 연금술 실습 D조 줄리아
베넷 - 페일 레크틉.」
그 외 기타 등등.
실습 과목이 죄다 페일과 같은 조 였다.
틸난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 로 노골적인데, 선생들은 쉬쉬한단 말인가?
'아니. 이 정도면 선생들이 조를 짤 때 페일의 의견을 반영한 거지.'
이 안에 내 편은 없다 이건가. 그 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이견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해
내는 것.'
협조할 생각이 하나도 없는 페일 을 이끌고서 말이다.
"그럼 K조, 줄리아 베넷과 페일 레크틉. 준비하세요."
교사의 지도 아래 나와 페일이 나 란히 마주 섰다.
그와 나는 간단한 예복을 차려입 고 서로 손을 맞댔다.
댄스곡의 처음 시작은 잔잔하고
물 흐르듯이 부드럽다. 그 음에 맞 춰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졸업은 포기하지 그래."
페일이 작게 속삭였다.
그는 여태까지 보여줬던 짓궂은 얼굴과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 다.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
대외적인 이유를 대면서 음악에 맞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치맛자락이 펄럭이며 아름다운 곡 선을 그린다.
다시 페일과 손을 마주 잡자 그가
선전포고라도 하는 것처럼 내 발을 꽉 밟았다.
구둣발에 짓밟히니 꽤나 통증이 심했다. 다른 학생이었더라면 당장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
'참자. 참아야 해.'
하지만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선 몇 번이고 참아야 했다.
콰득!
....
페일의 발도 살짝 즈려밟자 그가 경쟁심이 붙었는지 전투적으로 스 텝을 밟았다.
쿵! 콰득! 우지끈!
나중에 가서는 스텝을 밟는 건지 서로의 발을 공격하기 위해 합을 주고받는 건지 알기 어려울 지경이 었다.
"으음……. 둘 다 힘이 넘치는군 요."
교사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우릴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춤은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연주가 가쁘게 치고 올라간다.
본래 마지막은 남자 파트너가 여 자 파트너의 허리를 한 손으로 받치며 포즈를 취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순순히 내 허리를 받 칠 것 같진 않네.'
실수인 척 허리를 놓쳐 점수를 깎 아 먹으려는 생각이 가득일 것이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촤악!
" 으악..
타이밍에 맞춰 그의 발목을 공격 해 중심을 잃게 만든다.
페일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릴 때 한 번 더 그를 걷어찬다.
후우욱!
"나, 날았어!"
천장을 향해 붕 떴던 그의 신형을 내가 낚아채면서 마지막 피날레 포 즈를 취한다.
따단!
동시에 연주도 끝이 났다.
"허, 허리가...
온몸의 무게를 허리로 받아낸 페 일이 고통을 호소했다.
짝짝짝짝!
"대단해요!"
하지만 주변에선 기립 박수가 쏟
아져 나온다.
"언제 둘이 이런 퍼포먼스를 준비 한 거죠? 남자 파트너와 여자 파트 너의 위치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훌륭한 마무리였어요!"
교사의 극찬에 페일이 이를 아드 득 갈았다.
"이거 놔!"
쿵!
"아악}"
그의 소원대로 허리를 받치던 손 을 풀어주자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다.
페일은 허리를 부여잡고 내게 되 지도 않는 경고를 날렸다.
"이 다음부턴 네 맘대로 안 될 거 다. 줄리아 베넷!"
대꾸할 가치도 없기에 어깨를 으 쓱했다.
"둘의 파워풀한 스텝도 아주 인상 깊었어요. 그렇게 강렬한 스텝을 밟 고 평범하게 마무리했다면 오히려 균형이 맞지 않았겠지만, 화려한 퍼 포먼스로 완벽해졌군요. 둘 다 만점 이에요!"
"감사합니다."
교사의 극찬에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틸난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날 바라보기에 마주 보고 웃어주었다.
그 이후로도 페일의 방해 공작은 계속됐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기초 연금술 실습에서 엉뚱한 재 료를 넣어 망치려고 들길래 파이로 를 작게 소환해내 훨씬 상위 물약 으로 바꿔 만점을 받아냈다.
또 예절 실습에선 아예 움직일 생 각조차 안 하길래 억지로 움직이게 해줬다.
필기시험도 그간 노력한 만큼은 나온 것 같았다. 잘 본 편은 아니 지만 낙제는 면했다.
그리고 남은 시험은 단 하나.
'대련 실습 시험'이었다.
"마지막 조! 줄리아 베넷과 페일 레크툽. 주의사항은 아까와 같습니 다. 어디까지나 대련이니 상대가 다 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목숨을 위협 하는 중한 부상을 입힐 경우 둘 다 낙제점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하기
바랍니다."
나와 페일은 대련장 안에 들어서 서로를 마주 봤다.
내게 가장 쉬우면서도 까다로운 시험이었다.
'심한 부상을 입히면 지금까지 한 노력이 전부 무의미해진단 말이지.'
그러니 페일은 작정하고 날 공격 하려고 들 것이다. 내가 심하게 부 상을 입으면 둘 다 졸업을 못할 테 니까.
'내가 페일을 이기는 것쯤이야 손 쉽지만.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어서 위험해.'
그 적당함이 언제나 어려운 법이 다.
"그럼 대련 시작!"
페일은 장검을, 나는 단검을 선택 했다.
일반적으로 보면 1대1 싸움에서 단검은 사정거리가 짧아 장검에 비 해 훨씬 불리하다.
하지만 내겐 그 정도 핸디캡이 필 요했다.
"꼭 졸업을 해야겠어?"
페일이 또 이상한 질문을 해왔다.
'이상하단 말이지. 줄리아를 싫어
하는 게 아니었나?'
그런데 말하는 투나 행동거지를 보면 줄리아를 싫어한다기보단 오 히려 그녀를 무척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 헛소리가 진짜인 건가. 졸업하 면 이렇게 자주 못 보잖아, 뭐 그 런 거?'
아주 치기 어린 행동 양식이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말했잖아.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일단은 여동생. 진짜 이유는 레태 흐태드와의 내기에서 승리하고 크로노스를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나도 이 방법 을 선택할 수밖에."
그가 장검을 바로 쥐었다.
그 모습에 나 역시 근육을 긴장시 켰다.
하지만 그의 칼날이 향한 건 내 쪽이 아니었다.
푸욱!
"허억!"
"구급 팀! 구급 팀 당장 나와주세 요!"
"피가……
페일이 떨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 봤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내가 할 소리지."
페일이 제 복부를 찌르려는 걸 내 가 손으로 막아냈다.
덕분에 손이 관통상을 입긴 했지 만 적어도 치명상은 아니었다.
"자해공갈을 하면서까지 내 졸업 을 막아야겠어?"
내 물음에 페일이 입을 꾹 다물었 다.
"내가 졸업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넌 모르는 게 나아."
그렇게 나온다면야 나도 할 말이 없고.
난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줬다. 솔 직하게 털어놓을 기회를. 그걸 걷어 찬 건 페일이었다.
"구급 팀은 됐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이 엉망이긴 했다. 상의 아랫단 을 대충 찢어 손에 둘둘 감았다.
"시합 속행해주세요."
"하지만 부상이……
"제가 자주 쓰는 손도 아니라 괜 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반대편 손으로 단 검을 들고 휙휙 돌려줬다.
"손이 다친 것뿐이잖아요. 목숨이 위험한 수준이 아니니 낙제는 아니 죠?"
내 말에 교사가 잠시 머뭇거리더 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합을 속행하겠다."
페일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의 검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다시 양측 다 준비하고. 시작!"
페일이 한 번 더 장검을 역수로 쥔다. 이미 예측한 패턴이었다.
탁!
빠르게 달려들어 맨손으로 그의 손목을 쳐냈다. 숙련된 용병도 아닌 그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검을 놓치 고 말았다.
슈욱!
빠르게 그의 목덜미에 단검을 들 이 댔다.
챙그랑!
검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승패가 빠르게 결정됐다.
"내 승리야."
페일의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그는 내 옷자락을 쥐며 물었다.
"꼭 졸업을 해야겠어?"
« O "
흐.
"이 안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바깥에 나가는 게 무섭다고 너도 그랬었잖아!"
페일과 친했을 때는 그런 말을 했 나 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줄리아 가 아니니, 그 말에 책임을 질 의 무는 없었다.
"페일. 졸업시험은 다 끝났어."
난 여기서도 승리했으니 낙제할 위험은 없었다.
드디어 졸업이었다.
♦ * *
"줄리아!"
틸난이 나를 꼬옥 껴안았다.
"손은 좀 어때. 괜찮은 거 맞아?"
"웅. 부상이 좀 있긴 하지만 괜찮 아."
다른 아이들은 죄다 졸업시험 채
점 결과를 기다리며 대기실에 모여 있었는데 나만 부상이 심해서 양호 실로 옮겨졌다.
손이 꿰뚫리긴 했지만 중요한 신 경이나 뼈는 비켜나가도록 조정했 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페일 그 자식이 설마 자해까지 할 줄이야. 정말 독하다니까."
"그러게. 왜 그렇게까지 내 졸업을 막으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묘한 이질감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국 그가 입을 다물었으니 그 궁 금증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어차피 졸업해서 밖에 나가면 그 가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알 게 되겠지.
스으윽.
그때 양호실 문이 열리고 교사 중 한 명이 들어왔다.
"몸은 좀 괜찮니, 줄리아?"
"네. 괜찮아요."
"틸난 양이 옆에서 간호해주고 있 었구나."
교사는 틸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름이 아니라 시험 결과가 나와
서 알려주려고 왔단다."
"벌써 결과가 나왔나요?"
"그럼. 하루빨리 졸업하고 싶다고 너희가 성화잖니."
교사의 말에 나랑 틸난이 서로를 잠시 마주 봤다.
졸업하고 싶다고 손에 구멍까지 난 사람도 있으니, 채점 정도는 일 찍 해줄 법도 하다.
"자, 그럼 결과를 발표하마. 우선 틸난 양. 실습 점수는 조금 낮지만 필기시험에서 탁월한 점수를 받았 구나."
그 말에 틸난이 배시시 웃었다.
"사교 춤을 조금만 더 연습하면 차석 자리까지 노려볼 만했겠어."
"춤은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요. 그 냥 포기하려고요."
"그럴 수 있지. 졸업 축하한다."
틸난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물 들었다.
"감사합니다!"
"사회에 나가서도 그 착한 심성을 잃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많이 도 와줬으면 좋겠구나."
"물론이죠!"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그리고 줄리아 양! 이번에 줄리아 양의 실습을 보고 깜짝 놀란 이들 이 많단다. 언제 그렇게 연습한 거 니?"
"과찬이세요."
"아니지, 아니지. 실습 점수는 대 부분 만점이구나. 특히나 기초 연금 술 실습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은 내가 교사 생활을 하면서 처음 보 는 것 같은걸."
내 주변에 워낙 천재적인 연금술 사들이 많아서 어깨 너머로 훔쳐본 것들이 많았다.
기쁜 마음으로 듣고 있는 그때 갑 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 다.
"그런데…… 필기 점수가 너무 형 편없구나."
" 네?"
"이런. 필기로는 낙제를 면치 못하 겠는걸."
"예에?"
교사는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이번에도 졸업은 어렵겠구나. 줄 리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