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사르륵.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두른 망토가 바닥에 흘러내리며 천이 스 치는 소리를 냈다.
다니엘이 능숙하게 그의 옷시중을 들었다.
"상황이 나쁘지 않군."
시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로 그가 예상한 대로 일이 휼 러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반항이 거세긴 하지만."
"금방 끝날 마지막 발악입니다."
"그렇겠지."
시온은 영상석을 통해 전쟁터를 둘러보았다. 서로 공방을 주고받으 며 치열하게 접전을 이어나가고 있 었다.
"준비는?"
"이미 준비를 다 마쳤다고 합니다. 언제든 명령하시면 됩니다."
다니엘의 말에 시온이 배부른 맹 수처럼 미소 지었다.
"좋아. 그럼 시행해."
시온의 말이 끝나자 다니엘은 급 히 어딘가로 연락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내려다보 는 영상석 안의 상황이 급변했다.
- 케게게게게겍!
- 쿠워어어어!
집채만 한 크기의 거대 마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었다. 게이트 설계 때부터 마련해뒀던 장치였다.
갑작스러운 마물들의 등장에 지구
군이 제대로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쓸려나갔다.
- 쿠워어어어!
기존 마물보다 훨씬 강하게 개조 한 마물이니 당해내기 쉽지 않으리 라.
"게이트에서 싸운다는 건 그런 거 지……."
시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홈그라운드에 서 싸운다는 의미니까."
클로에를 이용해 게이트를 구상할 때 철저히 톨룩군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뒀단 얘기였다.
그 반중으로 마물들은 톨룩군을 향해선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 었다.
시온이 여유롭게 영상석을 내려다 보다가 문득 뭔갈 발견했다.
"응?"
이상하다.
기껏 준비해둔 거대 마물들이 뒤 편에서부터 쓰러지고 있었다.
"저거 뭐야. 저쪽 확대해봐!"
-서걱, 쿠우우웅!
-슈우욱!
너무 멀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 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 붓을 이리 저리 휘두르자 그 궤적을 따라 그 림이 생겨난다.
바닥에 동그랗게 함정을 그리면 마물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몸통 가운데 선을 그으면 마물 이 반으로 도륙됐다.
시온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이였 다.
"……혁명군의 그 마법사."
시온의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그는 영상석 안으로 들어갈 것처 럼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마계로 숨어버렸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에……?"
다니엘도 그 질문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분명 마계로 들어가 그 경계선 밖 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 다 들었는데?
-슈우우욱!
-콰앙!
-셀, 너무 혼자 앞서가지 마라. 아 직 제대로 합류도 못 한 상황인데
-무슨 소리야, 형! 우리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미리 보여줘야지. 등 장은 화려하게 해야 하는 법 아니 겠어?
영상석 안에서 셀이 환하게 웃는 다.
-혁명군, 등장이요!
까드득.
시온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그날 을 똑똑히 기억했다. 평온하게 살고 자 했던 그를 이리저리 들쑤신 것이 바로 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혁명군 놈들이었다!
"……세드릭......
시온은 이미 죽은 이의 이름을 중 얼거렸다.
다니엘이 그를 말리기도 전에 시 온이 영상석을 벽에 집어 던졌다.
와장창!
"저하!"
"폐하라고 불러야지. 다니엘."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니엘이 반사 적으로 그를 '저하'라고 부르자 시 온이 발작적으로 대꾸했다.
"내가 이 나라의 황제인데."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폐 하. 영상석이 깨져 다치실까 걱정됩 니다. 제가 치울 테니 잠시 물러나 계시죠."
" 후우......
시온은 말없이 제 머리를 헤집었 다.
그러더니 툭 내뱉었다.
"나도 출전해야겠다."
"위험하십니다."
"그래도 가야겠다."
시온의 눈빛이 열기로 덜덜 떨리 고 있었다. 그의 가장 소중한 이를 죽인 원수가 바로 저곳에 있었다.
"지금 아니면 저놈들이 또 마계로 쏙 들어가 버릴지도 몰라. 그럼 영 영 잡을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를 말리는 시늉을 했 다.
"아니. 가야겠다."
시온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내가 직접 저놈의 목을 벨 것이 다."
결국 다니엘은 그에게 고개를 조 아렸다. 그는 속에서부터 피어오르 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크로노스. 그게 땅의 가호와 대적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했지.'
시온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랬다.
시온은 가호를 받아들인 이후 하 인과 하녀들의 시중을 거부하고 있 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도저히 너 희를 믿을 수가 없구나. 너희도 혁명군의 끄나풀이 아니란 걸 어떻게 믿지?
-폐, 폐하……. 하지만 옷시중을 들어드리기 위해선…….
-돌아가거라!
극도로 사람에 대한 불안감에 시 달린 나머지, 이런 사사로운 일마저 도 다니엘의 차지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시온은 제 하루 일과 를 모조리 다니엘과 함께했다.
-목욕물을 준비해다오.
그가 황제의 서고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피범벅이 되어 돌아왔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무슨 일이십니까?
-별 거 아니다. 다음 대 메티스 를……. 아니. 필요 없겠지. 앞으로 황제의 서고에 사서는 필요 없다.
그가 전쟁을 준비하는 것도 모조 리 지켜볼 수 있었다.
-이곳에 크로노스가 있을 거다. 그러니 따로 이곳에 갈 만한 이들자연스럽게 시온이 이번 게이트를 통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도 알게 됐고 말이다.
'전쟁터로 향하면 크로노스와 한 공간에 있게 되겠지.'
그때가 기회였다.
다니엘은 깨진 영상석 조각들을 정리하면서 얼핏 붉은 머리카락을 본 것 같았다.
황급히 다시 들여다봤지만 붉은색 은 온데간데없고, 다른 이의 얼굴만 산산조각 나 여러 개로 갈라져 보 일 뿐이었다.
'내 착각이었나.'
이사벨라. 그러니까 로젤리타에 대 한 죄책감 때문에 잠시 헛것을 봤 던 모양이다.
'그래. 혁명군을 보니 누님이 생각 나서 그랬나 보군.'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이를 되새김질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다니엘은 애써 영상석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우~와!"
류라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눈도 아니고, 소금으로 만들어진 하얀 성이 허공에 등등 떠 있는 모 습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오는 길이 험난하긴 했지만 아름 다운 곳이네요."
정로운도 감상평을 남겼다.
결국 내가 선두로 공격을 죄다 막 아내면서 올라왔다. 다행히 성 내부 로 들어서자 공격은 잦아들었고 말 이다.
"이 성에 찾는 게 있을 것 같나?"
"아마도요."
무전기에서 지도를 살펴보면 현 위치와 크로노스의 위치가 아주 가 짜웠다.
최소한 이 성 안 어딘가에 있긴 한 것 같았다.
"그럼 우선 꼭대기 층부터 가보 죠!"
"가장 중요한 거면 제일 꼭대기에 있지 않을까요?"
보통은 그런 법이었다.
그럼 위로 올라가 보자고 제안하 려는 참이었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우리 오랜만에 보네?"
털썩!
동시에 내 눈앞에서 재잘거리던 이들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누군지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른한 목소리에 헌터들을 잠재울 정도로 강력한 정신계 능력이면 누 군지 뻔했다.
"……레태흐태드."
"레태라고 불러달라니까."
뒤돌아보니 짙은 보라색 머리카락 에 생긋 웃는 여인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언제나처럼 하얀 실크 원피스를 차려입고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내 제안은 잘 생각해봤어?"
"아직도 그 소린가? 난 마녀가 될
생각은 없어."
"이상하네. 내가 보기에 너처럼 마 녀의 자질을 갖춘 인간도 흔치 않 은데."
톨룩에서 방해 공작을 해오리란 건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설마 이 여자를 보내올 줄 이야.
빈말로도 좋은 인연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나는 저 마녀에게 한번 목숨을 잃은 적이 있으니까.
-죽으면 죽었지, 네 자매가 되진
않을 거야.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 다음 찾아 왔던 죽음의 감각은, 이미 한번 겪 었던 일인데도 썩 달갑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마 녀가 되기 싫을 줄이야.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그래서 널 마녀로 만드 는 건 단념하기로 했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내 빈정거리는 소리에도 레태흐태 드는 태연하게 생긋 웃었다.
이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데는 다 이유 가 있었다.
"내 동료들은?"
"걱정하지 말렴. 그저 가벼운 악몽 을 꾸는 것뿐이니까."
지금 이 상황은 동료들이 인질로 잡힌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죄다 레태흐태드의 손아귀 아래 놓인 셈이었으니까. 그녀를 함부로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차라리 나랑 손을 잡지 그래? 넌 인간이 싫다며. 차라리 톨룩이 망해 버리면 거기 사람들은 다 죽을 테 니 너한테도 좋은 거 아니야?"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
마녀에게 원하는 게 인간들의 죽 음 말고 뭐가 더 있단 말인가.
"게다가 톨룩이 멸망해서 우리까 지 같이 죽어버리면 지구의 쓰레기 들은 누가 청소해주겠어."
"그건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할 테 니까 걱정 안 해도 되는데."
나는 애써 초조한 마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한테 너무 약한 것 같아. 정말 문제라니까?"
레태흐태드가 돌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내게 쏟아져 내리면서 마치 날 가두는 철창처럼 느껴졌다.
내 뺨을 어루만지며 작게 중얼거 린다.
"내가 인간을 이렇게 아낀다니. 믿 을 수가 없네. 마녀 실격이야."
탕!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이트를 겨 눠봤지만 역시나 허상이었다.
"매정해."
제 복부를 쏜 총을 내려다보며 불 퉁하게 투덜거린다.
"너도 날 믿지 못해서 분신으로 온 주제에."
"그야 본체였으면 진짜 죽었을지 도 모르는걸."
마녀의 본신은 인간의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총에 맞았으면 거의 죽 었겠지. 죽지 않더라도 최소한 전투 불능 상태는 됐을 것이다.
"인간 쪽 황제가 부탁한 건 이런 게 아니긴 했지만…… 굳이 내가
인간의 말에 따를 필요는 없겠지."
레태흐태드가 꿈속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다시 내게 제안을 해왔다.
"마지막으로 나와 내기를 해볼 까?"
"뭘 걸고?"
애초에 내게 선택지는 없다시피 했다.
차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거면 모 를까. 레태흐태드에게 잘못 걸렸다 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잠들어있게 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내가 이기면 내 자매가 되는 거 야."
"포기한다고 한 거 아니었나?"
방금 그렇게 얘기한 것 같은데 손 바닥 뒤집듯이 말이 바뀐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자 레태 흐태드가 마녀는 원래 변덕이 심하 다고 항변했다.
"반대로 서하 네가 이기면……
레태흐태드가 평소처럼 흐릿하게 웃었다.
"내 목숨을 내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