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챕터: 크로노스의 행방
철컥. 스으윽.
연구소 안으로 들어서자, 이젠 내 얼굴을 다 외운 연구원들이 말없이 눈인사를 건네왔다.
여기를 몇 번이나 왔다갔 다 했는 지. 나도 그들의 이름을 거의 외울지경이다.
익숙한 듯 그들을 지나쳐 제일 위 층으로 향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푯말과 함께 각종 살벌한 경고문구들이 걸려 있 었지만 전부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 갔다.
"오셨네요!"
평소와 다르게 한껏 살아나 있는 박노아가 나를 반겼다.
이젠 생기발랄한 모습이 더 낯설 지경이었다.
"하하.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뇨.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요."
"제가 그랬나요? 하하하. 실은 다 른 연구원님이 건네주신 에너지 드 링크를 복용하고 있거든요."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다'면 몰라 도 '복용'이라니. 단어도 뭔가 심상 치 않다.
"그거 합법적인 건 맞죠?"
"네? 무슨 소리세요."
내가 재밌는 농담을 한다는 듯 하 하 웃어넘기고 만다. 진심으로 하는소리였는데.
"소장님. 한서하 씨 오셨어요."
스르륵.
박노아가 보안카드를 가져다대자 문을 열리면서 백목련이 눈에 들어 왔다.
"어서 와요."
"어쩐 일로 멀쩡하네요."
"전 항상 멀쩡했어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가운도 깨끗하고 세 련되게 차려입은 백목련이 보였다.
"일단 클라이언트니까요. 클라이언 트 미팅에 어설프게 구는 것도 프 로답지 못하죠."
백목련다운 대답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넓은 회의 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았고, 알 수 없는 용어들이 나열된 유인물도 받았다.
그리고 곧장, 탁.
불이 꺼지고 PPT 발표가 시작됐 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발표 시작하 겠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본격적이었다!
* * *
"……해서, 결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중간 과정을 도저히 이해 못 하고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마침 백목련이 결론 부분을 설명 하고 있었다.
"..... . 心}!그 . . . . . . 네■ . . . . . .石}며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한정적 이었지만, 최대한 정보를 종합해보 자면 이랬다.
'해당 아이템은 지구와 톨룩이 맨 처음 이어진 곳에 존재한다.'
맨 처음.
그게 중요했다.
백목련의 발표가 끝나자 나는 손 을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지구 최초의 게이트는 어디에서 발생했죠?"
"좋은 질문입니다. 한서하 씨."
백목련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게이트 시대가 도래한 직후 세상 은 혼란으로 가득했죠. 아시겠지만 지금의 시스템이 제대로 정립된 건 첫 게이트 발발 이후로도 꽤나 시 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래서요?"
서론이 꽤나 길었다. 내가 아는 백 목련이 이렇게 말을 질질 끄는 사 람이 아닌데.
불안감이 엄습한 뒤, 백목련이 종 지부를 찍었다.
"기록이 없습니다."
젠장!
"말이 됩니까. 사상 최초의 게이트 였다면서요."
"예. 그러니까 아무 기록도 없죠. 맨 처음엔 그게 게이트인 줄도 몰 랐어요. 우리는 당연히 북한의 공작 이 아닌가 의심했고요."
분단국가에서 가장 합리적인 의심 이긴 했다.
"해당 사건은 군사 기밀로 취급됐 죠. 어디 시골 산골짜기였고, 목격 자는 죄다 죽었다고 하더군요. 정부 기록에도 흔적으로만 존재해요."
"대체 왜죠? 당시엔 분명 어딘지 명확히 알았을 텐데요."
"은폐했거든요."
하필이면……!
정부 입장에서 전쟁만큼 다루기 까다로운 이슈가 어디 있겠는가. 심 지어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수백 명이 죽었다면?
여론이 여러모로 난리가 날 텐데. 그게 별로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론에 은폐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기록을 파쇄했다고요?"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방산
비리랑도 사건이 얽혔던 모양이네 요."
큰돈이 엮여있었다. 그럼 분명 윗 분들도 얽혀있었을 테고.
그래서 죄다 감춰버렸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 니죠."
백목련이 내게 다른 서류 파일을 건넸다.
"1세대 헌터들 중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록이에요."
1세대. 그들은 거의 살아있는 역사 책과 같다.
어쩌면 이들 중 한 명쯤은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서류 파일을 열어 안의 명부 를 살폈다.
아는 이름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최석철, 손이석 그리고 진성연까지.
그 외에는 회색 줄로 그어져 있는 이름들이 훨씬 많았다.
"왜 이렇게 많이 사망했죠? 헌터 의 수명은 100년을 훌쩍 넘을 텐 데……
"사인은 다양하죠. 외상 후 스트레 스 장애로 인한 정신병, 국가유공자
로 지정되긴 했지만 연금이 터무니 없이 적어 생활비를 벌려고 일하다 가 사망하기도 했고요."
백목련이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며 줄줄 읊었다.
가장 많은 사인은…… 자살이었다.
"헌터들의 정신적 구제책은 최근 에야 나왔으니까요."
"..지금도 심각하지만. 1세대 때 는 더했겠네요."
지금이야 헌터라는 직종이 돈도 많이 벌고 유명인이 되기도 하니 각광을 받지만, 1세대 때는 그렇지 도 않았다.
화려한 겉면 뒤에 드리운 그림자 를 훔쳐본 느낌이었다.
"어찌 됐든. 비석의 내용은 이게 전부였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고요."
백목련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그녀가 지난 몇 달간 갖은 고생을 다 했단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감사합니다."
"뭘요. 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백목련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지구를 구해주실 거죠?"
"최대한 노력해봐야죠."
"맥 빠지는 대답인데요."
그녀에겐 여러모로 고마운 일들이 많았다.
지금은 나도 헌터 업계에서 최정 상에 섰지만. 아무도 내 이름을 모 르던 햇병아리 시절부터 내 비즈니 스 파트너로 함께해주지 않았는가.
내가 부족한 점은 그녀가 채워주 고, 그녀가 부족한 점은 내가 채우 면서.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지 않은가.
"그럼 아는 사람들에게 먼저 가봐 야겠네요."
"행운을 빌죠."
* * *
저벅, 저벅.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 찬 공간에 한 여인이 등불을 들고 걷고 있었 다.
저벅, 저벅.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메티스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빙글 뒤돌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 공에 대고 인사를 건넨다.
"새로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사 르륵, 시온이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지? 기척을 없애주는 아이템인데."
"이 서고 안에서 제가 모르는 것 은 없습니다."
시온은 본디 황자일 적부터 이 서 고에 출입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질않았다.
황족들만 출입이 가능한 이 도서 관은 갖가지 정보가 쌓여있는 곳이 었지만 그만큼 감각이 기묘했다.
시온은 특히나 물살처럼 흐르는 정보 속을 넘나드는 느낌을 진저리 치도록 싫어하는 축에 속했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모래시계'에 대한 기록을 보려고 한다."
"어떤 모래시계를 말씀하시는 것 인지요."
메티스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
는 체를 했다.
시온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시 험해보는 것이다.
"크로노스를 말하는 거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 그의 상징물 은 모래시계이기도 했으니.
신의 이름을 완곡하게 부르기 위 해 '모래시계'라고 부르는 일이 잦 았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메티스가 지팡이를 짚은 채 등불 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자, 그곳에 빛으로 만들어진 길이 생겼다.
"이 빛을 따라가시면 원하시는 내 용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시온은 심드렁한 표정이었 다.
"아니. 이걸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럼 어떤 것을 찾으십니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귀하지 않지. 그런 건 이미 선대가 한 번씩 다 읽어봤을 것 아니냐."
카를로스가 읽었던 정보를 되새겨 선 뭔가 특별한 힌트를 찾을 수 있 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또한 몰랐을 만한 내용들. 역대
황제들이 본 적 없는 내용들을 찾 아야만 했다.
"금기 목록에서 찾아다오."
메티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폐하. 저는 금기 목록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이 서고 안에서 네가 모르는 것 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금기 목록은 역대 황제 폐하께서 후대에 알려져선 안 되는 기록들을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시온도 잘 알았다.
그 금기 목록을 설정하는 절차가
아주 까다롭고 복잡하다는 것도.
그만큼 절차를 거친 다음 금지된 사항이니, 알아서 좋을 것 없다는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으니 크로노스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톨룩이 이대로 오염에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금기 목록에 크로노스에 대한 내 용이 있으리라고 어찌 그렇게 확신 하십니까."
"당연히 그 중요한 걸 안 적어놨 을 리가 없거든."
이름도 모를 겁쟁이 황제가 죽음 을 두려워해 크로노스를 톨룩에서 추방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에 대한 기록이 분명 남아있을 텐데 이제까지 그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관련 정보들이 몽땅 '금기 목록'으로 분류됐단 소리였 다.
"혹시라도 기록을 남겼다가 황실 에 반하는 이들이 크로노스를 되찾 아올까 봐 두렵기라도 했나 보지."
그 겁쟁이의 심리는 중요한 게 아 니었다.
이 서고 어딘가에, 크로노스가 지 구 어디에 떨어졌는지 기록이 있다 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겐 접근 권 한이 없습니다."
"이 서고의 관리자인 자네에게도 '권한'이란 게 있나."
"물론이죠."
"그걸 누가 정하지?"
"황제 폐하께서 정하시죠."
"내가 자네에게 금지 목록에 접근 할 권한을 준다고 하면 되는 것 아 닌가."
시온이 심기 불편한 기색을 내비 쳤지만 메티스는 단호했다.
"서고의 관리자가 영원히 '메티스' 인 것처럼, 서고의 주인도 영원히 '황제'입니다. 그건 현 황제 폐하만 이르는 말이 아닙니다."
도무지 협상의 여지가 보이질 않 았다.
시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쯧, 찼다.
"곧 죽어도 보여줄 수 없다?"
" 예."
그 말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시온
이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그럼 죽어야지."
푸욱!
메티스가 들고 있던 등불이 바닥 과 부딪치며 작게 소음을 냈다.
"……놀라지 않는군."
메티스는 제 가슴을 꿰뚫은 검에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물이 그녀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도리어 메티스는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반항도 하지 않고."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 까..
메티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제아무리 메티스라 할지라도 황제 를 해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었으니 까.
"옳지 못한…… 선택이십니다
"위급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시온이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어투로 대꾸했다.
서고의 관리자를 죽이는 건 대대 로 금기에 가까웠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새가 없었다.
스윽.
칼을 뽑아내자 메티스의 몸이 바 닥을 뒹굴었다. 핏물이 배어나오는 건 없었다.
"그러게…… 제가.... 말하지 않 았습니까……
-폐하. 주제넘게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이전에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가 자연히 떠올랐다.
-제 후임 '메티스'를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곧 도서관이 바뀔지도 모르니까요.
그때 그가 무어라 대꾸했더라.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저 역시 그러길 바란답니다.
"……제 후임을…… 준비하셔야겠 습니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서고를 생각하는 메티스를 바라보며, 시온 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메티스의 시신을 밟고 앞 으로 나아갔다.
관리자를 잃은 서고는 침입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모든 걸 내어줄 수밖 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