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마왕성은 호화롭고 넓었다.
마음이 불편한 것만 빼면 모든 게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탁.
벨제부브가 서류를 내려놓는 소리 에 올리버가 크게 움찔했다.
그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자
신이 눈치를 보는 게 조금 억울했 지만, 마왕 앞에서 객기를 부릴 만 큼 간이 크지 못했기에 조용히 마 음을 추슬렀다.
"한서하의 동료들이라고."
붉은 눈동자가 올리버를 위아래로 훑었다.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최대한 빨 리 재정비를 마치……
"아니."
양해의 말을 구하려는데 벨제부브 가 뒷말을 끊어냈다.
"어차피 이 성은 빈 방이 많으니.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테토. 불편한 일 없게끔 잘 대접하도록."
"알겠습니다!"
테토는 모처럼 맡은 임무에 잔뜩 신이 났다.
그는 벌써부터 이 인간 무리를 어 떻게 대접해야 잘 대접했다고 온 마계에 소문이 날지 고민하고 있었 다.
"뭐야. 그 한서하의 동료들? 생각 보다 평범하네."
마왕의 집무실 구석에는 그 보기 드물다는 다크 엘프가 소파에 드러 누워 잔뜩 빈둥거리고 있었다.
올리버는 아까부터 그의 중얼거림 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참. 저기 중앙 회관에 영상석이 놓여 있는데, 그걸 이용하면 한서하 랑 연락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마지막에는 제법 유용한 조언을 건넸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올리버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건넸다.
벨제부브는 이만 가보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한창 후계자 양성으로 바쁜 때라
더 이상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 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올리버는 마왕 의 축객령에 말 없이 테토를 따라 나갔다.
* * *
-대부분 무사히 넘어왔습니다.
영상석으로 보이는 이들이 다들 낯이 익었다.
비욘드에 갔을 때 한 번씩은 봤던 얼굴들이다. 대부분 무사하니 천만다행이었다.
-다행히 성의 주인께서 우릴 배려 해주셔서 다들 여독을 풀고 있고요. 한동안 제대로 잔 적이 없…….
올리버가 차분하게 현재 상황을 브리핑하는데, 갑자기 셀이 끼어들 었다.
- 한서하!
영상석이 온통 셀의 얼굴로 가득 찬다. 얼마나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 건지.
-대체 뭐 하고 다니길래 마왕하고 친해진 건데? 아니, 그것보다 이사 벨라 누님은? 제대로 얘기해준다며
그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게 많긴 했다.
우선은 이사벨라에 대해서 말해야 겠지.
"주변에 다른 사람들 없는 거 맞 지?"
-나랑 올리버 형밖에 없어.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들한텐 말 하지 말아줘."
많은 이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으 니까.
나는 슬쩍 영상석 뒤편으로 고개
를 뺐다.
그리고 생겨난 빈 공간에 이사벨 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짠."
-이사벨라 님?!
-누니이이임! 누님이 왜 거기에?!
"말하자면 복잡한데. 일단 죽은 건 아니니까 안심해."
여기가 지구라는 것까지 밝히긴 좀 어렵겠지. 아직 저들은 내가 지 구에서 왔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뭐야! 어디야? 얼른 만나러……!
"지금 당장은 안 돼. 섣불리 움직 였다가 또 제국이 따라붙으면 어떻 게 하려고."
_그건…….
내 말에 셀의 얼굴이 대번에 시무 룩해졌다.
"그래도 최대한 방법을 마련해보 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저희도 여기서 잠시 머물면서 앞 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습 니다.
올리버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당신 덕분에 잠시 숨이라
도 돌릴 수 있었습니다.
" 뭘요."
-아! 그래! 대체 마왕님이랑은 어 떻게 아는 사이인 건데?
셀이 올리버를 밀치고 자리를 차 지한다.
올리버가 적당히 하라며 짜증을 부리지만 셀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말하자면 길어."
-우리 막 이렇게 안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제물로 잡혀가고 그런 건 아니지?
"그럴 일 없어. 그게……
나는 잠시 그와 나의 관계를 어떻 게 정의해야 할지 고민했다.
종속관계? 그가 나한테 영혼을 판 관계?
뭐라 말해도 영 이상하기만 하다.
"그게에……
내가 뜸을 들이자 셀이 점점 기대 감 서린 표정을 했다.
심지어 뒤에서 올리버도 슬쩍 궁 금증 어린 눈빛을 보낸다.
"……그 녀석이 나한테 빚을 진
게 좀 있어서."
영혼 정도.
-와〜. 마왕한테 빚을 지게 했다 고? 이 정도면 놀랍다 못해 무섭 다, 무서워!
셀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닌 척해도 이사벨라가 살아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해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무튼 무슨 일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하고. 일단 추격이 좀 잠잠해질 때까지는 거기서 지내는 게……
-벌컥!
-여긴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제발요!
그때 영상석 너머에서 심상치 않 은 소리가 들렸다.
이사벨라가 황급히 화면 밖으로 나갔고, 나는 올리버와 셀 너머로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눈을 동그랗 게 떴다.
"엘리사?"
내 목소리에 반웅했는지 엘리사가 고개를 휙 들었다.
-요정님! 요정님, 제 말 좀 들어주 세요!
-……요정님?
내 호칭에 여러모로 의문이 많아 보이는 눈치였지만. 일단 나중에 얘 기하도록 하지.
"놔주세요. 괜찮아요."
내 말에 엘리사의 양팔을 붙들고 있던 이들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방문이 다시 닫히자, 엘리사가 눈 물 맺힌 눈동자로 날 웅시했다.
-요정님. 제발 저희 오빠를 구해 주세요.
"에녹? 에녹이 왜'?"
내 말에 올리버와 셀이 난감한 얼 굴을 했다.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무사히 넘어 갔다고 했지. 에녹이 뒤에 남기라도 한 걸까?
-그게…… 제국군이 따라붙은 것 같다고 잠시 뒤를 보고 오겠다고 했는데…….
-아직 마계로 넘어오지 않았단 말 이야?
내 물음에 셀이 고개를 끄덕였고, 엘리사는 울상이었다.
-혹시나, 혹시나 오빠가 잘못되기
라도 했으면……!
나는 엘리사를 달래면서 천천히 다독였다.
"진정해.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 야. 내가 미리 에녹에게 준 반지가 있거든."
-반지요……?
"그게 신의 조각이라서, 만약 목숨 을 잃을 정도로 중대한 상처를 입 으면 내 쪽으로 자동으로 옮겨지 게……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뒷말을 흐렸 다.
왜냐하면 내 눈앞에 너무도 눈에 익은 반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엘리사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반지란 게 혹시... 이거…… 말 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건넨 반지가 엘리사에게 있 었다!
나도 모르게 영상석 가까이 확 다 가가며 그녀를 채근했다.
"그 반지 어떻게 된 거야!"
-저, 저는 그런 중요한 반지인 줄 몰랐어요. 오빠가 저한테 끼고 있으라고……. 언젠가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그랬는데……!
젠장.
에녹이 뭔진 몰라도 좋은 것 같으 니 일단 제 동생부터 챙겨준 모양 이다!
-안그래도 지금 보고하려고 했는 데…….
올리버가 천천히 상황 정리를 해 줬다.
"그러니까. 마계로 진입하기 전에 제국군이 따라붙어서 에녹이 홀로 처치한다고 나섰고. 그 이후로 아무 런 소식도 없다? 마왕군 쪽에서 경
계 구역에 보초를 세우고 있는데 도?"
어떻게 생각해도 최악의 가능성밖 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은 걸 봐 선…… 최소 제국군 놈들한테 붙잡 힌 거고, 어쩌면 이미…….
셀이 뒷말을 삼켰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흑, 흐윽! 이 반지를 받는 게 아 니었어요! 그냥 장신구인 줄 알고 받았는데……!
"엘리사. 울지 말고 잘 생각해봐.
두 사람도요. 뭔가 또 기억나는 거 없어요? 에녹 정도 실력이면 쉽게 제압당하진 않았을 텐데, 아무런 소 란도 없었다고요?"
-제국군이 따라붙었다고, 처치하 고 뒤따라가겠다는 말만 했습니다. 우린 선두에 있었으니까 그런 줄만 알았고요.
올리버나 셀은 영 모르겠다는 얼 굴이었다.
반면에 엘리사는 천천히 울음을 그치더니 점점 얼굴을 딱딱하게 굳 혔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
다.
-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 뭐가?"
- 그게, 분명 거긴 숲속이었잖아요.
- 그랬지. 그러니까 그 수풀 속에 적이 숨어있었던 거잖아.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적들이 은신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 그, 아실지 모르겠지만. 숲에 들 어가면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공명' 을 할 수 있어요.
다른 이들은 아리송한 표정이었지
만 나는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몸이 한층 가벼워지고 기감이 예 민해지는 그 느낌.
숲 밖에 있을 때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쾌한 감각 말이다.
-저도 부족하긴 하지만 하프 엘프 라 공명이 가능하고요. 그런데 그때 는....
엘리사가 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 겼다가 눈을 떴다.
-그땐 역시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아요.
* * *
제국군을 처치하러 가겠다며 거짓 말을 하고 사라진 에녹 클라우드.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혼란 속에서 결국 '일단 내일 아침 까지 기다려본다'로 결론이 났다. 영상석을 끄고 나서도 좀처럼 심란 한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렇게 신경 쓰여?"
이사벨라가 내 눈치를 살핀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 은데. 여동생을 두고 갔잖아."
"그래. 아마 배신은 아니겠지."
제 여동생을 그렇게 끔찍이 아끼 는데. 배반이면 적진 한복판에 여동 생을 두고 갔을 리가 없다.
"이 중요한 시점에 개인행동을 하 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게 대체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아는 한 에녹의 동기는 대부 분 엘리사였다.
그가 황제의 기사가 된 것도,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도.
그런데 그 엘리사를 두고 혼자 어 딘가로 향했다니. 너무 이상한 일이 었다.
"그 사람 사정을 어떻게 다 알겠 어. 뭔가 이유가 있기야 하겠지. 어 차피 지금은 다들 마계에 있으니 황실도 어쩔 도리가 없잖아. 너무 걱정하진 마."
이사벨라의 말에 나도 그래야겠다 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도 얼굴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
"그러게. 처음에 혁명 실패했단 얘 길 들었을 땐 기절했잖아."
"그땐 정말……
이사벨라가 다시 그땔 생각해도 충격이 생생한지 입술을 꽉 깨물었 다.
"무사한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 야. 이번에 혁명에서 실패하면 정 말…… 다들 영영 못 볼 줄 알았거 든."
보통 실패는 그런 것을 의미하곤 하니까.
이사벨라가 어떤 걸 걱정했는지 잘 알았다.
내가 재빨리 벨제부브를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제국군에게 붙잡혀 전 부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혁명군이라 할지라도 제 국의 땅에서 영원히 도망칠 순 없 는 노릇이었다.
한발 늦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 다.
♦ * *
"저 애는……
"아까 보니까 분명 귀가……
엘리사는 주변을 피해 어두운 로
브를 뒤집어썼다.
아까 소동을 부리면서 로브가 한 번 벗겨진 탓에 주변 이들이 엘리 사를 보며 쑥덕거리고 있었다.
' 어떡하지……
엘리사는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오랜 시간 탑에서만 지내서 잊고 있었다. 이 따가운 시선들.
엘프 마을에서 지낼 때도 그랬고, 나중에 인간 마을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
마치 이물질이나 구경거리를 보는 것 같은 시선.
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 나는 감각에 엘리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오빠……. 대체 어딜 간 거야!'
눈물이 핑 돌려고 하길래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라도 좋으니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시선을 피해서.
탁!
"엉? 뭐야."
"죄, 죄송합니다."
그러다 실수로 누군가와 부딪치자 엘리사는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꾸벅 인사를 했다.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가려고 하는 데, 그가 엘리사의 옷자락을 붙잡았 다.
"왜, 왜, 왜 그러세요?"
"아~! 뭔가 익숙한 느낌이라 했더 니."
엘리사의 눈앞에 불쑥 누군가의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너 엘프구나?"
회색빛 피부를 가진 이상한 사람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