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이사벨라!"
복부에 검이 관통한 채 바닥을 나 뒹군다. 로브로 가린 머리카락이 그 충격으로 튀어나왔다.
잘 다듬어진 단발 머리카락이, 부 정할 수 없게 새빨간 색이었다.
피어나는 장미처럼 화려한 그 빛
깔 말이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이사벨라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녀는 마치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시온에게 겨눴던 총 을 세드릭에게 겨누고 있었다.
이사벨라를 꿰뚫은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주 명확했다.
세드릭.
내가 간단한 트릭으로 따돌리고 온 그 사내였다.
그는 서 있는 곳에서 검을 멀리 던져 나를 노렸던 모양이다.
그걸 눈치챈 이사벨라가 나를 대 신해 그 검을 맞은 거고.
"5……황자를……
그 말을 끝으로 이사벨라는 숨을 멎었다.
툭, 떨어지는 고개와 흐리멍텅하게 변하는 눈빛이 모두 그녀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가 돌 아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순간 감정에
휘말렸지만, 내겐 사전에 깔아둔 안 전 장치가 있었다.
다음 순간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다른 이가 먼저 나섰다.
콰드드드득!
유려한 붓 자국이 허공을 갈랐다.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느껴졌다.
셀의 격렬한 감정에 반응하는 것 처럼 마력이 스파크를 이루며 이리 저리 튀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셀의 거친 붓질이 세드릭을 향했 다.
이미 잔뜩 지쳐있는 데다, 마지막 모든 힘을 검을 던지는 데 쓴 세드 릭이 공격을 피할 기력이 있을 리 가 없었다.
서걱.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가 깔끔하 게 도려내졌다.
이사벨라가 그런 것처럼. 그도 붉 게 물들었다.
그러자 시온이 새된 비명을 질렀 다.
"세드리이이이익!"
자리에서 일어나 세드릭에게 달려
가려는 시온의 몸뚱어리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한 번 더 총을 겨눴다.
그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날 바 라본다.
붉게 핏발이 선 눈으로 내 얼굴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빤히 응시한다.
나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와 마주했다.
그리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을 때였다.
휘이이이이익!
콰앙!
강력한 바람이 나를 내동댕이쳤다.
"으윽!"
대체 무슨 일이지?
바닥을 한바탕 나뒹군 뒤에 서둘 러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 다.
지금까지 다른 후보가 죄 죽어나 갈 때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가호 가, 바닥으로 내려와 시온을 둘러싸 고 있었다!
"시간은 아직 5분 더 남았는
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여태까지 황태자를 선택하는 데 최소 20분은 걸렸다며!"
혁명군들이 저마다 우왕좌왕했다.
"저건…… 황태자가 정해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잖아."
가호가 후계자의 몸을 휘감고 서 서히 그 안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그게 바로 황태자가 선택되었다는 증거였으니까.
"말도 안 돼!"
"시간 제대로 잰 거 맞아?!"
"1분도 아니고 5분이나 남았다고! 잘못 쟀을 리가 없어!"
젠장. 그렇다면 남은 건 딱 하나뿐 이었다.
"……가호가 예정보다 일찍 움직 였다!"
내가 큰 소리로 외치자 당혹스러 워하던 이들이 모두 침착을 되찾았 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계획이 틀어졌다! 가호가 후계자 를 선택해버렸어!"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다.
"……혁명이 실패했다."
올리버가 작게 중얼거렸다.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기에 모두 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후퇴한다."
"하지만!"
"황족은 거의 다 죽였는데!"
모두가 아쉬움에 한마디씩 덧붙였 다.
"후퇴한다!"
올리버가 단호하게 외쳤다.
"훗날을 도모해야 한다. 어쩔 수
없어!"
올리버도 말하면서 분한지 이를 아드득 갈았다.
"어차피 얼간이 5황자 아니오! 가 호의 선택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 가 어떻게 뒤집어 볼 순 없겠소?"
"가호가 선택한 이상 5황자를 죽 이는 건 불가능해졌다. 황족이 살아 있는 이상 혁명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우리의 전력으론 중앙을 잠시 점 거하는 것뿐. 다른 지역까지 설득하 긴 어렵다. 북부와 남부가 개입하지 않겠다 한 것도 어디까지나 혁명이
성공해 황족이 남지 않았을 경우 얘기다!"
올리버가 냉정하게 현실을 토로했 다.
"황족이 한 명이라도 살아있는 한, 나머지 지역도 힘을 합쳐 우릴 압 박해올 거다. 그럼 정말로 이 성에 갇혀서 전부 죽는 수밖에 없어."
지구의 역사에도 그런 경우가 꽤 나 있었다.
성을 점령해 3일 동안 천하를 누 린 이들의 일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그들의 최후가 모두 비참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올리버의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침울하게 변했다.
그때 셀이 끼어들었다.
"저는 여기 남겠어요."
늘 방긋방긋 웃던 셀은 어디 가고, 잔뜩 악에 받친 사내만 남았다.
그는 이사벨라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했 다.
"셀. 고집부리지 마. 더 이상 승산 이 없다니까!"
"이미 누님이 죽었는데, 전부 무슨 소용이야."
-그것들을 내가 국가에게 빼앗겼 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네. 애초부 터 나는 그런 걸 받은 적이 없으니 까.
셀이 모닥불을 앞에 피워두고 내 게 들려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나를 위해서 밤 낮없이 고생하는 누님이 있잖아.
그는 처음부터 오로지 이사벨라를 위해 싸워왔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이사벨라의 시신을 끌어안은 셀에 게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올리버도 그 참담한 심정에 차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나는 굳어있는 올리버 대신 셀을 회유하려고 나섰다.
"셀. 이사벨라에 대해선 내가 나중 에 설명해줄게. 그러니까 우선 여길 빠져나가자."
"난 여기서 죽을 거야."
탁!
그가 내 손을 거칠게 쳐냈다.
"셀!"
"누님이 죽었는데. 혁명이 무슨 의 미가 있냐고!"
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차 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난……!"
결국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안 죽었어."
"……뭐라고?"
"이사벨라. 안 죽었다고."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 게 속삭였다.
처음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 던 셀이 이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시신이 있잖아."
"가짜야. 자세히 보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말 이다. 테오도르가 꽤나 힘을 썼지.
죽은 사람의 시신이 갑자기 사라 지는 건 아주 부자연스럽게 보일 테니까 말이다.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거짓말이 라면. 아무리 너라 해도 가만두지 않을거야."
"거짓말이 아니야. 자세한 건 나중 에 설명해줄게. 일단 여기부터 나가 야 해."
이대로 꾸물거리다가 포위당하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진짜지?"
셀은 피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내 려다보며 다시금 물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진짜였다.
" 일어나."
내 말에 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섰다. 올리버는 내가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잡담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셀. 문을 열 수 있어?"
"마력을 많이 소모해서 길게는 못 열 것 같아……
셀의 대꾸에 올리버가 빠르게 상 황을 정리했다.
"최대한 빨리 이동하도록 준비를 모두 마친다. 외벽을 틀어막아 시간 을 벌고, 부상자들 먼저 옮길 수 있게 준비한다!"
그러자 다들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사망자와 부상자를 가려내는 작업 을 시작했다.
저마다 제 죽어버린 동료를 보며 참지 못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5황자를 바라봤 다.
그는 여전히 안개에 휩싸인 채였 는데, 서서히 그 몸에 흡수되는지 점점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 * *
시온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세드리이익! 세드리익!"
늘 그와 함께하던 기사가 이번엔 옆에 없는 것이 불안해 그의 이름 을 목 놓아 외쳤다.
"대체 어딜 간 거야! 나 여기 있 어어어!"
그의 충직한 기사가 자신을 두고 그냥 떠났을 리 없다는 걸 알았다. 분명 한눈팔다가 그를 놓친 것이리 라.
시온은 한참을 앞뒤 분간도 안 되
는 안개 속을 거닐다가 이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다리가 퉁퉁 부 어 있었다.
"왜 내가 여길 헤매고 있는 거 지?"
한참 동안 세드릭을 부르짖다 지 치고 나니, 그제야 생각을 좀 정리 할 여유가 생겼다.
"……난 황태자 즉위식에 있었는 데."
희뿌연 안개처럼 기억도 흐릿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아침에 일어나 즉위관을 향 해 걷다가 3황자와 1황녀를 만났었 다.
인사를 하고 대기실로 들어간 다 음 지루한 예식을 모두 거쳤지.
시온은 제 이마를 어루만졌다.
카를로스가 성수를 적신 손으로 톡, 건드렸던 곳이었다.
"맞아! 갑자기 습격이 있었지."
그게 떠오르자 모든 것이 순차적 으로 기억났다.
황제 폐하가 사살당했고, 형제들도 모두 죽었다.
마지막으로 그만 남자 남은 인원 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그래……. 리트도 날 배신했
오갈 곳 없는 평민이 잔재주가 좋 길래 거둬들였건만 이렇게 배신을 할 줄이야.
시온은 내심 리트와 그녀의 동생 라임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고 있 었기 때문에 더욱 서글펐다.
"세드릭이 마지막까지 날 지켜줬 는데."
그의 등 뒤에 숨어서 훌쩍이던 기
억이 난다.
그러다가 리트가 나타나 세드릭에 게 싸움을 걸었고, 세드릭이 한눈을 판 사이 그녀가 자신에게 총을 겨 눴다.
"그리고……
시온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 아."
마치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남은 기억이 순식간에 시온에게 밀려 들 어왔다.
"세드릭이…… 죽었어."
그는 하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의 기사 가 죽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약자 의 손이었다.
-당신은 나한테 질문을 할 만한 위치가 아니에요. 지금은.
리트는 본 적도 없는 차가운 얼굴 로 그렇게 말했다.
약자는 질문할 권리조차 없다고.
그녀의 말대로다. 시온은 약자라서 눈앞에서 모든 것을 빼앗겼다.
부모도, 형제도, 그의 소중한 기사 도.
"너무하잖아."
그는 제 가슴 안쪽에서 피어오르 는 어떤 열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건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시온은 여태까지 자신을 죽이며 살아왔다.
'멍청하지만 무해한 황자'. 그 정 도가 딱 그가 원하는 위치였다.
그 이미지를 위해 그는 꽤 열심히 힘써야 했다.
왜냐하면, 저 수식어 중 무엇 하나 들어맞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모르겠어? 저건 함정이다.
-그래. 3황자께서 그렇게 허술하 게 일 처리를 할 리가 없지. 이건 잘 짜인 연극이야.
그는 생각보다 않았고.
머리가 나쁘지도
-짜증스럽게도, 황족으로 태어났 으면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면서이곳으로 쫓겨나왔으니. 내가 화가 나겠느냐, 안 나겠느냐?
-이놈도 쳐라. 난 눈치 빠른 녀석 들이 싫거든.
성품이 물렁하지도 않았다.
그가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전의 흐리멍덩했던 눈빛은 온데 간데없고 본 적 없는 총기로 맑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