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커허억……!"
"황제 폐하를 지켜라!"
황제와 조슈아 사이로 기사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쿠우우우웅!
"적습이다!"
"막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철문이 뚫리며 혁 명군이 쏟아져 내렸다.
저마다 제 앞을 가로막는 혁명군 을 상대하느라 급급했다.
탁!
"괜찮으십니까, 폐하!"
근위대장이 그 난리통을 뚫고 들 어가 조슈아를 밀치고 카를로스의 안위를 살폈다.
"나는, 괜찮다……! 그보다 황태자 후보들이!"
혁명군과 기사들이 이리저리 뒤엉 켜 싸우고 있었다.
그 위 천장에 아직도 가호가 빙글 빙글 돌고 있었다.
"조금 더 버텨야 한다! 가호가 후 계자를 정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 았어!"
카를로스가 초조하게 외쳤다.
황태자 선택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최소 20분!
조금만 더 버티면 황태자가 가호 를 이어받을 것이다.
"으으윽!"
카를로스는 허리춤에 박친 검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함부로 빼 면 출혈이 심합니다."
근위대장이 그를 만류하자 카를로 스도 손에 힘을 풀었다. 난생처음 겪는 강렬한 통증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슈아. 저 배신자를 처단해!"
카를로스의 외침에 근위대장이 스 룽, 검을 빼 들었다.
"내 너를 많이 아꼈건만."
카를로스가 목을 긁듯이 중얼거렸 다. 그러자 조슈아가 차분한 음성으 로 대꾸했다.
"저 역시 폐하를 많이 아꼈습니 다."
"그런데 왜 나를 배신한 것이냐."
"글쎄요..
조슈아가 슬쩍 눈빛을 흘려보냈다.
"그걸 모르시니 제게 칼을 맞으시 는 겁니다."
"이런 불확실한 계획에 네 목숨을 걸다니. 참으로 답지 않은 선택을 했어."
카를로스는 까딱,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근위대장이 검을 높게 들 어 올렸다.
후우욱!
검날이 막 조슈아의 목덜미를 관 통하려는 찰나였다.
타악!
총신이 검을 가로막았다.
'힘이...
속력을 얻어 내리꽂히는 검을 단 번에 막아낸다. 근위대장이 손아귀 에 더 힘을 줘보지만 끄떡도 하질 않았다.
"당신이군요."
조슈아의 창백한 안색에 겨우 안 도 어린 미소가 서렸다.
"믿음직스러운 총잡이라는 게."
한서하. 그녀가 조슈아를 지키며 섰다.
각개전투 형태로 이리저리 흩어지 면서 나 역시 전투가 훨씬 편안해 졌다.
이런 대난투전, 1대 다수의 전투가 내 특기였으니까!
'공간 간섭!'
휙! 으드득!
막 기사에게 찔리려는 혁명군의 앞을 막아서고, 당황하는 기사의 목 을 꺾어버린다.
날 발견하고 달려드는 기사를 피 해낸 다음 공간 간섭으로 뒤를 점 했다.
탕!
총을 쏨과 동시에 시신을 딛고 공 중으로 날아올랐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검날이 꽂힌 다.
공중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면
서, 다시 탕!
공간 간섭을 이용하여 전장을 누 비면 모든 곳이 내 손바닥 안에 있 는 것과 같았다.
'이사벨라가 부탁했던 게……
이런. 상황이 꽤나 급박했다.
'공간 간섭.'
타악!
노이트의 총신으로 검날을 막아냈 다.
그러자 제대로 검 한번 휘두른 적 없을 것 같은 사내가 내게 아는 체 를 해왔다.
그 손으로 방금 황제를 찌르긴 했 지만 말이다.
"당신이군요. 믿음직스러운 총잡이 라는 게."
이사벨라가 날 그렇게 표현한 모 양이지.
나 역시 그에 대해 들은 바가 있 었다.
"믿음직스러운 정보책. 맞죠?"
이름이 조슈아라고 했던가.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나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근위대장의 검을 슬쩍 흘려보냈다.
스그극!
그러자 중심을 잃은 근위대장이 잠시 비틀거렸고, 그 틈을 타 단검 이 그의 목을 노렸다.
후욱! 휙!
하지만 근위대장 역시 노련한 솜 씨로 몸을 비틀어 피해내고는 검을 다시 사선으로 그어 내린다.
'공간 간섭.'
순식간에 내 신형은 사라졌다. 곧 이어 근위대장의 목을 내 다리 사 이에 끼웠다.
우드드득!
허벅지 힘으로 강하게 조이며 비 틀자 경추가 박살나면서 살벌한 소 리가 울렸다.
쿵!
근위대장의 거대한 신형이 바닥으 로 내동댕이쳐졌다.
순식간에 내 앞에 두 개의 선택지 가 생겼다.
'조슈아를 챙긴다. 혹은 황제를 죽 인다.'
눈동자가 빠르게 구르다가 이내 황제에게 고정됐다.
이사벨라의 부탁보다도 혁명의 성 공을 우선시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고 황제가 피투성이 인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뚜벅, 뚜벅.
그가 뒤로 물러나면 내가 그만큼 앞으로 다가간다.
황제는 거의 바닥을 기다시피 하 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날 보며 뒤로 기 어가던 그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에녹 경!"
황제의 얼굴이 환하게 바뀐다.
"잘 왔군! 에녹 경, 저자를 죽이면 내가 당장 동생을 풀어주지!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자유롭게 해주겠다 고 분명 약속하지 않았나!"
황제는 에녹의 바짓가랑이를 붙잡 고 횡설수설했다.
스룽.
에녹이 날 응시하며 검을 빼 들자, 황제가 내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저 불경한 침입자를 어서 죽여라! 그러면 내가 금은보화를 상으 루...
서걱.
에녹의 검이, 황제의 목을 베어냈 다.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에녹을 바라본다.
하지만 성대가 잘려서 나오는 건 바람 소리뿐이었다.
툭.
황제가 죽었다.
이걸로 에녹과 다니엘의 1차적인 목표는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녹은 황제의 시신을 잠시 내려 다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알 도리는 없었다.
"에녹 클라우드가 배신했다!"
"그가 황제 폐하를 시해했다!"
"배신자, 배신자를 처단하라!"
에녹을 향해 기사들 수십이 달려 들었다.
숫자가 많으니 시간이 좀 걸릴 뿐 이지, 저런 이들에게 에녹이 죽을 리가 없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서 조슈아를 다 시 챙겼다. 내가 잠시 눈을 뗀 사 이에도 그는 용케 살아남아 있었다.
"즉위관 밖으로 옮겨드리죠. 알아
서 잘 숨어있어 보세요."
"숨을 곳은 이미 마련해뒀습니다."
책사다운 준비성이었다.
나는 그를 엄호하며 길을 뚫었다. 박살이 난 철문 틈으로 그를 내보 내자, 조슈아가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았다.
"행운을 빌어요."
그리고 그는 서둘러 바깥으로 달 려 나갔다.
* * *
그야 말로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 다. 영광으로 가득해야 할 즉위식 날에 혁명이 일어날 줄이야!
"막아! 막으라고! 저 미천한 것들 이 어딜 감히..
빈센트는 품위를 신경쓸 새도 없 이 기사들에게 빽빽 소리를 질러댔 다.
기사들은 최선을 다해 분투했지만 혁명군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놈들을 좀 베어낼라 치면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이 그들을 위 협하는 통에 제대로 집중하기도 어 려울 지경이었다.
서걱!
푸욱!
기사들은 하나둘 검에 베이거나 화살에 쏘여 쓰러졌다. 빈센트를 감 싸던 방어막이 점점 얇아지고 있었 다.
"안돼……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죽음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 *
샬럿 역시 비슷한 시기에 현실을 직감했다.
이곳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 라고.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걸까? 그녀 는 현명한 황제가 되기 위해 이제 껏 노력해왔는데. 대체 어디서부 터?
자신을 죽이기 위해 악을 쓰는 백 성들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의 상식 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1황녀 저하! 부디, 부디 검을 쥐 십시오……!"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기사들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
샬럿은 제 허리춤에 놓여진 검을 뽑아들었다.
화려한 예복에 맞춰서 갖은 보석 이 박힌 아름다운 예검이었다.
이 칼로 저들의 팔뚝이나 베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허울 좋은 검이었다. 실속은 하나 도 없는.
어쩐지 샬럿은 그게 제 모습과 닮 았다고 생각했다.
우습지 않은가. 평생을 황제가 되 고자 바쳐왔는데. 백성들의 손에 목 숨을 잃게 생겼으니.
상황에 맞지 않는 실소가 새어나 왔다.
" 으아아아아..
서걱.
올리버는 난투 끝에 3황자의 목을 베어냈다.
그 역시 3황자의 호위 기사들과 싸우느라 온몸이 엉망이었지만, 그 래도 황족의 목을 베어내는 데 성 공했다!
"3황자가 죽었다아아!"
올리버는 3황자의 시신을 들어 올 리며 크게 외쳤다.
그러자 혁명군들의 사기가 단숨에 올라갔다.
"남은 건 1황녀와 5황자뿐이다!"
"서둘러야 한다!"
1황녀를 지키는 기사들도 머지않 아 쓰러질 기미가 보였다.
그들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수준이지 이미 온몸이 넝마처럼 엉 망이었다.
5황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5황자의 기사는 단 한 명뿐이었는 데, 구석이라는 유리한 자리 선점과 뛰어난 실력으로 아직까지 5황자를 지키고 있었다.
올리버는 고갤 들어 천장을 바라 봤다.
가호는 아직까지도 후계자를 정하 지 못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대략 8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단숨에 끝냈어야 했는데. 인력의 배치뿐만 아니라 즉위관의 방벽도 예상보다 더 단단한 탓이었다.
서걱!
"1황녀를 사살했습니다아아!"
"남은 건 5황자뿐이다 r
"벽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인원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남은 8분.
그 안에 5황자를 죽이면 혁명군의 승리였다!
* * *
세드릭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 을 겨우 내리눌렀다.
점점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 었다. 어깨가 욱신거리고, 검을 휘 두르는 팔에 아릿한 감각이 치고 올라왔다.
"세드릭……!"
하지만 그는 고통 어린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등 뒤에 시온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쓰러지면 5황자 저하 는 그대로 이 잔악한 놈들 손에 죽 을 것이다!'
세드릭은 그 생각으로 거의 초인 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황태자 즉위식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그는 차마 시온에게 말하진 못했 지만 내심 통탄하고 있었다.
'전부 내 욕심 때문이다.'
그가 그 이상한 제안을 받아들이 지 않았다면. 시온을 황제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시온이 원하는 대로 그저 죽은 듯이 사는 삶을 누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전부 내 과욕이 부른 참사다.'
그러니 목숨 걸고 5황자를 지켜내 야만 했다.
그런 의지를 다잡는 도중, 그에게 밀려오는 적들 틈으로 낯익은 얼굴 이 보였다.
기묘한 제안을 해왔던 그 여자. 한 서하였다!
"너……! 너어어어!"
세드릭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 다.
결국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이 세드 릭이라곤 하나, 시온이 황태자 후보 자리에 오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바로 저 여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 혁명군 틈에 섞 여서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고 당 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엔 놀랐지만 조금만 생각해보 면 전말이 뻔했다.
"우릴 갖고 논 죄, 네 목숨으로 갚 아야 할 것이다!"
세드릭의 분노 어린 목소리 뒤로, 시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리트.. 어째서..애
그러자 한서하는 아무런 죄책감 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유감이네요."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접근했 던 건가!"
세드릭은 바쁘게 검을 놀리면서도 극심한 분노에 힘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자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한서하가 주변의 혁명군들에게 양
해를 구했다. 어차피 여기서 세드릭 을 상대할 만한 이는 그녀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나서봤자 명만 재촉 하는 일이다.
"뒤에 있는 5황자를 노려 주세요."
그 말에 세드릭을 향해 날아오던 눈먼 검들은 거의 사라지고, 온전히 한서하만이 남았다.
한 손엔 단검을, 한 손엔 총을 쥐 고서 말이다.
먼저 공격한 건 세드릭 쪽이었다. 그는 섬세하게 한서하의 품을 파고 들며 검으로 정확히 목의 동맥을 노렸다.
휘익
그러나 한서하의 신형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면서 검은 허공을 베어냈 다.
세드릭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등 뒤로 휘 둘렀다.
후욱!
이번에도 역시 허공만 갈랐지만, 적어도 뒤통수에 총구가 겨눠지는 일은 없었다.
철컥.
총이 장전되는 소리에 세드릭이
한 번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사륵.
이번엔 검 끝에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다.
옷자락을 베었다. 확실했다.
조금씩 한서하의 움직임을 따라잡 고 있었다.
'보이지가 않아.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그는 한서하를 찾아 주변을 휙휙 둘러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 다.
초조해하던 것도 잠시. 세드릭은
도리어 눈을 감았다.
'보이는 것에 집착해선 안 된다. 상대는 자유자재로 몸을 숨길 수 있는 실력자야.'
눈을 감자 기감이 훨씬 예민해지 면서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한서하의 기 척을 눈치채고 눈을 떴을 때, 그녀 는 이미 시온의 앞에 도달해있었다.
시온의 이마에 총구가 겨눠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울어 엉망이 된 얼굴이었다.
"리트. 대체 왜?"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나를?"
왜 리트가 시온을 배신했는가.
그 질문에는 여러 가지 오류가 뒤 따랐다.
첫째, 리트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둘째, 나는 처음부터 그의 아군인
적이 없으니 이건 배신이 아니었으 며.
마지막으로 셋째.
"당신은 나한테 질문을 할 만한 위치가 아니에요. 지금은."
그런 질문은 상대의 이마에 총구 를 겨누고 있는 쪽에서 하는 거다.
약자는 질문할 권리도 없다.
내 말에 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었다. 막 방아쇠 를 당기려는 순간.
푸욱.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무시하고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는 데, 뒤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새빨간 머리카락이 흩날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