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내가 괜한 소릴 했어."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 같은데 묘 하게 어두워진 목소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벨제부브도 테토도 지구 편으로 기울었는데 에드문드만 이곳에 홀 로 남겨지게 생겼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품 안에서 얇은 반지를 하나 꺼냈다.
"이거 받아요."
"......반지?"
"나중에 중요한 역할을 할 테니까 요."
내 말에 에드문드가 어리둥절해하 면서도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한시도 빼지 마요. 때가 되면 뭔 지 알게 될 거예요."
"응? 어어. 알겠어."
테오도르가 건넸던 세 개의 반지 중 하나를 그에게 썼다.
예정했던 일은 아니지만, 에드문드 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는 마계에서 제일가는 마도공학 자였으니까.
슬슬 진짜로 떠나갈 때가 됐다.
"정식으로 마왕을 승계한 다음 찾 아가도록 하지."
"잘 가요, 무서운 인간님!"
벨제부브와 테토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저 반지가 뭔지 말해주면 안 돼?
궁금한데."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쳇, 그가 작게 혀를 찼다.
"알겠어. 잘 가라고."
나는 그렇게 마왕성을 빠져나왔다. 정말 비욘드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비욘드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해가 져 사방이 어두컴컴하게 변한 뒤였 다.
저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집 안 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있었다.
"올리 버."
행동대장이 밤새도록 계획을 수립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브리핑을 들은 이후로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 도 전략을 구상 중인 모양이다.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미리 말씀하셨으면 차라도 준비
했을 텐데요."
"차는 괜찮아요. 고생하는데 일을 더 늘릴 순 없죠."
내 말에 올리버가 멋쩍게 웃었다.
"아직 계획이 완성되지 않았나 요?"
"아뇨. 구상은 다 끝났습니다. 저 번에 들으셨던 것에서 약간 수정됐 어요."
그가 한참 들여다보던 지도 위에 널브러져 있던 깃발 모형들을 죄다 옆으로 치웠다.
"여기서 병사들 이목을 끄는 것까
지 똑같습니다."
탁, 탁.
성 외곽 지역에 빨간 깃발과 파란 깃발 모형들을 모아놓는다.
"그 다음 원래는 셀만 안에 침투 하기로 했는데…… 작전이 바뀌었 습니다."
" 왜죠?"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았어요."
그는 셀과 여러 번 타이밍을 맞추 려고 노력했지만, 셀이 열 수 있는 문이 좁고 개수에 한계가 있어서 즉각 제압하기가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작전을 바굽니다. 이 즉위 관 근처에 배치된 기사들을 정면으 로 돌파합니다."
"가능하겠어요?"
"가능해요. 즉위식이 거행되는 동 안 안과 밖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으니, 소동이 좀 일어도 못 알아 차릴 겁니다."
철저하게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즉위식이 이럴 땐 이렇게 독이 된 다.
"그리고요?"
"이 즉위관 밖을 우리가 점령하고, 안으로 셀이 몰래 들어가 상황을 살핍니다."
"그리고 황제가 가호를 밖으로 내 보내는 순간 문을 열고 들어가 황 족들을 사살한다…… 이거군요."
"맞습니다."
나쁘지 않다. 간단하면서 실패할 확률도 적으니까.
"즉위관 내부 배치도가 꽤나 자세 하네요. 확실한 정보 맞아요?"
"이사벨라 님 말로는 믿을 만한 정보책이 있다고 하더군요."
다니엘을 말하는 건가?
"이때 중요한 건 내부의 첩자입니 다."
올리버가 빨간 깃발 하나를 파란 깃발로 바꿔 끼운다.
"중요한 순간에 황족들을 빠르게 제거하는 데는 내부적인 도움이 필 수적이거든요."
다니엘이 떠올랐다. 그는 아마 황 제를 죽이려고 들겠지.
"포섭해놓은 자가 없습니까?"
"몇 명 포섭해뒀었는데 전부 즉위 관 안에 배치되진 못했습니다."
황제의 기사 중에서도 아주 출중 하고 충직한 이들이 그 안에 들어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다니엘도 그래서 황제의 기사 대 신 5황자의 기사로 노선을 갈아탄 거였지.
"이 안에서 도와줄 사람이 한 명 만 더 있으면 성공률이 크게 높아 질 텐데……
올리버가 아쉽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즉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이를 포섭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거다.
"가능성 있는 인물은 없어요?"
"거의 없습니다. 섣불리 접근했다 간 도리어 정보가 새어나갈 우려가 있으니 위험하기도 하고요."
그가 모형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이름을 불렀다.
"패트릭, 매튜, 데이몬, 콜린, 에 녹, 챔벨, 티모시..
"잠시만요."
익숙한 이름이 지나간 것 같은데.
"에녹이라면, 에녹 클라우드를 말 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황제의 하나뿐인 요정
기사죠."
"요정……이요?"
내가 알기로 그는 엘프인데.
"엘프를 요정이라 부르기도 하지 않습니까."
요정기사라니. 징그러운 별명이다.
나는 애써 그랬지, 하며 수긍하는 시늉을 했다.
"이 에녹을 포섭하면 어떻겠어 요?"
"가능성이 극히 낮습니다. 황제에 게 아주 충성스러운 인물이기도 하 고, 다른 엘프들의 반발을 사면서까
지 황제의 충견 노릇을 하고 있으 니. 무슨 방법으로 회유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올리버가 부정적인 말들을 늘어놓 았다. 그러나 나는 꽤나 자신이 있 었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누구보다 에 녹을 가장 잘 아는 건 나였다.
그는 나와 오랜 시간 맞서 싸워온 적장이지만, 동시에 한 하프엘프의 오라비이기도 했다.
"내가 에녹을 설득하죠. 떠오른 방 법이 있거든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당신
이 그렇게 말하니 좀 신뢰감이 있 네요."
올리버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 칭찬이죠?"
"물론입니다."
올리버는 깃발 모형을 두어 개 더 움직였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동선이 훨 씬 편해지겠어요."
슥, 스윽.
"우측을 보완하려고 빙 둘러서 움 직였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니 까, 바로 옆에 있던 이들이 우측을틀어막고 반대로……
정말 워커홀릭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모습이었다.
"올리 버."
" 네?"
"이사벨라가 뭐라 안 해요?"
내 말에 올리버가 움찔했다. 아마 이사벨라도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한 소리 했겠지.
"이사벨라한테 이르기 전에 얼른 들어가는 게 좋을 거예요."
"하지만……
"작전은 내가 에녹을 설득하고 와
서 짜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내 말에 올리버가 마지못해 고개 를 끄덕였다.
올리버가 다 자란 척해도, 그는 막 성년이 됐을 뿐인 청년이었다.
한창 자라나는 때인데 잠은 푹 자 야 하지 않겠는가.
올리버가 자꾸만 내 눈치를 힐끗 거리길래 생긋 웃어줬다.
그러자 내 살벌한 뜻을 읽었는지 후다닥 자리를 정돈하고 나간다.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가, 이내 눈을 감았다.
에녹 클라우드. 그를 설득하러 갈 시간이었다.
"안녕, 엘리사."
내가 작게 속삭이자 아이는 선물 을 받은 것처럼 얼굴이 확 밝아졌 다.
"요정님!"
"나 왔어. 잘 지냈지?"
"여기서 착하게 잘 지냈어요! 착하
게 굴면 요정님이 다시 찾아와줄 거라 생각했거든요!"
톨룩에 돌아온 이상 그녀를 한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다.
이렇게 불순한 목적으로 다시 찾 게 되니 양심이 좀 찔리긴 했지만 말이다.
"요정님 오면 들려드리려고 노래 도 열심히 연습했는데! 들어보실래 요?"
"고마워, 엘리사.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한번 들어볼까?"
내 말에 아이는 신나서 노래를 부 르기 시작했다.
작은 새장 속에 갇힌 카나리아처 럼 말이다.
엘리사의 노랠 듣다 보면 이전에 목이 찢어져 가면서까지 노래를 부 르던 모습이 떠올라 안쓰러운 마음 이 생겼다.
"헤헤. 요즘 정말 행복해요. 요정 님도 오고, 오빠도 자주 찾아오고 그래서요!"
"자주 찾아온다고?"
"네! 그리고 이상한 얘기도 해요. 이번 일만 끝나면 더 이상 여기에 갇혀있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황제가 에녹에게 뭔가 제안을 해 온 모양이지.
이유는 잘 몰라도 에녹이 엘리사 를 대가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 고 있는 것만은 명확했다.
다만 의문으로 남은 게, '왜 에녹 은 엘리사를 데리고 탈출할 수 있 는데도 이곳에 남아있는가.'이다.
에녹 정도의 실력이면 엘리사를 데리고 황궁을 빠져나올 정도는 됐 다.
평생 도망쳐 다니고 싶지 않아서? 뭐, 그런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아니……. 내가 황제라면 다른 수 를 썼을 거야.'
그래. 예를 들면, 그가 언제라도 마음먹으면 엘리사를 죽일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거다.
특정 약물에 중독되게 만든다거나, 매일매일 해독제가 필요한 독을 먹 인다거나.
아니면 마법을 이용해 버튼만 누 르면 엘리사를 죽일 수 있게 만든 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모든 게 설명된다.
단순히 여기서 도망치는 게 끝이
아닐 테니까.
"엘리사. 혹시 여기서 주는 밥을 하루 거르면 몸이 아프거나 하진 않아?"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해독제가 필요한 약물을 먹인 건 아니군.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해독제를 대신 만들어줄 수 는 없으니까.
"그럼 혹시 여기 들어오기 전 에…… 뭔가 이상한 일은 없었어?"
"이상한 일이요?"
"그래. 이상한 문양을 네 몸에 새
겼다거나 하는 거 말이야."
내 말에 엘리사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아! 하고 고개를 들 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이 귀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헜거든요."
엘리사가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인간치고는 길고, 엘프치고는 짧은 하프엘프의 귀였다.
"심한 날은 집에 불이 나기도 했 어요."
해맑게 이야기하지만 전혀 밝은 얘기는 아니었다.
집단적인 따돌림은 종종 군중심리 에 휘말려 걷잡을 수 없이 과격해 지기도 했다.
"그래서 오빠가 절 데리고 숲에서 나왔는데, 그 이후로는 늘 로브만 쓰고 다녔던 것 같아요."
인간들 틈에서 엘프인 걸 숨기고 자 그랬을 거다.
전에 스테이지형 게이트에서 본 적 있지 않은가. 엘프를 잡아다 노 예로 파는 악독한 놈들을.
"그러다가.. 갑자기 오빠가 높 은 분의 마음에 들었다고 했어요."
높은 분? 얼마나 높은 분이지?
"오빠가 기뻐했어요. 저도 그래서 기뻤죠. 그러다가…… 그러다가 어 느 날……
엘리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느 날 무서운 사람들이 저를 잡아갔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저한 테 막, 막…… 물도 뿌리고, 막 때 리면서…… 네가 한 짓 아니냐고 그랬어요."
"무슨 소리야? 네가 한 짓 아니냐 고 물으면서 폭행을 했다고?"
"저, 저도 잘 몰라요."
엘리사는 잔뜩 불안한 듯 몸을 움 츠렸다.
"뭐라고 하는지도 잘 몰랐어요. 그 냥, 그냥 다 맞다고 그랬어요. 너무 아프고 힘들었거든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옛날에나 있던 강압 수사가 딱 이 런 꼴이었던 것 같은데.
"그랬더니 이상한 곳에 이리저리 끌려 다녔고, 자꾸만 뭔가를 막 말 하라고 시켰어요. 저는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얘기했어요."
"괜찮아, 엘리사."
너무 불안해하길래 아이를 꼭 안 아줬다.
"그, 그리고…… 제가 아주 큰 잘 못을 저질렀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 형수가 된 거래요."
사형수? 의외의 단어에 나도 모르 게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