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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297화 (308/361)

297화

챕터: 새로운 관계

창틈으로 막 아침 햇살이 들어오 고 있었다. 빼곡하게 쌓인 서류 뭉 치들 사이로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벨제부브 님, 명하신 대로 무서운 인간님을 데려왔어요!"

"수고했다. 테토."

명령을 잘 수행한 게 기쁜지 테토 가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자 벨제부브도 고갤 들어 우 릴 바라봤다.

서류 처리 때문인지 얇은 테의 안 경을 쓰고 있었다.

"에드문드까지 부른 적은 없는데."

"에이. 내가 못 들을 얘기라도 하 게?"

"아니다. 너도 알아야 하는 내용이 니 상관없겠지."

안경 하나로 사람 인상이 이렇게 바뀌던가?

낯설어하고 있는 와중에 벨제부브 가 타이밍 좋게 안경을 벗었다.

"한서하.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 데는 네 공이 크다. 혹시 원하는 게 있나?"

"흠……

나는 잠시 고민했다. 당장 이번 혁 명을 도와달라 할 수도 있었지만, 마족이 끼어드는 순간 혁명 본연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았다.

그래선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하리라.

결국 나는 다음으로 미루는 선택

을 했다.

"일단 빚으로 달아둘게."

"그거 무섭군."

작게 농담을 던지기까지 한다.

벨제부브와 나의 관계는 여러모로 변해있었는데 특히나 나 자신의 변 화가 컸다.

그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다 듣 고, 에드문드와 베아트리스까지 알 아버린 탓이다.

'그동안 내가 벨제부브를 적대시한 건……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이 기도 했지.'

회귀 전 혜원 언니의 죽음에 가장 많이 일조한 자는…… 어찌 보면 나였다.

벨제부브를 찌른 뒤 제때 응급처 치만 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르니까.

그 죄책감에 분노의 화살을 더욱 그에게 돌렸던 거다.

'회귀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세계 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과거 의 잘못을 그에게 투영하고 있었 어.'

그런 사실을 자각하고 나서 그를 바라보니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회귀 전 벨 제부브와 지금의 벨제부브가 동일 인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제 내가 바로 보이나?"

" 뭐?"

"나와 겹쳐 보던 이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이젠 눈빛이 좀 누그러 졌군."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전과 같다면 거짓말이겠지."

결국 나도 솔직하게 인정했다.

"내가 모르던 모습들을 많이 알게 됐으니까."

그 말에 에드문드가 고개를 끄덕 끄덕하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어."

부러 차가운 어투로 뒷말을 이었 다. 어쭙잖은 호의는 서로에게 독이 될 뿐이다.

"우리가 적인 건 똑같으니까."

"냉정하군."

"사실이잖아."

그가 톨룩에 속해있고 내가 지구 에 속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 름이었고 말이다.

그러니 우정 놀음 같은 건 안 하 는 게 맞았다.

그걸 벨제부브도 알 텐데, 그는 평 소와 다르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적이 아니게 될 수 있다면?"

또 그 얘기였다.

그가 체력을 회복하던 때에, 에드 문드와 내가 나눈 이야길 훔쳐 듣 고 말을 꺼냈던 것과 같았다.

"허튼소리 하지 마. 그때도 결론은 똑같았잖아."

그가 연합군을 탈퇴한다 하더라도 변하는 게 뭐란 말인가.

이 침몰하는 배 위에서 멍하니 서 있기라도 하려고? 그저 죽음을 기 다리며?

어울리지도 않는 짓이다.

"여기가 톨룩이고, 오염이 진행되 고 있는 이상 타협의 여지는 없어."

"그래. 그게 문제였지. 그걸 뒤집 을 방도가 있다고 하면 어떻지?"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가 그렇게 일축하려 하자 벨제 부브가 탁상에서 서류 더미를 꺼내 들었다.

"여러 각도로 고려해서 찾은 각 성의 마왕 후보자들이다. 힘, 추종 자들의 규모 그리고 기질까지 모두 고려했지."

팔랑팔랑.

그리고 서류 더미를 넘겨 마지막 페이지를 보여준다.

그곳에는 한 마족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이 성의 다음 주인이 될 자다."

"이 성의?"

"그래. 이 성의."

이 성의 주인은 언제나 한 명뿐이 다.

3마왕 중 하나 말이다.

그 말인즉슨…….

"마왕을 그만두겠다고?"

내가 경악 어린 어조로 되묻자 벨 제부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못 할 게 뭐가 있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네 가 마왕을 그만둔다고 해서 근본적

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물론 이건 사전 단계에 불과하 지."

벨제부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 저벅 걸어 내 앞에 섰다.

아까부터 정말 영문 모를 짓만 한 다. 마왕을 그만두겠다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왕이 아닌 벨제부브라고?

그런데 그런 내 앞에 벨제부브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마치 충 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꿇어앉았 다.

놀랄 새도 없이 그가 충격적인 발 언을 했다.

"내 주인이 되어줘, 한서하."

이 당혹스러운 행태에 나는 잠시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충 무슨 의미 인지는 알 것 같았다.

"너…… 나와 종속 계약을 맺고, 지구로 넘어오려는 거야?"

"왜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지 구의 인간도 제 영혼을 바쳐 마족 과 주종관계를 맺으면 톨룩의 소속 이 된다.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

하지."

이론적으로는 그렇겠지!

단 한 번도 그런 사례는 본 적이 없다. 마족이 제 영혼을 인간에게 바치다니.

그것도 마왕이나 되는 거물이 말 이다.

"그래서. 대답은?"

그가 내 대답을 재촉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모르겠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영혼을 바치는 일인데 이렇게 쉽게 결정해

도 되는 거야?"

"쉽게 결정한 일이라니. 그럴 리 가. 충분히 고민해서 나온 결론이 다."

대체 어떤 사고를 거쳐야 마왕을 때려치우고 나와 주종관계를 맺겠 단 결론이 나온단 말인가.

"처음엔 단순히 재밌는 장난감이 라 생각했지. 그 다음엔 내 예상대 로 움직이지 않아 더 흥미로웠고."

그가 올곧게 날 응시하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 이후 센티피드를 공격하느라 협력했을 땐, 같은 편에 서도 나쁘

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그도 나도 숙련된 실력자들 이니 손발이 안 맞는 게 더 힘들 거다.

"네가 내 성에 침입했을 때 오히 려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내가 미친 줄 알았지."

"지금 내가 보기에도 그런데."

나도 모르게 툭 내뱉고 말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궁지에 몰려 간 곳에 네가 있을 줄은 나 역시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나도 네가 거기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라고 말하려는 걸 애써 삼 켜냈다.

"난 이미 몇 번이고 네 피를 흡수 했다. 몇 번의 전투 과정에서도 그 랬고, 내 몸을 회복할 때도 그랬 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많이 물어뜯긴 것 같기도 하다.

마력초를 구할 때도 내 피를 내줬 고.

이번엔 아예 며칠씩 아침저녁으로 피를 제공하기까지 했으니까.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아버렸어. 더 이상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한 대상에게서 너무 많은 피를 공 급받아 이렇게 된 건가?

그러니까 벨제부브의 머리가 아니 라 몸이, 정확히 말하면 그의 혈액 이 이미 내 주도권 하에 놓였다는 의미 같았다.

"난 이미 네게 종속되어있다."

잘은 몰라도 벨제부브의 가장 근 본은 박쥐, 그러니까 피를 먹는 행 위 그 자체 같았다.

그 피의 대부분이 내 것으로 바뀌 면서 벨제부브 역시 내게 속하게 됐다고 보는 게 맞겠지.

원치 않았던 흐름이다.

"마지막으로 묻지. 대답은?"

누가 보면 그가 주인인 줄 알 거 다. 내게 복속하겠다는 선언을 한 주제에 지나치게 당당하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좋은 기 회긴 해.'

마왕이나 되는 벨제부브가 지구의 편에 속하게 되는 거니까.

얼마나 큰 전력이란 말인가.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이건 내게 일말의 손해도 없는 장사다.

그런데도 거부감이 치솟는 건, 여

전히 내가 그를 마왕 벨제부브로 생각하기 때문인 걸까.

나는 한참 침묵을 고수하다가, 끝 내 대답했다.

"……좋아."

그러자 그가 내 손등에 가볍게 입 술을 맞댔다.

그가 '이미 네게 종속되었다'고 말 한 게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 흔한 피 교환도 없었다.

그것만으로 그의 영혼은 내게 종 속되었고, 그의 손등에 흐릿하게 문 양이 새겨졌다 사라졌다.

"이걸로 드디어 한 팀이 됐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네."

그 벨제부브와 내가 한 팀이 라……. 심지어 내가 그의 주인이라 니.

다시 생각해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그때 뒤 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너……

잊고 있던 에드문드가 덜덜 떨리 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구인이었어?!"

아차. 에드문드는 아무것도 몰랐 지.

그는 그냥 날 좀 특이한 인간 정 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구에서 왔 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이렇게 밝히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일단 지구에서 왔어."

"지구인이 어떻게 톨룩에……? 아 니, 그것보다도! 그럼 벨제부브 넌 지금 지구인하고 종속 계약을 맺은 거야?!"

"그렇다만."

"게다가 마왕도 그만둘 거고?"

그 말에 벨제부브가 고개를 끄덕 였다.

에드문드는 이 무슨 날벼락이냐는 듯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들이 너무 순식간에 쏟아진 탓이었다.

"……아니…… 지구인에…… 마왕 사직에…… 종속 계약? 지구인한 테……? 그럼 마계는…… 아니, 톨 룩은……?"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는지 띄엄띄 엄 중얼거리는 게 좀 무서울 지경 이다.

그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려는데, 불 쑥 다른 이가 튀어나와 벨제부브에 게 폭 안겼다.

"벨제부브 니이임I"

눈물콧물 쏙 빼고 있는 테토였다. 맞다. 이 녀석도 있었지.

"절 버리고 가시는 거예요? 그치 만, 저는 이제 막 벨제부브 님 전 담 하수인이 됐는데……!"

그게 문제인가?

테토도 지구니 뭐니 하는 얘길 다 들었을 텐데. 저걸 먼저 신경 쓰는 게 테토답다고 해야 하나.

"내 뒤를 이을 이에게 잘 말해둘 테니 걱정 말거라. 섭섭하지 않게 대우하라고 일러두겠다."

"그, 그치만…… 으으으……

테토는 잔뜩 울상인 채로 벨제부 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 다.

엉엉 울면서 이렇게 외치는 거다.

"저도 데려가세요, 벨제부브 님! 저도 벨제부브 님과 종속 계약을 맺고 싶어요!"

"그건 상관없지만, 난 더 이상 마 왕도 아니고 누군가의 주인도 아닐

텐데. 괜찮겠느냐?"

"상관없어요! 저는 영원히 벨제부 브 님 전담 하수인으로 살고 싶어 요!"

그 강한 의지에 결국 벨제부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원한다니 아무래도 좋지만, 내가 벨제부브의 주인이고 벨제부 브는 테토의 주인이니…….

'그럼 테토도 내 것이 되는 건가? 흐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핼쑥 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에드문드도 벌떡 일어나더니 크게 소리쳤다.

"나, 나도!"

그가 날 향해 손을 내민다.

"나도 너와 종속 계약을 맺고 톨 룩을 탈출하겠어!"

아니, 에드문드까지?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그가 횡 설수설 제 얘길 꺼냈다.

"난 원래 이 마계에서 추방당한 몸이라 그다지 미련도 없고! 이 자 식까지 지구로 넘어가 버리면 나 혼자 톨룩에 남아서 뭐 하겠어. 아 는 얼굴 둘이라도 있는 곳이 더 낫 지.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마력 통로가 훼손된 상태인데 종 속 계약이 가능하겠어요?"

그 말에 에드문드의 안색이 급격 히 어두워졌다.

"아..

그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평소 에는 그도 마력 통로를 쓸 일이 없 으니 말이다.

"그렇네. 마력 통로가 없으면 종속 계약도 불가능하니까."

그가 씁쓸하다는 듯한 어조로 애

써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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