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내가 염치없다는 건 안다."
"알면 개소리 말고 냉수나 한잔 시~원하게 말아먹고 돌아가셔."
에드문드는 얼굴에 감고 있던 붕 대를 손으로 풀어냈다.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까지 벗자 그 얼굴이 훤히 보였다.
끝이 도려내진 귀는 마치 인간의 것처럼 보였다.
암회색빛 피부에 회색 눈동자. 은 색 머리카락은 마치 그가 서 있는 곳만 다른 세상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홀로 흑백인 세상에서 사는 사람 같았다.
다크 엘프라 해도 엘프는 엘프인 지 얼굴은 뛰어난 미형이었다.
"네가 도려낸 귀짝이 아직도 난 아프걸 랑."
"정당한 재판 결과였다."
"야! 네 생각엔 그게 정당한 재판 같았냐?"
에드문드는 거의 벨제부브의 멱살 을 잡을 기세였다.
"개 같은 약육강식. 이 힘에 미쳐 버린 놈들아! 그게 재판이었냐고, 그냥 개싸움이지!"
"마족 전통 재판 아닌가? 결투 재 판. 마신께선 늘 강한 자가 옳다고 하셨으니,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진 실이고 패배한 자가 거짓인 게 당 연하지 않나."
뭐? 결투 재판?
그런 어처구니없는 제도가 다 있 어.
벨제부브의 말을 들어보면 어디 그런 구시대적인 재판이 다 있나 싶은데, 정작 말을 꺼내는 이는 뭐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태도다.
"아악! 진짜 이래서 내가 마족 놈 들이 싫다니까! 넌 내가 잘 못 싸 우는 거 알면서, 어? 꼭 그래야만 했냐고!"
에드문드가 제 머리를 쥐어뜯는다.
어쩐지 그의 심정이 좀 이해가고 있었다.
마계에선 아무래도 저 방식이 보 편적인 방법인 것 같다.
그야말로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눈 박이인 심정이었겠지.
주변이 죄다 비정상이면 정상이 사람만 이상하게 보일 뿐인 거다.
"그러게 내가 평소 단련에 힘쓰라 고 말하지 않았던가."
"됐다, 됐어! 말이 안 통하네!"
에드문드는 씩씩대면서 문을 가리 켰다.
"당장 나가! 뭔 부탁인진 몰라도, 난 들어줄 생각 없으니까."
그 불호령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 나 겨우 그를 만류했다.
"잠깐 진정하시죠."
"넌 또 뭐야? 마족은 아닌 것 같 은데. 인간? 너 정말 인간이야?"
"네. 사람 맞습니다."
"왜 이 녀석이 인간이랑 같이.......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보 쇼, 댁이 누군진 모르겠고, 이 녀석 이랑 같이 얼른 나가지 않으면 ....
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말이 안
통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노이트를 꺼내 그의 관자놀이에 겨누자 순식간에 에드문드가 조용 해졌다.
"진정해주시죠."
"이 미친 여자야! 너, 너 인간이라 며! 인간이라며!"
철컥.
노이트를 장전했다.
"진정하고 저희 얘기 좀 들어주시 죠."
에드문드가 황망한 얼굴로 노이트 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음,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 상태가 됐군.
" 앉아주세요."
내 말에 에드문드가 천천히 의자 에 앉았다.
얼굴은 완전 하얗게 질린 채로, 손 은 항복하는 것처럼 위로 들고 있 었다.
"에드문드 씨. 마왕성의 비밀 통로 를 다시 열어주실 수 있습니까?"
"……일단 총부터 좀 치워."
한결 차분해진 기색이 역력했기에 나는 그의 말대로 노이트를 치워줬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마 족 아냐? 아니면 마녀?"
"그냥 인간입니다."
"야, 진짜야?"
에드문드가 벨제부브에게 되묻자, 그가 확인차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자 하하, 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내가 이 촌구석에 있는 사이 인 간들도 갈 데까지 갔구만. 망했네, 망했어."
벨제부브는 뭔가 할 말이 많은 얼
굴이었지만 입 밖으로 뭔가 내뱉진 않았다.
"에드문드 씨. 비밀 통로를 열 수 있습니까?"
"거, 뭐냐. 내가 한 300년 전에 잠 갔던 그거?"
" 맞다."
"아니, 거길 왜 열려는 건데? 있어 봐야 역습당하기 딱 좋은……. 야. 잠깐만."
에드문드도 말을 잇다가 뭔가 깨 달은 모양이다.
벨제부브가 왜 이런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최측근 마족들 은 다 어디 가고 내가 붙어있는지. 갑자기 비밀 통로를 열어달라고 하 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조합하면 한 가지 결 론뿐이다.
"너…… 뒤통수 맞았냐?"
"기습을 당했다고 해두지."
"야! 그럼 성도 지금 뺏겼어?"
벨제부브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그 비밀 통로를 열어서 성을 다 시 돌려받겠다? 왜 그런 치졸한 짓
을 하냐? 마족답게, 어? 성도 그냥 이긴 놈한테 넘겨줘야지."
"내가 성을 넘기면 세 마왕성이 통합된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지, 에 드문드는 놀란 눈을 했다.
"설마…… 마신? 마신 드록?"
"그래."
"그 미친 작자를 다시 깨우겠다 고?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나도 동의하는 바다."
생각보다 반응이 격하다.
이들은 마신을 숭배하는 거 아니
었나?
그러고 보니 마신이 깨어나면 인 간인 내겐 악재지만 마족인 이들에 겐 호재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왜 베아트리스를 막으려 할까?
'벨제부브야 자기 성이 달렸으니 그럴 수 있지만…… 에드문드는 왜 이렇게 경악하는 거지?'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그 자식 세상이 맘에 안 든다고 다 죽여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하겠다고 해서 봉인당한 거잖아. 근 데 다시 깨운다고?"
경악할 만했군.
단순히 선신과 악신이 싸웠다, 정 도로만 알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있 을 줄이야.
세상을 전부 청소하고 아예 처음 부터 다시 짓겠다니.
그럼 마족이고 인간이고 할 것 없 이 죄다 죽이겠단 말 아닌가.
"나까지 성을 빼앗기면 그럴 수도 있다."
"마계 꼴 잘 돌아간다, 아주."
에드문드의 비꼬는 말에도 할 말 이 없는지 벨제부브는 침묵했다.
"비밀통로라……. 그때 혹시 몰라 서 다시 열 수 있게 설계하긴 했었 는데."
에드문드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바닥을 툭툭, 툭툭 발로 찬 다.
그러다 한 지점에 멈춰 서서 정해 진 대로 스텝을 밟자, 우드득 소리 가 났다.
우득, 쿠구구구……
바닥이 절로 솟아나더니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생겨났다.
세상에.
"따라와. 내 작업실에 아마 그때 설계도가 있을 거야."
내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벨제부브가 태연하게 설명을 덧붙 였다.
"에드문드는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마도공학자다. 마왕성에 설치된 여 러 마법 장치들은 대부분 에드문드 의 작품이지."
"그런 뛰어난 기술자를 왜 내쫓은 거야?"
"여러 가지 일들이 얽혀있었다. 나
라고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야."
에드문드가 서둘러 들어오라고 재 촉하는 외침이 들렸다.
우리는 천천히 에드문드의 비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여기에 뒀던가? 아닌가. 여 긴가?"
그 안은 마치 공학자의 집처럼 보 였다.
차준의 연금술사 공방과는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벽을 따라 붙어있는 여러 파이프 관, 정체를 알 수 없는 갖가지 기계들과 마구 널브러져 있는 공구들 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허름하지만 이 밑은 무엇보다 견고 해 보였다.
에드문드가 중요시하는 게 어느 쪽인지 명확하게 보였다.
"오! 여깄었어!"
에드문드가 낡은 양피지 같은 것 을 꺼내왔다.
촤르륵 펼치자 복잡한 설계 도면 이 보였는데, 이게 바로 비밀통로 입구를 막고 있다고 했다.
"접근하는 자는 무참히 공격하도 록 설계가 되어 있지. 공격은 최고 의 방어니까."
그건 평범한 방벽이 아니었다.
거대한 골렘이었다.
한눈에 봐도 상대하기 골치 아플 것 같은 거대 골렘 말이다.
"……이걸 뚫어야 한다는 말이 죠'?"
"뭐,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설계 자들은 언제나 뒷문을 만들어두는 법이지."
에드문드가 설계 도면을 뒤집자
다른 도면이 보였다.
"공식 설계도에는 포함되지 않은 부분이다. 혹시나 고장 나서 수리가 필요할 때 나도 접근 못하면 곤란 하거든."
그렇다는 건 싸우지 않아도 된단 말이렷다?
얼굴에 화색이 돌자, 에드문드가 멋쩍게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근데 내가 손댄 곳이 여기뿐인 게 아니라서."
"다른 곳은 또 어딜 손댔지?"
"그 비밀 통로 주요 기능 중 하나
는 그거걸랑. 적진의 수장을 고립시 킨 채로 지하로 끌고 내려오는 거."
에드문드가 옆에 있던 다른 설계 도를 꺼냈다.
"그 기계를 작동시키려면 내가 만 들어둔 수호자랑 싸워서 시간을 끌 어야 해."
뭔 골렘을 이렇게 잘 만들었담.
'수호자'라고 불린 골렘도 만만치 않게 대단해 보였다. 크기는 좀 작 지만 그만큼 재빠르고 날카로운 공 격이 가능할 것이다.
"이 골렘을 멈출 방법은 없나?"
" 없어."
하필이면.
"왜냐하면 이 녀석을 멈출 때 필 요한 '리모컨'이 있었는데…… 쫓겨 오면서 그걸 잃어버렸거든!"
해맑게 웃는 얼굴에 정말 주먹을 한 대 치고 싶었다.
"그럼 이 작전에는 최소 세 명이 필요하겠네요. 우선 에드문드 씨가 문지기 골렘에 접근해서 10분 동안 멈춰야 하고, 그 틈을 타 둘이 들 어가서 내가 수호자 골렘을 상대하 고, 벨제부브가 베아트리스를 상대 한다. 이러면 되겠죠?"
"……베아트리스?"
에드문드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잠깐만. 지금 마신을 되살리려는 미친 계획을 가진 게 베아트리스란 말이야?"
아는 사이인 건가? 반응이 꽤 격 했다.
에드문드가 벨제부브를 빤히 바라 봤다. 그는 애써 모르는 체하고 있 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지."
벨제부브가 그렇게 말했지만 에드
문드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대체 왜 그 애가……. 벨제부브. 넌 뭔가 알고 있지."
"에드문드. 네가 떠나고 시간이 많 이 흘렀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하잖아! 내가 아는 베아트리스 는…… 마족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진했던 앤데……
그 베아트리스가?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내가 아는 베아트리스는 늘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람을 갖 고놀기 좋아하는 녀석인데.
-있지. 난 우리 도련님이 그렇게 도련님 모습인 게 너어~무 좋아!
-옛날 생각이 나잖아! 그래서 말 인데, 도련님 옛날처럼 차려입고 영 상석 좀 찍어주면 안 돼?
그러고 보니 마력초를 거래할 때 베아트리스가 이런 얘길 했었지.
그땐 대충 넘겨들었는데 '옛날 생 각'이 난다니.
벨제부브가 베아트리스와 과거에 알던 사이였단 얘기 같았다.
" 베아트리스는……
벨제부브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뒷말을 흐렸지만, 에드문드가 여러 번 재촉했다.
"말해! 내가 없는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벨제부브는 결국 마지못해 털어놨 다.
"베아트리스는 죽었다."
".…"뭐?"
"네가 아는 베아트리스는, 이미 죽
었어."
모호한 대꾸였다.
"지금은 그 애의 기억과 껍데기를 뒤집어쓴 녀석만 남아있을 뿐이지."
벨제부브는 에드문드의 손을 탁, 차갑게 쳐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