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챕터: 무엇이 그들을 산산조각 냈는가
벨제부브를 겉옷으로 감싸 들고 돌아가니, 이사벨라가 바닥에 누운 셀을 수습하고 있었다.
셀은 완전히 취해서 정신도 제대 로 못 차리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 내 힘으론 못 옮겨 서 그러는데 좀 도와줘."
이사벨라의 말에 나는 한 손으로 셀의 옷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숨이 막히는지 셀이 캑, 캑 하고 소리를 냈다.
"그건 뭐야?"
"박쥐."
내 말에 이사벨라가 이상한 표정 을 했다.
갑자기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박쥐 를 데리고 온 게 이해가 잘 안 되 는 것 같았다.
나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잘 이해가 안 간다.
"이 안에서 주웠어. 다친 것 같길 래."
"고양이 줍는 건 봤어도 박쥐 주 워오는 건 또 처음 보네."
"나도 불사조 주워본 적은 있어도 박쥐는 처음 주워."
내 말에 이사벨라의 표정이 더더 욱 이상해졌다.
"농담이지?"
"응."
"네가 하면 농담이 아니라 진담
같단 말이야."
불사조가 아니라 아타노르지만, 연 금술사도 아닌 내가 어떻게 아타노 르와 계약했냐고 물어보면 이야기 가 복잡해지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엄밀히 따지면 주운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금자리를 부수고 강제로 꺼 낸 거니까.
'……시험이었잖아. 나도 죽을 뻔 했고.'
그래. 그렇게 합리화하자.
"셀은 내가 방에 데려다 놓을게."
"나도 같이 갈까?"
"아니. 모처럼 다들 즐기고 있는 데. 네가 빠지면 되겠어?"
한 손엔 벨제부브, 한 손에 셀을 들자 셀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이사벨라는 좀 부탁한다고 말하더 니, 이내 그녀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스으윽. 슥.
셀이 중간중간 캑캑거리긴 했지만 무사히 셀의 방 앞에 도착할 수 있 었다.
풀썩.
"휴우."
마침 잘됐다.
내 방은 손님방이라 마땅한 생필 품이 구비되어 있을 것 같진 않았 다.
셀의 방에서 구급상자라도 가져가 야겠다.
'성수를 쓰면 진짜 죽을지도 모르 니까.'
약초를 짓이겨 만든 연고 정도가 내가 아는 최선이었다.
'여기도 마력석에 둘러싸인 곳이니 금방 회복하겠지.'
덜컹.
"찾았다."
* * *
구급상자를 발견한 다음 곧장 내 방으로 돌아왔다.
겉옷에 감싸뒀던 벨제부브를 탁상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폈다.
날개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 고, 마력 통로가 상했는지 흐름도 이상했다.
'외상 자체가 심한 건 아니야.'
눈에 보이는 외상은 타박상으로 피가 좀 나는 것뿐이니까. 아마 더 심각한 건 내상일 거다.
'내상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벨제부브가 선택했던 방법대로 시 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회복하 는 게 최선이다.
나는 일단 외상 부위를 깨끗하게 소독하고 연고를 발랐다.
마지막으로 혹여나 도망가지 못하 도록 꽁꽁 묶어둔 다음 그제야 한 숨을 돌렸다.
"얼른 깨어나."
물어볼 게 많았다.
베아트리스가 마계를 통일하면 어 떻게 되는지 말이다.
과연 그게 내 계획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벨제부브가 이렇게 초라한 모 습으로 나타날 줄이야.
만약 그를 죽이려면 지금이 유일 한 기회일 것이다.
나는 잠시 기절해있는 벨제부브를 내려다보며 손에 노이트를 쥐었다 가, 이내 내려놓았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물어볼 것 들을 다 물어본 다음에 죽여도 늦 지 않겠지.
번쩍 눈을 뜬 것은 이상한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깜깜한 방 안에,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철컥.
공간 간섭으로 놈의 뒤를 점하고 총을 겨눈다.
"누구야."
놈이 뻣뻣하게 굳자, 내가 스산하 게 읊조렸다.
잠에서 막 깨어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자꾸 쇳소리가 섞였다.
"누가 보냈지? 날 노린 건가? 나 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히 이익!"
총구를 머리에 가져다 대자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여기까지 침입한 걸 보면 실력이 나쁜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아마추 어 같은 반응이지?
"사, 살려주세요……
울어?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꽤나 앳되다. 대체 뭐지?
"살려주세요……
"넌 누구냐."
"저, 저는! 베, 벨제부브 님의 저 택을 관리하던 하수인 중 하나입니 다! 이름은, '테토'라고 하고, 또……
"벨제부브의?"
"넵! 맞습니다!"
나는 총구를 그대로 겨눈 채로 나 머지 한 손으로 전등을 켰다.
이제야 제대로 얼굴이 보인다.
테토는 마치 촛불을 의인화한 것 처럼 생겼다. 머리카락은 촛농을 표 현한 것처럼 위는 흰색이면서 아래 는 보라색이었다.
눈의 흰자위는 검은색인데 눈동자 는 노란색으로 빛이 났다.
아직 앳된 얼굴이었는데, 사람을 닮았으면서도 사람이 아닌 것 같았 다. 그야말로 이종족이었다.
"마족이군."
"그, 그게에 원래 한낱 마물에 불 과했던 절 마족으로 만들어주신 게 벨제부브 님이십니다. 그래서 제 힘 은 보잘것없지만! 벨제부브 님께 꼭 전해야 하는 전언이 있어서 ……! 人}, 살려주세요. 죽더라도 이 말은 전하고 가야 한단 말이에요!"
테토는 말을 하다가 다시 울컥했 는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 다.
아니. 눈물이 아니라 촛농인가?
"그렇다고 하는데. 벨제부브."
내 말에 아까부터 깨어있던 게 분 명한 벨제부브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마력석들로부터 기운을 받은 덕인 지 어제보단 한결 나아 보였다.
-내 하수인이 맞다. 해치지 않을 테니 풀어주거라.
마력이 좀 회복됐는지 텔레파시로 말을 건네온다.
"나한테 명령조로 말하지 마."
지금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가? 아직도 자기가 마왕인 줄 아나 보 지.
-너도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을 텐 데.
그 말에 결국 나는 테토에게 겨눈 총을 거뒀다.
"휴우!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물 론 벨제부브 님께 카뤼센 님의 말 씀을 전하기 전까지 죽어도 죽을 수 없죠! 죽어서 언데드가 되는 한 이 있더라도 다시 살아나서……!"
-테토. 카뤼센은 살아 있나?
"앗, 네! 살아계십니다! 하지만 베 아트리스 님의 추격을 받고 있어서 저를 대신 보내셨어요."
카뤼센이 누군진 몰라도 벨제부브 의 수족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카뤼센 님께서, 시간을 최대한 끌 테니 그동안 몸을 회복하셔야 한다 고 했어요."
-죽을 작정이군.
"상황이 좋지 않아요. 베아트리스 님께서 카뤼센 님을 잡아 벨제부브 님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게 분명해 요!"
그 카뤼센이란 작자가 꽤나 충성 심 깊은 자인 것 같다.
벨제부브가 몸을 회복할 시간을 벌려고 제 목숨을 바쳤다는 건가.
"저는 그림자를 타고 이동할 줄
아니까, 제가 가장 빨라서 전언을 맡기셨어요! 카뤼센 님께서 주종 관계를 끊어달라고 청하셨습니다."
-..그럴 수 없다.
"카뤼센 님의 강한 의지였어요! 베 아트리스 님은 정신계 공격 특화니 까, 카뤼센 님께서 벨제부브 님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도 금방 들켜 버리고 말 거예요!"
-주종 관계를 끊으면 내 위치를 감출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공 급해주던 마력이 없으면 카뤼센은 고작해야 하위 마족 수준밖에 미치 지 않는다.
흐음. 그 주종관계란 걸 통해서 카 뤼센이 벨제부브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건가.
얘기를 듣다 보니 대충 상황 굴러 가는 게 보였다.
"벨제부브 님께선 일단 목숨을 보 전하시는 게 중요해요! 이미 내정 해뒀던 후계자들은 죄다 목이 썰렸 어요! 이대로 벨제부브 님마저 잡 히면 그대로 베아트리스 님께서 세 왕좌를 모두 손에 넣으실 거예요!"
벨제부브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처럼 보이더니 이내 알겠다며 고개 를 끄덕였다.
-테토. 카뤼센에게 가서 전해라.
적장에게 패배하고 도망친 이는 제 수하들을 지킬 힘조차 없는 법 이지.
-그 희생을 잊지 않겠다고.
"네! 걱정 마세요! 이 테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전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 피면서 다 들리게 속삭이는 것이다.
"그, 그런데 저 무서운 인간을 대 체 누구인가요, 벨제부브 님? 어지 간한 마족보다 훨씬 강한 게 느껴 집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옙! 그럼요! 그게 명령이시라면, 따라야죠!"
그러더니 살금살금 걸어가 벨제부 브의 그림자로 쏙 숨어 들어간다.
그러자 방 안에 처음부터 벨제부 브와 나 단둘만 있었던 것처럼 텅 비었다.
"..그럼 우리도 마저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벨제부브의 머리에 총구를 가져다 댔다.
"허튼 짓거리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본 대로다.
벨제부브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베아트리스가 이그니스의 마왕성 까지 차지하고 내 구역까지 침범했 다. 나는 패배했고, 이렇게 도망쳤 지.
미안하지만 난 그가 별로 불쌍하 지 않았다.
그가 회귀 전 나와 혜원 언니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당장 이대로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 으니까.
"베아트리스가 세 개의 마왕성을 모두 차지하면 어떻게 되는데?"
-한서하. 너는 톨룩의 건국 신화 를 아느냐.
" 대충은."
여느 신화들과 같은 이야기였다.
태초에 선과 악을 대변하는 2명의 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에게 각기 시기, 질투 나 희망, 사랑을 가르쳤다.
둘은 서로의 방식에 불만을 갖고 충돌했고, 인간은 유일하게 '신을 해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존재였기에 선한 신과 협력해 악신 을 봉인했다.
이때 둘이 다투면서 '신의 조각'이 세계 곳곳에 뿌려지게 됐다고 한다.
이후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선한 신도마저 봉인했고 그들이 이 땅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뭐, 그 런 전래동화 같은 얘기다.
-그 신화는 물론 각색됐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실제로 이 땅에는 신들의 유적이 남아있지.
"그리고?"
-악신 '드록'은 우리가 숭배하는 마신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갑자기 건국 신화 얘기라니. 아까 부터 영 불안했다.
- 마신을 봉인한 태초의 인간 영 웅, '록산드'는 그 열쇠를 세 갈래 로 나눠 가장 강한 열쇠지기들에게 지키게 했다고 하지.
"설마..
- 그래. 우리 마족들은 그 열쇠지 기의 후손들이다. '마왕'이 아니라 사실은 '열쇠지기'였던 거지.
"그럼 베아트리스가 세 왕좌를 모 두 차지하게 된다면 설마……
- 마신을 깨울 생각인 거다.
미친 건가, 베아트리스!
내가 입을 쩍 벌리자 벨제부브가 안심하라는 듯 뒷말을 이었다.
- 아직은 아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마지막 열쇠를 손에 넣을 순 없 을 테니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여기가 다른 세계긴 하지만, '신을 깨운다'는 터무니없는 얘기가 현실 로 다가오니 꽤나 충격이 컸다.
게다가 그 정도로 큰 변수라니.
그 신이 어디까지 전지전능할지, 지구와의 전쟁에 끼어들 순 있는지등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보니 벌써 부터 머리가 아팠다.
'그 마신이 전쟁에 개입하면? 마왕 단위도 지금 감당 못 하는데, 마신 이 등장하면 죄다 몰살이야!'
-너도 마신을 깨우고 싶진 않겠 지. 안 그래?
벨제부브가 톡, 박쥐 날개로 노이 트의 총구를 밀어낸다.
-그러니 이 총 치우지. 이제 우린 같은 배를 탄 것 같은데.
아드득, 이가 갈리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