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타닥타닥, 불꽃 튀는 소리가 음악 처럼 울렸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슬픔을 잊고 떠드는데, 셀과 나만 구석에서 그 분위기를 피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이전 의 날 알잖아."
지금의 그는 마법도 자유자재로 쓰지만 원래는 그림 그리는 걸 좋 아하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내가 주체하지 못한 힘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도……
-기다리고 있었어! 안에 있는 그 림은 네가 그린 거지?
피범벅을 한 채 환하게 웃던 스페 이드가 떠올랐다.
붉은색으로 그린 그림이 사람을 홀렸고 셀은 그 앞에서 벌벌 떨고있었지.
"스페이드가 그렇게 변한 걸 봤을 때, 난…… 웃기게 그때도 살아날 방법부터 생각나더라."
씁쓸한 어조였다. 나 역시 그가 하 려던 말이 뭔지 알았다.
-차라리 네가…… 죽
"스페이드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 어달라고 말하려고 했어."
아마 내뱉기만 했으면 그 미치광 이는 선뜻 그 부탁을 들어줬을 거다.
"그 직전에 네가 끼어들었고, 내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었지."
셀은 스페이드의 끝을 모른다.
그는 스페이드를 묶어 두기만 했 고, 목숨을 잃은 다른 동료를 추모 하느라 바빴으니까. 그리고 내가 비 욘드로 가라 말하자 곧장 떠났다.
뒤처리는 내가 했다.
그대로 뒀다간 다른 이들에게 피 해를 입히며 날뛰었을 테니까.
그러면 제국에서도 이름 모를 한 마법사의 등장 소식을 알았겠지.
"그렇게 비욘드로 왔어. 내가 여기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가 붉게 상기된 얼굴을 했다.
"저마다 떠들더라고! 귀족에게 보 금자리를 빼앗겼다, 가족이 무참하 게 죽었다, 신분 때문에 차별을 받 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 다……."
비욘드에 저마다의 사연들로 흘러 들어온 이들이 하는 말이었을 거다.
"그래. '인간다운 삶'. 다들 그걸 위해 싸운다고 했어. 가족, 사랑, 도덕, 평등…… 그런 가치들 있잖 아."
셀이 가볍게 손장난을 쳤다.
그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손바닥 위에서 마력이 넘실거렸다.
마력은 집 모양으로 변했다가, 사 랑을 가리켰다가, 저울의 모습을 하 기도 했다.
" 너는?"
나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뭘 위해 싸우는데?"
그가 말한 가치들은 모두 다른 이 들이 내세운 것 아닌가.
무엇이 셀을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셀은 손장난을 멈췄다.
"나는 고아야. 너도 알겠지만."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래서 내겐 가족이 없지."
나는 고개를 돌려 셀을 바라봤다.
"나는 뒷골목에서 나고 자랐어. 내 겐 처음부터 사랑도, 도덕심도 그리 고 평등도 주어지지 않았지."
우습게도 비욘드에서 외치던 가치 들은 모두 셀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들은 가족을 빼앗겼다고, 사랑을 잃었다고, 도덕을 짓밟혔다고 울며비욘드를 찾는데.
셀은 그것들을 한번 가진 적도 없 었단 이야기다.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다.
"그것들을 내가 국가에게 빼앗겼 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네. 애초부 터 나는 그런 걸 받은 적이 없으니 까."
가진 적도 없는 걸 잃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셀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그것들을 박탈당했다는 걸 절절히 실감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가치 들을 잃어 절규하는 이들을 보며 자신의 상실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많 은 것을 잃어왔다고.
"하지만…… 그런 나를 위해서 밤 낮없이 고생하는 누님이 있잖아."
셀의 시선이 이사벨라에게 향했다.
이사벨라는 모처럼 귀찮은 드레스 며 장신구들을 벗어던지고 수수한 차림으로 비욘드 주민들과 함께 어 울리고 있었다.
그것이 본래의 자리인 양 자연스
럽고 편안해 보였다.
"나는 빼앗긴 줄도 몰랐던 것들을 빼앗겼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는 걸."
셀과 이사벨라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나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게 셀에게 큰 인상을 남긴 것 같 았다.
"나는 그분을 위해 싸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셀이 유일 하게 가져본 것이 이사벨라였겠지.
그것인 사랑의 마음은 아닐 거다.
아마 숭배에 가까운 존경. 또는 무
한한 존중에 가까울 것이다.
"자. 됐지?"
셀이 툭, 내 어깨를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려는 걸 겨 우 참았다.
"너도 말해줘, 이제……
"말해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 치사해."
벌써 말끝이 흐릿하다. 혀가 풀리 는지 발음이 꼬이고 있었다.
"너무해애애내 얘긴 다 들어놓 구, 자기 얘기는 쏙 빼고!"
"네가 혼자 얘기한 거잖아."
미안하지만 셀한테 지구에서 왔다 고 털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혁명이 코앞인데 괜한 분란을 일 으키고 싶지도 않았고.
"매정하다, 한서하!"
그런데 셀이 분위기에 취했는지 돌연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비욘드 사람들! 내 말 좀 들어보 세요! 글쎄 한서하가……!"
탁!
풀썩.
셀이 귀찮은 짓을 벌일 것 같은 낌새가 보이길래 서둘러 뒷목을 내 려 쳤다.
무방비 상태였던 셀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휴."
"잘했네! 녀석, 어디서 고성방가 야!''
옆에 있던 이름 모를 어르신이 내 게 칭찬을 늘어놓는다. 나는 어색하 게 웃었다.
셀을 부축해서 옮겨놓을 생각으로 그의 한쪽 팔을 집어 들었다.
그때, 예민한 기감에 무언가 잡혔 다.
나는 멈춰 서서 저 안쪽을 바라봤 다.
사람들이 모두 정신이 팔린 사이 에, 이 깊숙한 동굴 안에서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툭.
"으붑!"
셀을 내려놓고 서서히 안쪽으로 다가갔다.
노이트를 쥔 채로, 몸에 바짝 긴장 감이 돈다.
'누구지?'
혹시 황실 쪽 사람인가? 이 비욘 드의 본부 위치를 정확히 알고 침 입했다고 하면 일이 복잡해지는데.
배신자가 생겼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 엉 켰다.
근육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거세게 뛰며 온몸 에 활력을 공급한다.
몸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뒤에 있다.'
마력석들이 반짝이는 이 안쪽에
뭔가가 있다.
'사람이라기엔 작은데. 대체 뭐 지?'
고민도 잠시.
휙!
철컥!
몸을 확 돌려 안으로 침입하면서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노이트를 겨눴다.
"..어?"
그런데 너무 뜻밖의 일이 발생했 다.
그곳에 누워있는 건 사람도 아니
었고, 황실 측에서 보낸 녹음기 같 은 것도 아니었다.
상처 입은 박쥐였다.
마력석 사이에 자리 잡은 박쥐 한 마리가 가쁜 숨을 내쉬며 피를 흘 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벅, 저벅.
나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천 천히 다가갔지만 녀석이 박쥐인 건 변하지 않았다.
'갑자기 박쥐가 여긴 왜?'
이곳이 동굴 모양이긴 하지만 실 제로 동물이 사는 건 본 적이 없는데.
- 키에엑
퍽!
그때 불쑥 박쥐가 덤벼들길래 맨 손으로 내려쳤다.
가뜩이나 기력을 잃은 박쥐였던 탓인지 별다른 저항 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갑자기 나타난 기척. 이 안에서 자 연스레 살 리가 없는 박쥐. 게다 가…….
나는 박쥐가 사람으로 변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족이지만.
"……벨제부브?"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이름 을 부르자 박쥐가 파르르 떨었다.
"진짜 벨제부브, 당신이야?"
파드득.
내 말에 대꾸라도 하는 것처럼 박 쥐가 날개를 퍼덕거렸다.
'벨제부브가 왜 여기에? 아니, 그 것보다 저 모습은 기력이 다 쇠했 을 때나 나타나는 모습일 텐데?'
센티피드를 죽인 직후에나 봤던
모습 아닌가.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땐 분명 어 린아이 정도 모습이었고 내 피까지 내어줬으니 그보다 더 회복되어 있 어야 정상인데.
왜 도로 박쥐 모습으로 돌아간 거 지?
의구심이 끊이질 않았다.
"벨제부브. 지금 말을 못하는 상태 인거야?"
박쥐가 날개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더니 내 팔뚝을 가리키 는 것이다.
피를 조금만 나눠달라는 의미겠지.
"안 돼.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 고."
더구나 여긴 혁명군의 본부였다.
벨제부브가 여기서 난동을 피우면, 내 계획에도 너무 큰 차질이 생기 고 만다.
일단 그가 여기 등장한 것부터가 이미 문제였지만!
"내 물음에 0X로 대답해. 대답을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겠어. 알겠 지?"
박쥐가 숨을 헐떡이며 O를 그렸
다.
"우선 당신이 그렇게 변한 걸 보 면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당 신과 필적할 만한 누군가..... 마왕 과 싸운 건가?"
O.
"이그니스는 아닐 거고. 베아트리 스랑?"
O.
젠장. 어쩐지 불길하더라니.
베아트리스가 날 이용해서 이그니 스의 죽음을 유도한 게 영 찝찝하 던 참이었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하 지.
"이그니스가 죽은 틈을 타서 베아 트리스가 세력을 확장한 건가? 그 리고 당신은 거기에 당한 거고?"
O, 그리고 0.
박쥐가 연신 동그라미를 그린다.
상황이 대충 예상이 갔다. 그렇다 면 가장 중요한 물음이 남았다.
"여기에 내가 있는 줄 알고 찾아 왔어?"
X.
"그럼. 여기에 몰려 있는 인간들을
잡아먹으려고?"
X!
내 기색이 점점 살벌해지자 박쥐 가 거세게 부정했다.
그러더니 날개 끝으로 마력석들을 가리킨다.
"……마력석 때문에?"
O.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마력석은 크게 의미가 없……. 아니. 이 정도 양이면 회복에 큰 도움이 되나?"
O!
그렇군. 그러니까 이 드래곤 산맥
에 묻혀있는 마력석 더미를 벨제부 브는 이미 알고 있었고, 몸이 약해 진 지금 이용하러 온 모양이다.
원래 같으면 그의 마왕성 안에서 회복하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 만…… 벨제부브가 피를 흘리며 도 망친 것을 보면 마왕성도 무사하지 못한 것 같다.
"네 마왕성도 함락당한 거야?"
O.
이번엔 자그맣게 동그라미를 그린 다.
"그럼 지금 베아트리스가 세 개의 마왕성을 다 차지했단 소린데……
마왕성을 하나로 통합한 마족이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들은 바가 없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길 캐물으려 하 는데, 벨제부브가 돌연 파르르 떨더 니 날개를 툭 떨어뜨린다.
"뭐야. 연기하지 마. 섣불리 다가 갈 생각 없으니까."
내 경고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 다.
진짜 쓰러진 건가?
"일어나! 한 마족이 마왕성 셋을 다 차지하면 어떻게 되는데! 역사
적으로 그런 사례가 있긴 해? 그건 대답해야지!"
내 채근에도 벨제부브가 다시 눈 을 뜨는 일은 없었다.
젠장.
그를 여기에 방치해두고 갈 순 없 었다.
힘을 회복한 다음에 혁명군을 공 격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었다!
베아트리스가 마계를 통일하는 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과거에도 없었던 일이고.
그야 그땐 3마왕이 벨제부브, 센티 피드, 이그니스였다.
그런데 이그니스와 센티피드가 죽 고 나서 그 어부지리를 이용한 다 른 마족이 생길 줄이야.
" 젠장!"
나는 결국 겉옷을 벗어 벨제부브 를 돌돌 감쌌다. 힘이 약해진 이상 이 정도 구속도 벗어나기 쉽지 않 으리라.
여기 그냥 두고 갈 순 없으니, 우 선 내 숙소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그에게 들어야 할 말도 있
으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애완 박쥐가 생 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