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챕터: 마지막 나침반
한국대 병원.
명성 높은 대학병원 앞에 도착하 니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그 보 호자들이 종종 보였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이 내 정로운이 한달음에 달려와 날반겼다.
"오셨네요, 대장!"
"사석에선 편하게 불러주세요."
정로운이 날 대장이라 말하면 기 껏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나온 이 유가 없지 않은가.
"정말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저도 한 번쯤 뵙고 싶 었는걸요."
"동생이 대장 팬이기도 하고, 꼭 직접 만나 뵙고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하더라고요."
정로운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
적였다.
뜬금없이 내가 대학병원에 온 이 유가 이거였다.
정로운의 동생, 정로나.
그녀가 날 직접 보고 싶다고 청했 기 때문이다.
정로운이 쭈뼛거리며 꺼낸 얘기에 나는 혼쾌히 동의했다.
병원에 들어서자 날 알아보는 사 람들이 작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 모습을 보며 정로운이 의아하 다는 듯 물었다.
"자주 오셨나 봐요? 익숙해 보이
시는데."
"제가 환자로 오거나, 제 주변인이 환자로 올 때가 종종 있죠."
" 아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다 보니 중직의 헌터가 다치게 되면 이곳으로 실려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운우가 전에 입원했던 병원도, 표연원이 입원한 곳도 여기였으니 내 얼굴을 알아볼 법도 했다.
"이 병실이에요."
정로운도 헌터로 벌어들이는 수입 이 제법 든든한 덕인지 동생의 병실도 꽤나 화려했다.
이 병원 1인실이 하루 입원비가 얼마더라.
똑똑똑.
"로나야. 들어갈게."
스윽.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랜 병을 앓 은 환자 특유의 내음이 났다.
짙은 병원 냄새와 함께 가느다란 팔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병실에 오래 누워 지낸 탓에 근육 이 퇴화해 팔다리가 바싹 말라 있 었다.
"안녕하세요."
정로운과 닮은 얼굴을 한 여자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소녀라기엔 성숙하고 여인이라기 엔 앳된 얼굴이다. 내 또래쯤 되어 보였다.
"정로나라고 해요."
"한서하입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저희의 은 인 같은 분이라, 꼭 한 번쯤 직접 얼굴을 뵙고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 었거든요.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정로운 씨 동생이면 제
게도 가족 같은 분인걸요."
내 말에 정로운이 감격한 듯 얼굴 에 화색이 돌았다.
정로나는 정로운보다 훨씬 침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오랜 투병 탓인지 천성인지 모르 겠지만, 마치 정로나 주변에만 시간 이 흐르지 않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오빠. 음료라도 한잔 준비해 줄 수 있어?"
"응. 자판기에서 뽑아올게. 금방 돌아올게요. 얘기 나누고 계세요!"
정로운이 병실 밖으로 나가자 정 로나와 나 단둘이 남았다.
어색함을 느끼기도 전에 정로나가 툭 내뱉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뜬금없는 서두였다.
"저희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 그런 진귀한 아이템일 줄 누가 알았겠어 요. 서하 씨 덕분에 그 진가를 알 게 되고, 오빠도 헌터 생활에 만족 하는 것 같으니 천만다행이죠."
"저 역시 정로운 씨에게 많은 도 움을 받고 있습니다. 큰 전력이 되
어 나라에 이바지하고 있기도 하고 요."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단순히 감사인사인 줄 알 았는데 말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 았다.
"어머니께선 1세대 헌터셨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물론 저희가 어릴 때 돌아가셨으 니 자세히 아는 바는 없지만요. 1 세대 중에서도 거의 초창기 헌터라, 고생은 많이 하셨지만 남길 만한 재산은 얼마 없으셨고요."
초창기 헌터는 그야말로 비운의 세대다.
느닷없이 게이트에 휘말린 이들이 대부분으로, 국가적으로 헌터의 활 동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일종의 자 경단 역할을 했다.
당연히 무보수거나 터무니없이 적 은 보수만 받았다.
당시엔 마력석이 중요한 에너지원 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니 몬스터의 부산물이나 마력석이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대신 아이템은 좀 있으셨죠. 대부 분 헐값에 팔아버리긴 했지만."
헌터라고 할 만한 이들이 몇 없었 으니 아이템을 독점하는 건 어느 정도 당연한 이치였다.
"어머니는, 그 수많은 아이템들 중 도저히 감정이 어려운 아이템 딱 두 개만 남기고 재산을 모두 정리 하셨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정로운이 가진 '얼음 바람의 펜던트'겠지.
그럼 나머지 하나는?
정로운의 어머니가 2개의 아이템 을 남겼다면 나머지 하나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정로나가 대답했다.
"제게도 어머니가 남기신 유품이 하나 있어요. 감정되지 않아 정확히 어떤 물건인진 모르지만요."
그러더니 옆에 놓인 서랍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침반이군요."
"맞아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나침반이었 다. 으레 북쪽을 가리켜야 정상이겠 지만 마치 고장 난 것처럼 아무 미 동도 없었다.
"지금은 고장 난 나침반이죠."
[아이템을 확인합니다.]
〈고장난 나침반(귀속)〉
등급: ??
설명: (아이템을 감정할 수 없습니 다)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도 다정 언니에게 맡기면 감정 이 가능할까?
"그 나침반을 당신이 맡아줬으면
해요."
"……호의는 고맙지만, 이 아이템 은 귀속 아이템이라 제가 가질 수 없어요."
"아니요. 곧 가지실 수 있을 거예 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나는 낮게 속삭였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시는 겁니 까?"
"네. 당연하죠."
귀속 아이템의 주인이 바뀌는 경 우는 단 한 가지뿐이다.
본 주인의 죽음.
죽음 앞에선 귀속도 무력하기 때 문이다. 지금 정로나는 자신이 죽을 거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저 스스로 느낄 수 있어요. 한계 가 가까이 왔다는 걸."
"하지만……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들었는데요."
정로운이 해사하게 웃으며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말하던 것이 눈앞에 선했다.
몸이 점점 회복되고 있단 얘기까 지 했단 말이다.
"회광반조 같은 거죠. 끝나기 직전 의 불꽃이 가장 열렬히 타오르는 것처럼요."
제 죽음을 말하는 것치곤 너무 담 담한 어조였다.
"이 정도면 오래 살았죠. 처음 절 맡았던 의사는 제가 성인이 되지 못할 거라 했거든요."
정로나는 평생 자신은 죽음과 함 께 걸어왔다고 덧붙였다.
"제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 니에요. 언제나 나와 함께했던 친구 같은 존재죠. 제 죽음보다 더 두려 운 건…… 여기 두고 가는 제 하나
뿐인 혈육이에요."
스스로의 죽음은 아무래도 좋으나 정로운이 슬퍼할 것이 염려된단 말 이었다.
"오빠를 생각해서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겠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요. 가망 없는 제 몸에 갑자기 생 기가 도는 것부터가요."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 닙니까? 정말로 몸이 좋아진 걸지 도 모르잖아요."
"검사 결과 제 몸은 그대로예요. 오히려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
진 구석은 없어요."
단호한 어조였다.
"제 몸이 마지막 활력을 다 쏟아 내고 가려는 모양이에요. 오빠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줄 수 있으니 다 행이지만, 그만큼 혼자 남겨지면 슬 퍼할 것도 미안해요."
정로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날 바 라봤다.
"그러니 이 나침반을 당신에게 넘 기는 거고요."
"당신 오빠를 잘 돌봐달라고요? 미안하지만 제겐 그런 재주는 없습 니다."
상실감에 빠진 정로운을 달래주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이런 중요한 물건은 제가 아니라 정로운 씨에게 주는 편이 나을 겁 니다."
그러자 정로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일종의 담보예요."
정로나가 나침반을 내 손 위에 쥐 여 주며 뒷말을 이었다.
"이 나침반을 오빠가 얻으려면, 당 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 아니에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내가 멍한
얼굴을 하자, 정로나가 활짝 웃었 다.
"제가 아는 한 가장 강한 사람이 당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오래오래 살아서, 우리 오빠가…… 이 나침반 을 최대한 늦게 가져가게 해줘요."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어라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아이템이 뭔진 몰라도 오빠의 것처럼 좋은 아이템일 수도 있으니 당신에게도 나쁘지 않은 도박이죠. 안 그래요?"
내게 나쁠 것 하나 없는 제안이긴
했다.
나는 s급일 가능성이 있는 아이템 을 거저 갖는 것이고, 정로나가 죽 게 되면 아이템을 감정해보면 될 일이다.
좋은 아이템이면 내가 잘 쓰다가 정로운에게 넘겨주면 되고.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렇지만 여러 모로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많았다.
"부탁해요."
정로나가 내 손을 꽉 쥐고 읊조렸 다.
그 절절한 눈동자와 마주하자 나
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나침반이 당신이 길을 헤맬 때, 중요한 이정표가 되길 바랄게 요."
늘 죽음과 발맞춰 걸었던 강인한 영혼이 드물게 눈물을 흘렸다.
"대신 당신도 내 오빠의 나침반이 되어줘요. 살아갈 이유를 잃은 오빠 의 인생에 하나뿐인 나침반이."
꽈악.
나도 모르게 나침반을 힘주어 잡 았다.
벌컥.
"나 왔어! 어떤 음료를 좋아할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가져왔……
정로운이 손을 붙잡고 있는 우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활 짝 웃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예 요?"
" 방금요."
"음료수 고마워, 오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연스레 떨어졌다.
정로나의 나침반은 내 손아귀에 쥐인 채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침반을 주머니 속에 넣고 정로운이 건네는 음료수 를 받아들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오빠 험담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나 오자마자 조용해지더 라."
둘이 투닥거리며 장난치는 모습을 보니 나침반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류라임과 함께 좀 어리 광부리는 이미지에 가까웠는데 이 렇게 보니 동생을 챙기는 모습이 새로웠다.
정로나가 고개를 돌려 날 보며 마 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오늘 얘기 나눠서 좋았어요."
"저야말로요."
"우리 오빠, 아직 부족한 점도 많 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상투적인 표현이었지만 유독 뇌리 에 남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할게요."
그 정도면 됐는지 정로나도 가볍
게 웃었다.
"오빠. 이만 바래다드려. 너무 늦 기 전에 돌아가셔야지."
"응. 그럴게. 조금 기다리고 있 어!"
정로운의 손길에 이끌려 병실 밖 으로 끌려가면서 나는 힐끗 뒤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정로나가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무어라 속 삭였다.
'고, 마, 워, 요.'
그리고 그게 내가 기억하는 정로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정로운과 내가 밖으로 나간 人}이, 정로나는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어 면회조차 제한되는 중환자실로 옮 겨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