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챕터: 준비된 절차
과연 그 마법사는 다니엘의 기억 을 어디까지 읽었을까?
다니엘은 계속해서 그것을 생각하 느라 도무지 눈앞의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경! 다니엘 경!"
그를 부르는 소리에 다니엘이 퍼 뜩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시온의 얼굴과 마주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 릴 수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오늘은 세 드릭 경이 있으니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다시 그물 침대에 도전해볼 생각인데 혹시 경이..
시온이 조잘조잘 떠드는 것에 애 써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니엘 은 한편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이사벨라에게 알려야겠어.'
확실하진 않지만 만약 그 마법사 가 혁명 계획까지 읽었다면.
그럼 모든 게 엉망이 될 것이다.
비록 이사벨라와 사이가 좋은 편 은 아니지만 일단 한배를 탄 입장 에서 이런 중대한 사안을 입 다물 고 있을 순 없었다.
'젠장. 차라리 정신 감정을 못 받
겠다고 하는 게 나았을까?'
강하게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면. 어쩌면 정신 감정을 받지 않을 수 도 있었다.
고위 귀족과 황족의 기억을 읽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기밀 사항들이 유출될 염려가 있어서이지 않은가.
다니엘은 오랜 시간 황족들의 호 위 기사로 지냈으니 그들과 필적할 만큼 많은 기밀을 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랬다면 5황자의 신뢰를 잃 었겠지. 황태자 즉위식 때 안에 들 어가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
그렇게 되면 다니엘이 그토록 꿈 꿨던 복수는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가 평생을 바쳐온 일이었다.
가문의 원수인 황제를 그의 손으 로 죽이는 일 말이다.
'오늘 저녁 이사벨라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어.'
몰래 만나 긴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었다.
* * *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촛대였다. 섬세하게 음각이 새겨진 것이 장인의 솜씨다.
그 위에서 일렁거리는 촛불을 한 사내가 후 불어 껐다.
카뤼센.
그는 동쪽의 '마지막 낭떠러지' 출 신 마족으로, 본래 하위 마족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 예정이었으나 이 성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이곳의 시종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유서가 깊은 이 고성은 그 명맥을 유지하느라 아직도 옛 모습이 그대 로 남아있는 것이 많았다.
카뤼센은 저택을 잘 정돈한 다음 마지막으로 제 주인에게 차를 내가 기 위해 준비했다.
그의 주인은 자비로우면서 냉철하 신 분이라 만나 뵐 때면 늘 긴장감 이 서렸다.
이 늦은 시간까지도 서류를 처리 하고 있으니, 슬슬 차가 다 식었을 것이다.
똑똑.
문을 두드린 다음 트레이를 끌고 찻주전자를 들였다.
"무슨 차지?"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아 직 앳된 기색이 남아있는 얼굴이었 다.
사정이 있어서 소년의 모습을 하 고 있지만 그 기품은 여전했다.
벨제부브. 3마왕 중 한 명이자 카 뤼센의 주인이었다.
"베아트리스 님께서 보내신 '카산 드라'입니다. 북부의 얼음 고성에서 나 자생하는 귀한 찻잎이죠."
카뤼센이 능숙하게 설명하며 찻잎 을 우려냈다.
"치워라."
" 예?"
"치우라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벨제부브가 눈살을 찌푸리곤 짜증스러운 티를 냈다.
카뤼센은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우 려내려던 찻잎을 빼냈다.
"그럼 늘 드시던 것으로 준비하겠 습니다."
"그래."
다행히 여분의 차를 가져왔기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카뤼센은 천만다행이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그쪽에서 보내는 물건은 되도록 받지 말도록. 이미 받은 것 들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군."
"그쪽이라 하면…… 베아트리스 님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카뤼센은 속으로 벨제부브가 베아 트리스와 척진 것인가 고민했다.
3마왕은 기본적으로 동등한 위치 지만 각기 자존심이 강해 서로 상 종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마왕성 위치도 동떨어져 있고, 맡 은 구역도 다르니 마주칠 일도 거 의 없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까진 정기적으로 베아트리스 님께 답례품을 드리고 있는데, 그것 도 전부 취소할까요?"
"……그래. 그게 낫겠어."
"알겠습니다. 더 명령하실 게 있습 니까?"
벨제부브는 그런 카뤼센을 잠시 바라보더니 툭 내뱉었다.
"이유를 묻지 않는군."
"제 본분은 벨제부브 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지, 명령의 당위성을 따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에 벨제부브는 흡족한 듯
미약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자네가 알아두는 게 낫겠어. 사사로운 일들은 카뤼센, 네 선에서 마무리 짓도록."
"신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벨제부브는 서류를 잠시 내려놓고 창가에 가 섰다.
창문 밖으로 그의 휘하에 있는 마 족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게 보였다.
"이그니스가 죽었다."
''.예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가 난 건
아니다. 이그니스 그 녀석은 워낙 성을 비우고 이곳저곳 돌아다녔으 니. 이번에도 그냥 자취를 감춘 걸 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벨제부브가 그의 죽음을 가늠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베아트리스가 이그니스의 성을 흡수하고 있어."
"하지만…… 이그니스 님의 성은 용암호수 가운데에 위치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 곳 을 어떻게……
"베아트리스의 구역에 절빙원이 있으니까. 그 얼음 고성에서 타락한
눈의 정령들을 이용해 어떻게든 길 을 만든 모양이다."
이그니스의 구역이 사막과 용암의 땅이라면, 베아트리스가 다스리는 구역 중 일부는 사시사철 얼음이 녹지 않는 빙하지대였다.
"오랜 시간 준비한 것 같았다. 어 쩌면 즉위한 직후, 혹은 즉위하기 전부터."
"그렇게 되면…… 힘의 균형이 깨 지고 말 겁니다."
카뤼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마족들의 땅은 3마왕을 중심으 로 철저히 3개의 파벌로 나뉘어 겨우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베아트리스가 이그니스의 성 을 잡아먹고 그 구역까지 다스리게 되면, 3마왕의 균형이 깨지고 베아 트리스 쪽의 힘이 너무 강성해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강해진 베아트리스 가 과연 벨제부브의 성을 가만히 내버려 둘까?
3개의 마왕성을 통합하고 마계의 황제가 되려고 하지 않겠는가.
"나도 그걸 염려하고 있다. 어떻게 든 이그니스의 성에서 다음 후계자 를 찾아 마왕으로 올리는 게 최선인데..
벨제부브는 서류 더미를 스윽 눈 으로 훑었다.
"마땅한 후보자가 없군."
"이그니스 님께서 성을 돌보지 않 았던 건 사실이지만 분명 내정된 후계자가 있었을 겁니다."
"다 죽었다."
벨제부브가 직접 서류 더미를 카 뤼센에게 보여줬다.
사진과 신상 정보가 간략히 적힌 명단 위로 죄다 '사망'이라는 도장 이 찍혀 있었다.
"후보가 5명 모두 죽었다. 전부 올 해 안에."
"그런..
베아트리스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미리 준비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 울 지경이었다.
"벨제부브 님.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카뤼센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 으며 정중하게 물었다.
"말해보거라."
"이대로 베아트리스 님께서 두 마 왕성을 차지하게 되면, 그 이후엔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전력 차 가 완전히 기울기 전에 먼저 공격 해야 합니다."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 니다."
벨제부브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제 손아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린 다.
"아직 내 몸이 전부 회복되지 않 은 게 문제지."
아직 채 성인으로 자라지 못한 미 성숙한 신체로, 한창 전성기를 누리 고 있는 베아트리스를 상대할 수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승부가 정해진 싸움이나 다 름없다.
마왕 정도 되는 수준의 싸움에 다 른 이들이 끼어드는 것도 어불성설.
그런데 둘이 1대1로 싸우면 당장 벨제부브의 패배가 확정적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베아트리스가 3개의 마왕성을 모두 차지하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군."
싸우더라도 지고, 싸우지 않더라도 후에 패배할 것이니 말이다.
"다른 방도는 없겠습니까. 베아트 리스 님의 이명은 '몽상가'이니, 그 특기를 차단하면 승산이 있을 것입 니다."
"그래. 몽상가 베아트리스. 그것도 문제다."
정신력이란 것은 강함을 추구하는 마족들도 쉽게 단련할 수 있는 부 분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무력이 강한 마족이라 할지라도 베아트리스의 앞에 서면 어린아이보다 못할 수도 있는 게 큰 맹점이다.
"이그니스의 성이 이토록 빨리 점
령당하는 데는 베아트리스의 '정신 조작'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섣불리 나섰다간 카뤼센, 너 역시 정신이 망가져 베아트리스의 심복 이 될 수도 있다."
"제가 어찌 감히……
"네가 아니라 나부터가 걱정이군. 육체와 정신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미성숙한 신체가 정신에 어떤 영 향을 줬을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 다.
만약 벨제부브가 베아트리스에게 정신을 조작당하면 그거야말로 큰재앙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카뤼센이 탄식을 금치 못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흘러가고 있었 다.
* * *
나는 한밤중에 몰래 테오도르를 찾아갔다.
차준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향했 는데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질 않았 다.
그 깊숙한 아래에서 테오도르가 반갑게 날 맞이했다.
"왔구나! 마침 잘됐다. 네가 부탁 했던 실험이 또 성과를 보이고 있 던 참이다."
"그거 다행이네. 조만간 쓸 수 있 을 것 같아?"
"물론이지. 이미 한번 해봤던 일이 라 두 번은 수월하구나. 내가 이쪽 에 있는 것만 빼면 기본적인 내용 은 동일하니까."
그거 듣던 중 희소식이었다.
"그리고 재료도 슬슬 전부 모아가
니, 너도 준비하는 게 좋겠구나."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야지."
저번엔 너무 예고도 없이 간 탓에 내 장례식이며 뭐며 난리지 않았던 가.
이번만큼은 잘 준비해서 주변인들 에게 걱정 끼치는 일이 없어야 했 다.
'이운우를 설득해서 해외로 잠깐 나간 것처럼 꾸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과연 이운우가 내 말을 들어줄지 가 의문이었다.
테오도르도 그런 내 걱정을 꿰뚫 어 본 것처럼 장난스레 덧붙인다.
"걱정 말거라. 내가 굳이 이 지하 벙커 같은 곳에서 지내는 이유가 뭐겠느냐. 혹여나 그들이 죄다 몰려 와도 난 안전할 것이다."
"이번엔 잘 정리하고 갈 거야."
내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갖은 방 법으로 테오도르를 협박했던 모양 이니, 그에게도 미안할 따름이었다.
테오도르가 나와 마주 보며 웃었 다.
"다시 톨룩으로 넘어가는 소감은
어떠냐."
"무슨 소감. 놀러 가는 것도 아닌 데."
"오래도록 기다려온 날 아니더냐. 떨릴 법도 한데."
"그다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감회가 새 로웠다.
이사벨라나 다니엘과 처음 만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1황녀가 성인이 되는 그날.
모든 후보가 성년이 되는 그때가
머지않았다.
황태자 즉위식이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