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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280화 (291/361)

280화

"공교롭군. 그 귀한 풀이 3황자궁 과 본궁으로 이어지는 복도에 있었 다니...

"그곳은 야외 복도라 바로 앞에 정원이 있습니다. 제가 아니었으면 그냥 정원에서 흘러들어온 잎사귀 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곳은 야외 복도라 바로 앞에

정원이 있습니다. 이 풀은 정원에 심긴 식물들 사이에 나 있었어요. 잘 모르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잡 초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니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어쩌면 이 번 사건의 진짜 범인은……

시온은 니나의 말을 끊어내며 버 럭 소리를 질렀다.

"무엄하구나!"

그러더니 무척 냉정한 얼굴로 니 나를 내려다본다.

"네가 지금 감히 누굴 의심하는지

알고 하는 말이냐."

"죄송합니다!"

니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잘 못을 빌었다.

방금 하려던 말은 꽤나 위험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황족 모독죄로 감옥에 처넣을 수도 있는 수준이었 다.

"나와 내 형님 사이를 이간질하려 하다니. 다른 세력에서 보낸 첩자인 게 분명하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제가 본 것을 말씀드리고 자……

"내게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아 주 우연히 네 고향에서만 나는 풀 을, 하필이면 네가, 그날, 그곳에서 보았다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 다!"

니나가 억울하다는 듯 간절하게 애원했다.

그러나 시온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듣고 싶지 않구나! 혹여나 네 말 을 다른 이가 듣고 나와 형님 사이 를 의심할까 걱정되니, 널 이대로 보낼 순 없겠다."

"저하!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다니엘 경."

"예, 저하."

다니엘은 보기 드물게 황자다운 박력을 보여주는 시온의 모습에 당 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하녀의 혓바닥을 잘라, 그 세 치 혀를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 거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죽이지 않는다. 다신 그 가벼운 입을 놀리지 못하게 도와주는 것뿐

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저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허튼소리를 하지 않겠습니다!"

다니엘은 말없이 검을 꺼내들었다.

잘 벼려진 칼날에 니나의 잔뜩 일 그러진 얼굴이 반사됐다.

"두 번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 다!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내려주세 요, 저하!"

니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자 시온은 다니엘에게 잠시 멈추라고 손짓했다.

그도 아직 어린 하녀의 혓바닥을

자르고 싶진 않았기에 시온의 말대 로 멈춰 섰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예, 저하! 물론이죠!"

니나는 실낱같은 희망에 미친 듯 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온은 니나와 눈이 마주하게끔 허리를 숙 였다.

그리고 니나의 바로 앞에서 낮게 경고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얘기가 내 귀에 들려온다면 그땐 네 혀가 아니라 목을 걱정해야 할 거다."

"예, 저하! 명심하겠습니다!"

"나가보거라."

시온이 휙, 손짓하자 니나는 거의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문밖으로 나 갔다.

밖에서 경비를 서던 이들이 의아 하게 쳐다볼 지경이었다.

다니엘은 시온이 무척 낯설게 느 껴 졌다.

이제껏 그를 옆에서 보좌하면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니나의 혓바닥을 자를 거라며 협 박하던 모습은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진짜 혀를 자르실 생각이셨습니 까'?"

다니엘이 묻자 시온은 픽 웃었다.

"설마."

"그럼 왜 그렇게 위협하신 겁니 까? 잘 이용하면 이번 법정에서 유 리하게 작용할 법한 증언이었는데 요."

고작 저 정도로 3황자가 진범이라 주장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시온에 게만 쏟아지는 의심의 눈초리를 조 금 와해시킬 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온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모르겠어? 저건 함정이다."

"함정이라고요?"

"그래. 3황자께서 그리 허술하게 일처리를 할 리가 없지."

시온은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다 니엘에게 차근차근 일러줬다.

"이건 잘 짜인 연극이야. 하필이면 황태자 즉위식 후보가 모두 발표된 이후 시점에서 이 일이 터진 이유 가 뭐겠어."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체스판을 내 려다봤다.

체스판 위에는 '킹'이 둘이다. 있 을 수 없는 일.

그래서 이 두 킹은 서로를 잡아먹 기 위해 나머지 병사들을 모조리 희생시키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후보 발표 전이었으면, 내 명예에 흠집을 내 후보자 명단에서 빼낼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3황자도 몸이 성치 않으니 후보에서 제외됐 겠지."

"그럼 자연히 1황녀 저하께서 단 일 후보가 되셨겠군요."

"그래. 그럼 남만 좋은 꼴이니, 제 일 적절한 시기를 고른 거야."

황태자 즉위식 후보 발표 직후.

몸이 약해졌다 해서 이미 확정된 후보를 제명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미 후보 자리에 오른 이상 지 지자들은 의미가 없거든. 이 제국의 황위는 승자 독식 체계니까."

지지자가 없어도 황태자 즉위식에 서 승리하기만 하면, 어떤 이의 제 기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분이 하필이면 그런 중요한 수면초를 복도에 흘린다. 말도 안 되지."

시온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가서 저런 말을 꺼내면 저 하녀도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 입막 음을 하기 위해 위협을 좀 가한 것 뿐이다."

"현명하십니다."

다니엘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 다.

시온이 이리도 총명한 황자였던 가?

3황자가 잘 짜놓은 함정을 간파하 고, 눈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미끼 를 피해갈 줄 알 정도로?

'5황자는 무능.'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대전제였다. 다니엘은 거기에 약간 의구심이 들 기 시작했다.

'만약 5황자가 무능한 게 아니라 면?'

다니엘은 체스판 위의 말들을 갖 고 노는 시온을 보며 오싹,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덜컥.

그때 문이 열리고 잠시 자리를 비 웠던 세드릭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하. 명하신 대로 그물침대를 가 져왔습니다."

"고마워. 세드릭 경."

"이쪽에 설치해드리겠습니다."

뜬금없는 그물 침대에 다니엘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물 침대 말입니까?"

"그래! 내가 저번에 '서민 생활 탐 구서'에서 봤는데 일반 백성들은 이런 그물 침대를 애용한다고 쓰여 있었거든. 무척 포근하고 좋다길래 나도 한번 써보고 싶어 세드릭 경 에게 부탁했어."

"여기 누워보시죠, 저하."

세드릭이 순식간에 그물 침대 설

치를 끝내자, 시온은 기뻐하며 한쪽 다리를 그물 침대 안으로 밀어 넣 었다.

"어? 어어? 이거 생각보다 중심 잡기가 어려운데. 금방 떨어질 것 같아."

"걱정 말고 편히 누우시죠. 만약 떨어지신다면 제가 온몸으로 막아 내겠습니다."

시온과 세드릭이 그물 침대를 놓 고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다니엘은 방금까지 심각하게 고민 하던 게 허무해졌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다니엘은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황족이라고, 암투를 읽어 내는 눈치는 있는 모양이야.'

그럴 만도 하다. 시온이 먹은 눈칫 밥이 얼마나 되겠는가.

최근에서야 시온의 존재감이 커진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온은 보잘것없는 황자였다.

그가 이 삭막한 황궁에서 아직까 지 살아남은 건 적당히 주변 눈치 를 살피며 흘러가는 대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고려하면 황궁 암투 정도 는 꿰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위에 내가 올라가도 버틸 수 있는 게 맞겠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끊어질까 봐 걱정인 데."

"염려 마십시오. 제가 다 시험해보 고 가져왔습니다."

시온과 세드릭의 만담이 한창 이 어지고 있었다.

* * *

땅, 땅, 땅!

"그럼 재판을 재개하겠습니다. 심 문관 측, 기억 감정 결과를 발표해 주시죠."

재판장의 말에 심문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고서를 낭독했다.

"5황자궁 소속 하녀, 하인을 모두 조사한 결과…… 의심될 만한 정황 을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이들의 알 리바이는 모두 증명됐습니다."

그 말에 다니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온의 측근들 중 아무에게서도

의심할 만한 꼬투리를 잡지 못했단 얘기였으니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로써 5황자 저하께선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 이 없다는 게 증명됐습니다. 이만 피의자 신분을 해제해주시기 바랍 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심문관이 다니엘의 말에 토를 달 기 시작했다.

"아직 한 분 남아있지 않습니까. 기억 감정을 받지 않은 분이."

"..뭐라고요?"

다니엘은 심문관이 제정신인가 싶 었다.

"지금. 황자 저하의 기억을 감정해 보겠단 말씀이십니까?"

술렁술렁.

다니엘의 말에 주변이 혼란에 휩 싸였다.

그건 일종의 금기였다!

감히 황족의 머리를 헤집어 볼 생 각을 하다니. 아주 무엄하고 무례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황제에게 제 충성을 바쳤 을 심문관은 무척 태연하게 굴었다.

"사실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항상 모든 일을 제 심복에게 시킬 순 없 는 일 아닙니까."

"지금 심문관 측은 검증되지 않은 말로 신성한 재판의 뜻을 흐리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재판장은 심문관 측에 경고를 줬 다.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발언 에 주의하세요."

그 경고에도 심문관은 제 뜻을 꺾 지 않았다.

"재판장님. 이건 억측이 아니라 사 실입니다. 사건 당시 5황자궁에는 침입자가 없었고, 5황자궁 소속 하 인들에겐 모두 알리바이가 있습니 다."

다니엘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 고 노력했다.

이렇게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으레 이 정도로 조사 결과가 나오 면, 황족의 기억은 조사해볼 수 없 으니 증거불충분으로 재판이 끝나 기 마련이었다.

'믿는 구석이 없으면 저렇게 나올

리 없는데 말이지.'

다니엘은 그게 뭔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초조했다.

"5황자궁에서 알리바이가 없는 인 물들은 단 셋뿐입니다. 바로 5황자 저하와…… 그 두 기사들 말입니 다."

세드릭 역시 불쾌함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5황자 저하께는 감히 기 억 감정을 요청할 수 없고."

심문관의 시선이 물 흐르듯이 세 드릭에게 향했다.

"세드릭 경은 긍지 높은 멜팅하트 가문 출신이시니. 역시 기억 감정이 어렵겠죠."

황족만큼은 아니지만 고위 귀족의 기억 감정 역시 법적으로 제한이 많았다.

그리고 끝내 심문관이 다니엘을 응시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5황자 저하 께는 알리바이를 입증할 만한 충직 한 기사가 있군요."

다니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평민 출신의 기사 말입니다. 기억

감정이 얼마든지 가능한."

"나는 황제 폐하께 명예 작위를 수여받았다!"

다니엘이 발끈해 소리치자 재판장 이 주의를 줬다.

"재판 중입니다. 경어로 상대측에 게 존경을 표하십시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 려 시온을 바라봤다.

시온은 뭐가 문제냐는 듯 그를 멀 뚱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법적으로 명예 작위는 승계되지 않는 작위이기 때문에 기억 감정의

결격 사유가 되지 못합니다."

심문관이 결정타를 날렸다.

"심문관 측은 5황자 저하의 알리 바이 입증을 위해 다니엘 경의 기 억 감정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젠장. 당했다.

다니엘은 곤혹스러움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의 머릿속엔 밝혀져선 안 되는 비밀이 너무도 많이 들어있기 때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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