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웅성웅성.
마리아의 말이 전부 진실이란 게 밝혀지자 파장이 컸다. 관중석에 앉 아있던 이들이 저마다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시온이 답답함에 피의자석에서 일 어나 외쳤다.
"차라리 나한테 마법을 써보게! 난 결백하단 말이다!"
"5황자 저하. 아쉽게도 황족을 대 상으로 하는 정신계 마법 사용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심문관의 말에 시온이 으윽, 하고 신음을 냈다.
정신계 마법사는 대상자의 기억을 읽어내는 탓에 사용할 수 있는 대 상이 한정되어 있었다.
하위 귀족들은 당사자의 허락 하 에 사용할 수 있지만, 고위 귀족이 나 황족들은 기밀의 유출을 우려해 아예 금지 대상으로 정해두었다.
"이상입니다. 재판장님."
"변호인 측, 증인을 심문하겠습니 까'?"
재판장의 물음에 다니엘이 자리에 서 일어났다.
"예. 심문하겠습니다."
그는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마리 아의 앞에 섰다.
이번에도 마리아의 옆에는 정신계 마법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중인. 증인이 받았다던 그 메시지 카드가 아직 남아있습니까?"
"아뇨……. 읽고 나선 태워버리라
고 쓰여 있었거든요."
"그럼 그 메시지 카드 마지막에,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서명이나 인장이 찍혀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다니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 메시지 카드를 보낸 게 5황자 저하라고 어떻게 확신했습니 까?"
"예? 그건……
마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뒷말을 이었다.
"그야 거긴 5황자궁이었고, 전
5황자 저하 소속 하녀였으니까.... 그냥 당연히 그분이라 생각했어요."
"5황자궁에 황자 저하와 하녀들만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왜 다른 고 위 귀족이라 생각해보진 못한 겁니 까?"
"어? 그러고 보니……
마리아가 골몰히 회상에 잠겼다. 그러자 심문관 측이 다니엘에게 이 의를 제기했다.
"변호인 측은 쓸데없는 꼬투리를 잡고 있습니다!"
"기각합니다."
재판장은 이번 담론이 유의미하다 고 느꼈는지 심문관 측의 의견을 기각했다.
"아! 기억났어요!"
마리아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소 리쳤다.
"그 편지지에서 5황자 저하께서 즐겨 쓰는 향유의 내음이 났거든 요!"
"향유 말입니까?"
"네!"
"그 향유는 5황자궁에서 특별 제 조한 향유인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어느 유 명한 장인이 만들었다곤 하는데, 전 그런 건 잘 몰라서요. 그 냄새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에요."
다니엘이 마법사를 바라보자 마법 사가 작게 속삭였다.
"진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그럼 그 메시지 카드를 보낸 게 5황자 저하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문관 쪽이 곧장 반박했다.
"5황자궁 소속의 하녀입니다! 외
부인이 5황자궁의 보안을 뚫고 들 어가 그 방에 와인과 카드를 두고 나갔단 말입니까?"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향유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구매할 수 있 으니까요."
"황궁의 보안을 뭘로 보시는 겁니 까!"
"와인 창고에 수상한 와인이 들어 온 것도 모를 정도인데, 왜 불가능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둘의 말다툼이 심해지자 재판장이 망치를 두드렸다.
땅, 땅, 땅!
"정숙! 정숙하세요!"
그러자 심문관과 다니엘 둘 다 하 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다 물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는 감히 황제라 할지라도 재판장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중인이 받은 카드. 그 카드를 보 낸 사람이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는 데는 양쪽 다 동의합니까?"
"심문관 측, 동의합니다."
"변호인 측도 동의합니다."
"그럼 5황자궁의 보안을 피해 카
드를 가져다 놓은 것이 누구인지 추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양측, 제시할 증거가 있으면 제시하십시 오."
재판장이 적당한 타협점을 이끌어 내자 심문관이 먼저 득달같이 달려 들었다.
"5황자궁의 구조, 경비 교대의 시 간 그리고 중인의 방 위치를 요구 합니다."
"허락합니다. 변호 측, 제시하세 요."
재판장의 허락하에 다니엘은 심문 관이 원하는 자료들은 모두 제공했다.
"기록에 따르면 중인의 방은 5황 자궁의 3층 제일 끝 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복도를 통해 침입 할 수도 있지만 창문을 통해 침입 할 수도 있죠."
"해당 시간은 정원사가 정원을 관 리하고 있을 시간입니다. 창문을 통 해 눈에 띄지 않고 침입하는 건 불 가능합니다."
"그럼 방법은 복도를 통해 들어가 는 것뿐이었겠군요."
이번엔 다니엘이 먼저 중인을 요 청했다.
"재판장님. 당일 중인의 방이 있는 복도에 순찰을 돌았던 병사를 증인 으로 소환하고 싶습니다."
"허락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 하 나가 창백해진 얼굴로 끌려왔다.
다니엘이 무어라 묻기도 전에 병 사가 넙죽 엎드리며 제 죄를 이실 직고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중인. 우선 이름과 직업을……
"부디 제 가족들만은 무사하게 해
주십쇼! 모든 죄는 제가 끌어안고 가겠습니다!"
도무지 말을 들어먹질 않았다.
다니엘이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중인.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 그게 실은…… 그날 경비에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병사의 외침에 장내가 혼란스러워 졌다.
"구멍이 있었다는 말은?"
"정말 죄송합니다! 제 목숨으로 사
죄하겠습니다!"
"중인. 묻는 말에 대답하게."
다니엘은 병사의 어깨를 꽉 움켜 쥐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지?"
"저…… 그날 저는 평소처럼 정해 진 구역을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병사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중 언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어떤 향 같은 것이 계속 났습니다. 저는 그냥, 다음 날이 연회이니 그 준비 탓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전 그 만…… 깜빡 잠들어 있었습니다."
병사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이유가 어쨌든 이건 심각한 직무 유기였고, 그 결과로 3황자의 목숨 이 위태로워졌으니까.
병사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남을 실책이었다.
"시간은?"
"딱 10분입니다! 정말 그때 외엔 평소처럼 순찰을 돌았고, 수상한 자 도 없었습니다."
"10분......
다니엘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이렇게 되면 정말 목격자가 아무 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법사를 바 라봤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무심하 게 대꾸했다.
"진실입니다."
재판장도 골머리가 썩는지 침통한 표정이었다.
"당일 5황자궁의 경비엔 10분간의 공백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범인이 누구인지 목격한 자는 없다. 이런
거군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5황자궁에 머 무는 모든 하인과 하녀들의 전수 조사를 청합니다."
심문관의 요청에 재판장이 되물었 다.
"전부 정신 감정을 하겠단 말입니 까?"
"예. 5황자궁을 드나든 사람이 없 었다면 범인은 그 안에 있을 것입 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찾아 내 낱낱이 밝혀야 합니다."
앞에 밝혀진 기록에 의하면 5황자 궁은 당일에 별다른 방문객을 받지않았다.
5황자가 찾아오는 귀족들에게 질 려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엄중히 명한 탓이었다.
"허락합니다. 정신 감정이 이루어 지는 동안 휴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땅, 땅, 땅!
다니엘은 시온이 시무룩해 있거나 반쯤 얼이 빠져있을 거라 생각하며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아직 피의자 신분인 시온은 휴정 중에도 정해진 대기실에서만 쉬어 야 했다.
"5황자 저하. 너무 걱정하지 않으 셔도 됩니다. 정신 감정이 끝나면 금방……
"괜찮아. 다니엘 경."
시온이 뒤돌아 다니엘을 바라봤다.
그는 떨고 있지도 않았고, 안절부 절못하는 기색도 없었다.
"변호인 일에 꽤나 능숙하던데."
"막 기사가 됐을 때 몇 번 소송에 휘말린 적이 있었습니다."
"경이?"
다니엘은 늘 을곧은 품행으로 유 명했기에 시온은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처음엔 제 출신에 불만을 갖고 악의적으로 소송을 거는 경우가 많 았습니다. 자기 물건이 사라졌는데, 제가 평민 출신이니 손버릇이 나쁠 것이다. 뭐 그런 식이었죠."
"……고생이 많았겠네."
"별말씀을요. 제 변호를 맡으려는 전문 변호인도 없어서 결국 제가 스스로 변호에 나서야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평민을 위해 귀족과 척을 지고 싶은 이는 없을 거다. 변호인도 애초에 귀족들이 맡는 경 우가 많아서, 다니엘의 의뢰를 받길 꺼렸다.
"그 결과 이렇게 5황자 저하를 변 호할 수 있으니 다행이죠."
"고맙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만약 시온이 그대로 누명을 뒤집 어썼다면 황태자 후보 자리도 빼앗 길 수도 있었다. 다니엘에겐 별다른 선택권이 없던 셈이다.
'어떻게든 무죄로 만들어야 해.'
그런 의지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고 한 하 녀가 들어왔다.
"말씀하신 차를 내왔습니다."
"차? 차를 내오라 한 적은 없
다니엘은 하녀를 내보내려다가, 그 녀와 눈을 마주치곤 말을 멈췄다.
흔들리는 동공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들어오지."
"감사합니다."
탁.
다니엘은 우선 하녀를 안으로 들 인 뒤 문을 닫았다.
들어오자마자 하녀는 차는 뒷전이 고 시온에게 향했다.
"5황자 저하. 제 무례를 용서하세 요. 저는 배운 것이 없고 신분이 미천해, 저하께 닿을 방법이 이것뿐 이었습니다."
"누구지?"
"저는 3황자궁 소속 하녀, '니나' 라고 합니다."
3 황자궁.
그 얘기에 시온과 다니엘의 눈빛 이 날카롭게 변했다.
"3황자궁 소속 하녀가 무슨 일이 지."
다니엘은 언제라도 니나가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베어버릴 작정으로 검집에 손을 댔다.
그런데 니나가 너무도 의외의 이 야기를 꺼냈다.
"제가 발견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왔습니다."
시온은 잠시 니나를 내려다보다 툭 내뱉었다.
"말해보거라."
"저는 무도회가 열리기 전날, 3황 자궁과 본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땐 영문을 모르고 있었는데, 방금 재판을 보니 제가 본 것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 아 찾아왔습니다……
니나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 다.
"아까 그 병사가 말한 '이상한 향' 의 정체를 제가 알 것 같습니다."
"뭘 본 것이냐."
니나는 소매에서 작은 잎사귀를
하나 꺼냈다.
"이 풀은 제 고향에서 나던 것입 니다. 태우면 일시적으로 사람의 정 신을 잃게 만드는 연기가 나죠."
" 과연......
경비가 갑자기 그렇게 정신을 잃 은 게 우연일 리는 없겠지.
이런 술수를 쓴 거라면 전부 설명 이 된다.
"이 풀은 황궁 안에 자생하는 종 이 아닙니다. 저는 북부에서도 아주 끄트머리에 있는 지역에서 왔는데, 그 지역에서도 4년에 한 번 꼴로 아주 추운 겨울에나 자라날 정도로
귀했습니다."
"그런데 이 풀이 네가 청소하는 그 복도에 있었다?"
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