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한국에."
"네. 한국에요."
생각보다 아주 가깝다. 적어도 외 국 어디 유적 같은 곳에나 있을 줄 알았는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네 요. 뒷내용은 아직 해석 중이라."
"……그 정도도 충분히 충격적이 네요. 뒷내용 해석까진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백목련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이것저것 가늠해보더니 천천히 대 꾸한다.
"……한 달은 더 필요해요."
"알겠어요.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사안이 너무 중대해서 그럴 수가 없네요."
이 모래시계를 우리가 먼저 발굴 하기만 하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 었다!
'톨룩이 이곳을 점령하기 전. 그때 까지만 모래시계를 찾아내기만 하 면 돼.'
내가 백목련을 손을 꽉 쥐고 부탁 하자 백목련이 손을 빼내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최대한 빨리 끝내려고 노력할 생각이었어 요. 저 역시 이 전쟁을 끝내고 싶 은 건 마찬가지거든요."
"게이트가 끝나면 백목련 씨는 실 업자가 될지도 모르는데요."
그녀는 게이트 연구소의 소장이니 까. 게이트가 사라지면 그 직책을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공무원 무시하지 마시죠. 철밥통 이라고요."
"백목련 씨라면 다른 분야에 가서 뭘 해도 잘 해낼 것 같긴 해요."
"칭찬으로 듣죠."
"칭찬이에요."
천생 연구원인 그녀가 연구직에서 물러나는 건 잘 상상이 가질 않았 다.
아마 다른 공부를 시작해 또 다른 뭔갈 연구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전쟁이 끝나면……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회귀 전부터 시작해서 내게 이 전 쟁은 10년이 훌쩍 넘도록 끝나지 않고 있었다.
전쟁 뒤의 일상 같은 것도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잘 기억나지도 않 았다.
"전쟁이 끝나면 한서하 씨야말로 실업자가 되는 거 아니에요? 헌터 잖아요."
"그러게요."
그때가 되면 헌터라는 직종이 필 요할까?
헌터가 아닌 나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
내가 좀 멍한 표정을 짓자 백목련 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대학을 가도 좋겠죠."
"……학생이 되라고요?"
"원래 한서하 씨 나이 대는 보통 학생이에요."
"그야, 그렇지만……
표연원을 보며 꿈꿔본 적은 있다.
그때 새터며 뭐며 향하는 걸 보고 잠시나마 궁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체력이 뛰어나니, 경찰이나 소방 관 같은 쪽으로 나가도 좋겠고요. 군인이 되라고 하면 욕처럼 들리나 요?"
"잘 아시네요."
군헌터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 까 말이다.
"어쨌든. 한 번쯤 고민해 봐요. 전 쟁이 끝나면 뭘 할지 "
"……그래야겠어요."
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전쟁이 끝나길 항상 바라 마지않 았으면서도 정작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탓이다.
헌터가 아닌 나는 무엇으로 정의 될 수 있는가.
'헌터' 한서하가 아닌 '인간' 한서 하는 무얼 하며 살아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털썩.
그때 무언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 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박노아가 기절하
듯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박노아 씨 P
"머리가 다치진 않았네요."
백목련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잠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좀 자고 나면 깨어날 테니까."
홀짝, 커피인지 뭔지 모를 것을 한 모금 들이켜는 백목련을 보니 뭔지 모를 광기마저 느껴졌다.
"괜찮은 거 맞나요?"
"물론이죠. 안 죽어요. 저도 저렇 게 단련한 거니까."
사람이 쓰러지자마자 머리부터 멀
쩡한지 살피는 게 정상적인 건가 의심스럽긴 했다.
"해석이 마무리될 즈음에 연락할 게요. 저는 쓰러진 보조 연구원을 대신해 두 시간 정도 더 바짝 일하 면 되겠네요."
생긋 웃는 얼굴이 그렇게 소름끼 치긴 처음이었다.
* * *
"표정이 왜 그래?"
다정 언니가 찻잔을 내오며 물었
다. 내 안색이 창백하긴 한 모양이 다.
"아니. 좀 안 좋은 생각이 나서."
생긋 웃는 백목련의 얼굴을 떠올 렸다고 말할 순 없어서 애써 둘러 댔다.
"뭐야. 궁금하게."
"별 거 아냐. 그보다 손이석 대장 장이님이 안부 전해 달라고 하셨 어."
덜컥.
찻잔이 컵받침과 부딪치며 덜그럭 소리를 냈다. 다정 언니가 크게 움찔한 탓이었다.
"뭐, 뭐, 뭐라고 하셨는데?"
"별 말씀 안 하셨어. 그냥 언제 한 번 올라와서 얼굴 좀 비치라고아 »
쨍그랑!
찻잔이 기어코 바닥에 떨어졌다.
"그, 그래? 스, 스승님도 참……. 그런 무서운 농담을 다 하시고으 »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동공이 이 리저리 흔들린다.
"혹시 진심이셨어?!"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당장 오라는 말씀은 아니셨을 거야. 언니 가 바쁘다고 말해두기도 했고."
"그래? 다행이다……
다정 언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대체 무슨 훈련을 시켰길래 이러 는 거야.'
나한테 손이석 대장장이는 좀 불 퉁하긴 해도 속마음은 다정한 대장 장이인데.
다정 언니는 얘길 들을 때마다 기 겁을 한다.
"휴. 미안. 내가 깜짝 놀라서. 가만
히 있어. 유리 조각들은 내가 치울 게."
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 조 각을 치웠다.
새로 차를 한 잔 더 타온 뒤에야 여유로운 티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번에도 활약했다며? 다 들었 어!"
"내가 뭘. 이번엔 연원이가 고생했 지."
"연원이는 기억도 못 한다던데?"
"그러니까. 자기가 다 해치워놓고 기억을 못 하고 있다니까."
"걔가 꼼꼼한 것 같아도 은근히 허당이라니까."
"그런 문젠가……?"
다정 언니도 나도 한동안 바빠 이 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 나누 는 게 오랜만이었다.
우린 케케묵은 이야기들까지 꺼내 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 서하 네가 나한테 대장장이 길만 제안 안 했어도! 응?"
"내가 잘못했네."
"아냐! 서하는 잘못 없어! 이건 전 부 스승님이 잘못한 거야……
장난스럽게 이야길 나누다가, 다정 언니가 불현듯 그 이름을 꺼냈다.
"왜. 처음에 서하 널 만났을 땐, 그 사람도 같이 있었잖아."
"……권성민 말이야?"
"응. 죽었단 얘긴 들었어."
언니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기분이 좀 묘하더라고. 나는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 래도 한솥밥 먹고 지냈던 사람이 그렇게 돌변했다는 게."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 사람이 죽었단 얘길 들
으니까...
나는 혹여나 다정 언니 입에서 날 탓하는 소리가 나올까 봐 두려웠다.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서하가 너무 걱정돼서, 잠이 안 오더라."
언니가 따스한 손을 내 손 위에 겹쳐 올렸다.
대장장이의 손이라서 그런지. 다정 언니의 손이라 그런지 기분 좋은 온기가 전해져왔다.
" 내가?"
"응. 네가 안 그런 척해도 마음이 여린 구석이 있잖아."
"......내가?"
나는 바보처럼 한 번 더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단 소린 들어봤어도 이런 얘 긴 처음이었다.
그런 내 반응이 웃긴지 다정 언니 가 작게 웃었다.
"혹시나 죄책감 같은 걸 갖고 있 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그래. 그럼 됐어."
언니는 정말로 날 걱정했던 건지 그럼 됐다며 웃었다.
"혹여나 그런 생각 하지도 말아! 알겠지? 어쩐지 전에 실내체육관에 있었을 때부터 그 사람이 너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했어!"
나는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뭔가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가 겨 우 내려앉았다.
"나는 그냥 그 사람이 널 좋아하 는 줄 알고, 갓 스무 살인 애를 좋 아한다니 양심도 없다고만 생각했
지."
"그런 건 아니었을 거야."
권성민과 내가 이성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와 나 사이 에 특별한 로맨스적인 기류는 없었 다.
'그냥 이상한 집착일 뿐이었지.'
마지막에 그가 중얼거린 말을 생 각해보면 그는 나를 '주인공', 자기 자신을 '조연'이라 생각했던 것 같 다.
그래서 조연에서 벗어나고자 발버 등 쳤던 거고.
"아, 최근에 태병이랑 연락을 했는 데 걔도 요즘……
"언니."
"웅'?"
언니가 애써 밝게 웃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게 눈에 보 였다.
나는 전부터 고민하던 걸 물었다.
"언니는 이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하고 싶어?"
"전쟁이 끝나면? 으음……. 그러 게. 지금처럼 막 바쁘진 않겠지?"
그래도 언니가 대장장이 일을 그
만두진 않을 거다.
훌륭한 대장장이란 게 이미 증명 이 됐으니 국가에서라도 모셔가겠 지.
" 나는......
다정 언니가 고민스러운 듯 미간 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사실, 아무래도 좋을 것 같 아."
"바라는 게 딱히 없어?"
"생각해 봐. 나는 이미 내 길도 찾 았고, 전쟁이 끝나면 여유도 좀 생 기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 졸일
일도 없을 거 아냐!"
다정 언니가 해사하게 웃었다.
"혜원 언니, 연원이 그리고 서하 너까지 전부 헌터라 내가 얼마나 불안한데. 전쟁만 끝나면 게이트도 없어질 테니 그럴 일도 없겠지?"
"……그러겠지."
"난 그걸로 충분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다정 언니는 정말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 었다.
"언니는 내가 헌터 일을 그만뒀으 면 좋겠어?"
"뭐어? 그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 하게 들린다."
언니가 배시시 웃었다.
"물론 헌터인 서하도 멋지지만 그 만큼 위험하니까 걱정하는 거지."
"그래서 못 가게 날 영원히 잠재 우려고 했던 거야?"
"으……. 그건 잊어줘……
다정 언니가 슬그머니 눈을 피했 다.
"그때는 진짜 불안 증세가 너무 심해서 손이 떨리고 잠도 못 잘 지 경이었단 말이야....... 물론 그렇다
고 해서 그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안 불안해?"
"덜하지. 그래도."
다정 언니가 그만큼 불안해할 줄 은 몰랐다.
생각해보니 언니 주변도 죄다 헌 터라 불안할 법도 했다.
"이 공방에 혼자 가만히 있으면 안 좋은 생각들이 들거든. 이러다 영원히 나 혼자가 될 것 같은 느낌 이 들면, 덜컥 겁이 나."
언니가 찻잔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는 것 같 기도 해. 최소한 망치질을 하고 있 으면 아무 생각도 안 나니까!"
역시 천생 대장장이 체질이다.
옷에 가려진 다정 언니의 근육질 팔뚝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말문 을 돌렸다.
"그럼 약속할까? 전쟁이 끝나면 위험한 일은 안 할게."
" 진짜?"
"응. 진짜. 나도 전쟁만 아니면 편 하게 지내고 싶지."
"와아! 약속한 거다? 응?"
한껏 기뻐하는 다정 언니를 보니 그게 그렇게 좋을까 싶었다.
언니가 전쟁 중에 벌어들인 돈이 적은 것도 아닌데, 비행기를 사거나 어디 넓은 집을 짓는 것도 아닌 일 로 이렇게 기뻐하고 있었다.
"너무 소박한 거 아니야?"
"그런가? 전쟁이 끝나긴 하려나 싶어. 아직 까마득한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그렇게 멀지 않을 수도 있어."
"응?"
다정 언니가 의아하게 바라보길래 대충 뒷말을 흐렸다.
"얼른 끝났으면 좋겠단 얘기지."
"맞아. 이게 무슨 낭패야! 자기들 망해간다고 남의 땅을 침략하고 말 이야."
다정 언니가 툴툴 대는 소리에 나 도 맞장구를 쳤다.
간만에 즐기는 여유에 몸이 노곤 노곤하게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