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꺄하하하하!"
베아트리스가 깔깔대며 웃었다. 아 주 웃기는 소릴 들었다는 듯이.
"내가 왜?"
그러더니 돌연 웃음을 멈추고 내 게 되묻는다.
"이제 저 애는 내 거야. 내 장난감
이라고."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뒤에 뻣뻣하 게 굳은 류라임을 꼬옥 껴안았다.
어린아이의 모습인 탓에 키가 작 아 주저앉은 류라임의 머리가 바로 품 안에 들어왔다.
"너 같은 영혼은 정말 재미없거든. 흠집 내기도 힘들고, 고결한 체하느 라 바쁘지. 반면에 이 아이를 봐. 이리저리 흔들리고 요동치잖아. 내 가 뒤흔드는 대로 자국이 선명하게 남고."
베아트리스는 류라임의 머리칼을 쓰다듬더니 제 뺨을 대고 부볐다.
사랑스러운 애완견을 대하는 것 같은 태도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
"나랑 거래하자."
"내게 제시할 수 있는 게 뭐가 있 다고? 네 영혼? 줘도 안 가져."
베아트리스에게 류라임의 영혼이 있다면, 우리 쪽에도 그녀의 것이 있지 않은가.
"네 수하. 권성민. 그자를 살려 보 내주지. 대신 류라임을 넘겨."
그게 내게 제안할 수 있는 최선이
었다.
권성민을 이번에도 살려 보내야 하는 게 뼈아프지만 류라임을 돌려 받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아〜. 그렇지. 그 애가 너희에게 가 있었구나."
베아트리스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죽여!"
명료한 답변이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끼는 부하 아니었나."
"부하? 난 그런 거 안 키워. 그냥
잠깐 가지고 노는 것뿐이지〜."
나도 모르게 쯧, 혀를 찼다.
권성민이 그렇게 숭배했던 베아트 리스조차 그를 쓰고 버리는 말 취 급이라니.
"그런 것치곤 힘을 꽤 많이 빌려 줬던데."
"그야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그 애의 영혼이 뒤틀리는 게 눈에 보 였거든."
베아트리스는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처럼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과욕에 무너져가는 모습도 다시 없을 절경이지!"
결국 권성민은 그녀의 힘을 통해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단 소리였다.
그것 참 가혹한 운명이다.
"자, 그럼 더 제안할 거리가 남았 어? 없으면 이만 빠져줬음 좋겠는 데. 난 이 애와 오붓한 시간을 보 내고 싶거든〜."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치곤 무척 살벌하다.
'베아트리스가 혹할 만한 게 뭐가 있지? 권성민으로 안 된다면……
일전에 벨제부브와 거래할 땐 그 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영상석 을 대가로 넘겼었지.
하지만 난 벨제부브의 어린 시절 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러다 문득 뭔갈 기다리는 듯한 베아트리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 다.
'……베아트리스는 왜 날 그냥 내 쫓지 않고 있는 거지?'
여긴 베아트리스의 손바닥 안이다.
나 정도 불청객을 내쫓는 건 얼마 든지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류라임을 담 보 삼아 자꾸만 내게 대가를 유도 하고 있었다.
그게 권성민의 생존은 아닌 모양 이지만.
'뭘 원하는 걸까.'
베아트리스가 내게 원하는 것.
나보다 훨씬 강한 베아트리스는 못하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런 게 뭐가 있을까.
-베아트리스한테 전해. 출전권 빌 려준 값은 잘 치를 테니까, 이건방해하지 말라고.
이그니스가 했던 말이었다. 출전권 을 베아트리스에게 빌렸다고.
베아트리스가 지구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을 거다. 지금도 류라임 을 보며 군침 흘리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이그니스에게 출전권을 양보한 이유는 무엇일까.
퍼뜩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게 있었다.
"……이그니스를 죽여 줄게."
내가 정답을 말했는지 베아트리스
는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좋〜아! 그 정도라면 내 유흥을 포기할 만하지."
베아트리스가 꼭 안고 있던 류라 임을 내 쪽으로 던진다. 작은 몸집 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괴력이 었다.
"처음부터 이그니스를 죽일 생각 이었나?"
"웅? 그럴 리가!"
베아트리스가 진하게 눈웃음쳤다.
"그냥…… 마왕이 세 명이나 있는 건, 좀 많지 않나〜 싶었을 뿐이거
드 "
처음부터 다 계획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권성민에게 과한 힘을 넘겨준 채 이그니스와 함께 지구로 보낸 것부 터가 수상하다.
"더군다나 제 성을 돌보지도 않는 머저리에게 왕이란 칭호는 과분하 잖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벨제부브나 센티피드와 달리 이그 니스가 마왕으로서 역할을 잘 수행 하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그니스는 그 별칭대로 투견. 싸 울 상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존재니까.
"그러니까, 우〜연히 네 제안을 듣 고 보니 나쁘지 않은 거지. 맞아, 맞아. 나쁘지 않은 제안이야."
베아트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쉽지만 그 애는 돌려주도록 할 게."
내 품 안에 안긴 류라임을 가리키 며 뒷말을 잇는다.
"맹약을 걸자. 만약 이그니스가 무 사히 톨룩으로 귀환한다면, 그 애가 어떻게 될진 네가 더 잘 알겠지?"
"……명심하지."
베아트리스와 나는 서로의 피를 교환하며 맹약을 체결했다.
만약 이그니스가 멀쩡하게 마계로 귀환하면 그땐 정말로 류라임을 앗 아가겠지.
"좋〜아! 그럼 서로 만족할 만한 거래가 끝난 것 같네!"
사실상 거래가 아니라 협박이다.
베아트리스가 류라임을 인질로 내 게 이그니스를 처단하라고 협박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중에 또 보자구."
베아트리스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 다.
동시에 내 손끝이 희미하게 변했 다. 발끝, 손끝부터 서서히 사라져 간다. 류라임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턱 밑까지 차오른다. 나 는 마지막까지 베아트리스와 눈을 마주했다.
오만함으로 가득 찬 그 눈동자와.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바닥에 무
릎 꿇은 권성민과 그를 감시하고 있는 카멜롯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돌아왔네요."
카멜롯이 내 품에 안긴 류라임을 힐끗 바라봤다.
"특별한 일은 없었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것 같던데 요."
카멜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도 그럴 게 권성민은 완전히 넋을 놓 고 있었다.
눈동자는 흐릿하고 초점이 없다. 내가 돌아왔는데도 시선 한번 맞추지 않는다.
"이그니스 쪽은요?"
"무전은 없어요. 아직 전투 중인 것 같은데."
베아트리스와 약속한 것도 있으니 서둘러 그쪽으로 가봐야 했다.
"으음……. 서하 님?"
"정신이 좀 들어요?"
"어.. 어어? 제가 왜 서하 님 품에……
류라임은 반쯤 정신이 몽롱한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영문을 모르는 눈치다.
좋은 기억도 아니니 굳이 되새김 질할 필요는 없겠지.
"저는 바로 이그니스 쪽으로 가봐 야겠어요. 류라임 씨. 싸울 수 있겠 어요?"
"으음……. 안 될 것 같아요.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목소리도 힘이 쭉 빠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멜롯에게 류라임을 부탁했다.
"류라임 씨를 데리고 이 인근을 빠져나가 줘요. 가능하겠죠?"
"못할 건 없지만. 이 녀석은 어떻
게 할 생각이죠?"
카멜롯이 권성민을 눈짓했다.
나는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지금까지 날 방해하 고 내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 렸으니 그대로 돌려주고 싶지 만…….
'국제 연합 소속인 카멜롯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꼬투리를 잡힐지 도 몰라.'
권성민은 일단 포로로서 가치가 상당했다.
게다가 나 혼자 잡은 게 아니라 국제 연합의 도움을 받았으니 그들 에게도 지분이 있었다.
"지금 처분하는 게 나을 겁니다. 보아하니 마왕과 연결이 완전히 끊 기진 않은 것 같은데. 섣불리 데려 갔다가 도리어 우리 정보가 새어나 갈 수도 있어요."
내가 침묵을 지키자 카멜롯이 먼 저 제안을 해왔다.
권성민을 데려갔을 때 발생할 득 과 실을 저울질하고 있는데.
그때 불쑥 누군가 끼어들었다.
"차라리 죽여."
아까부터 말이 없던 권성민이었다.
그가 어느새 두 눈을 똑바로 뜬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날 죽여. 한서하."
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내 마지막은 네 손으로 끝내 줬으면 해."
내가 대꾸도 않고 있자 권성민이 한충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 다. 거의 애원하는 투였다.
한때 동료였던 이의 최후를 보자
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눈을 감아."
내 말에 권성민이 지그시 눈을 감 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난 후회하지 않아."
의외의 말이었다.
베아트리스에게 버림받고, 이제는 인류의 배신자로 목숨을 잃을 처지 인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난 아 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부러워 하기만 하다 끝났겠지."
적어도 권성민이 내로라하는 헌터 가 될 일은 없었을 거다.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나로 인해 고통받았을 많은 이들 에겐 미안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게 마지막이었다.
탕!
총알이 그의 이마를 꿰뚫었다.
순식간이었으니 고통은 없었을 거 다.
털썩
베아트리스의 마력이 빠져나간 그 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 에, 그대로 숨을 거뒀다.
권성민의 몸뚱어리가 바닥을 뒹구 는 것을 보자 그게 더욱 실감이 났 다.
드디어 끝이었다.
그와 나 사이의 질긴 악연이.
처음엔 동료로 시작했으나, 끝내 제 욕심에 잡아먹혔던 인물. 권성 민.
권성민의 악행으로 고통받았던 피 해자가 내 바로 옆에 있기에 더이상 안타까운 마음은 없었다.
"류라임 씨를 부탁해요."
나는 권성민의 시신에서 시선을 떼고 카멜롯을 바라봤다.
"저는 먼저 이그니스 쪽으로 가볼 게요."
내 말에 카멜롯이 고개를 끄덕였 다. 몸에 힘이 풀린 류라임을 안아 들더니 훌쩍 떠났다.
:k * *
'공간 간섭.'
스킬을 이용한 다음 눈을 떴을 때 나는 의외의 장면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한서하 헌터. 그쪽은 마무리 지었 나."
전청운이 먼저 내게 상황을 묻길 래 대충 대꾸했다.
"네. 류라임 헌터가 전투 불능 상 태라 카멜롯 헌터가 후방으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내 말에 전청운이 고개를 끄덕였 다.
"표연원 헌터의 작품이지."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일전에 엘프의 숲에서 봤던 '숲의 어머니'가 이런 느낌이었다. 압도적 인 대자연 앞에 숨이 턱 막히는 감 각 말이다.
그 숲의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두 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 한 나무 한 그루가 제 자태를 맘껏 뽐내고 있었다.
"저 나무줄기 안에 그 이그니스가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거죠?"
"아직 아무도 접근을 못 하고 있 지. 표연원 헌터에게 물어보니 붙잡 아두는 게 최선이라 하던데. 그래서 성수를 더 보급받은 다음 상대하려 고 대기 중이고."
주변을 둘러보자 마력 포션을 산 처럼 쌓아둔 표연원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갖은 애를 쓰고 있는지 얼굴이 땀 범벅이었다.
그 와중에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애 써 웃어 보인다.
"곧 보급품이 도착한다. 모두 전투 준비!"
전청운의 외침에 헌터들이 제각기 제 무기를 들었다.
"불 속성에 내성이 있는 탱커들이 앞을 채우고, 원거리 딜러들은 저 나무가 해체되자마자 공격을 쏟아 붓는다!"
"옙!"
"알겠습니다!"
국제 연합에서 지원한 정예 헌터 들이다. 그들 하나하나의 실력이 만 만치 않을 터였다.
나 역시 노이트를 꽉 쥐었다.
표연원이 만들어낸 나무줄기 한쪽 이 야금야금 타들어 가는 게 눈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