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기화
왜 류라임에겐 내 얼굴이 안 보이 는 걸까.
분명 이전엔 내 얼굴을 봤을 텐데.
그러니 날 그렇게 따랐던 것 아닌 가.
'아. 얼굴이 보였으면 지금 나랑 같은 얼굴이란 걸 눈치챘었겠네.'
그래서 자연히 가려진 건가?
아니. 아니지. 잊으면 안 된다.
여긴 류라임의 기억을 기반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온전히 류라임의 기억 속인 건 아니니까.
'베아트리스. 그자의 짓이야.'
대체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이제 이 류라임에게 '구원자'인 한 서하는 사라지고 '정체 모를 새하 나교 신도'인 한서하만 남게 된 거 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류라임이 내게 갖는 절대적인 호의를 앗아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 왜? 왜 그런 귀찮은 짓을?'
물론 류라임의 시큰둥한 태도가 낯설긴 하지만. 단지 그뿐인데.
"교주는…… 죽은 건가?"
류라임이 작게 중얼거렸다.
복잡한 심경이 이리저리 얽힌 게 느껴지는 어조였다.
노인에게 쏘아붙였던 것처럼 류라 임도 새하나교를 정말 사이비라고 생각했을까.
'모를 일이지. 사람은 으레 이런
경우 어떻게든 정당화하기 마련이 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올 때, 그걸 사이비 종교 탓으로 돌리면 억울하고 분하기만 할 거다.
하지만 그걸 비틀어서, 세상의 구 원을 위해서라고 바꾸면?
고통스럽긴 해도 대의를 위해 희 생한다는 느낌 덕에 작게나마 위안 을 얻게 되겠지.
'믿지 않는다곤 말해도 내심 속으 론 약간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을지 도 몰라.'
그러니 이찬송이 죽은 줄 알고서
이렇게 충격받은 모습을 보이는 걸 거다.
"죽진 않았을 거예요."
내가 아는 한 그는 멀쩡히 살아서 교도소에 수감됐으니까.
당장 바닥에 쓰러져 있으니 죽은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정말 끝인가 봐."
류라임은 무척 생경한 것을 보듯 그들의 전투를 내려다봤다.
그래. 새하나교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빌어먹을 곳이 망하면 마음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류라임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 다.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눈물이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야."
그럴 수밖에.
이건 새하나교의 몰락이지만, 동시 에 류라임이 새하나교에 쏟았던 시 간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기도 했 다.
마냥 시원한 마음만 있진 않겠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모 르겠어."
"류라임 씨."
"나가봤자 거기도 여기랑 다를 바 없을 거야. 그럴 바엔……
"류라임 씨!"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류라임의 어 깨를 붙잡았다.
내가 제대로 보이지 않은 탓일까?
이전의 류라임은 악착같이 하위 헌터로 살아남아 끝내 13부대에까 지 자원하지 않았던가.
그 목표가 사라져서 그런지 밖에
나가는 걸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거 놔!"
타악!
류라임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내가 뭔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모 양이다.
"알겠어요. 좀 진정……
"너도 이놈들이랑 한패잖아. 이제 와서 가식 떨지 마."
"아니, 전……
"왜. 여기가 망할 것 같으니까 어 떻게든 노선을 틀어보고 싶어? 안 됐지만, 나도 그렇게 호구는 아니거 든 "
류라임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가위 를 내게 겨눴다.
노인의 핏자국이 배어 있어 겉보 기엔 꽤나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헌터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은 류라임이 날 무력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류라임이 내민 가위 날을 한 손으로 잡으며 대화를 시도했다.
"우선 진정하고 이 가위는 바닥에 내려놓으시죠."
"이거 놓으라고!"
촤악!
가위의 날이 손바닥을 할퀴면서 긴 상혼을 남겼다.
핏줄기가 손가락을 타고 바닥에 똑, 똑 떨어졌다.
'곤란한데.'
류라임이 너무 흥분해 있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에게 난 새하나 교의 일원처럼 보일 테고.
내 말을 들을 생각조차 않는 것 같았다.
'베아트리스는 대체 뭘 원하는 거 지?'
점점 이야기가 실제와는 다르게 흐르고 있지 않은가. 이것도 베아트 리스의 장난 중 하나인건가.
-그 여자는 지금 베아트리스 님께 서 가지고 놀고 계시거든. 한번 장 난감을 가지면 망가질 때까지 갖고 놀아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라. 얼 마나 걸릴진 나도 잘 모르겠는걸.
권성민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 쳤다. '망가질 때'까지라고 했지.
이것도 류라임을 망가뜨리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류라임의 정신적 버팀목은 거의 나였으니까.'
그런 내 존재를 지워 버린 뒤 류 라임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지켜보 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하지.'
류라임에게 삶의 이유를 만들어주 면 된다.
그게 구원이 아닐지라도.
"류라임 씨. 함께 바깥으로 나가 죠."
"너나 나가! 무슨 수작이야? 난 바깥도 싫어. 지겹고, 끔찍해."
잘은 모르지만 새하나교에 들어오 기 전에도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오랜 시간 이 안에 갇혀 지내면서 바깥에 대한 막연한 두려 움이 더욱 극대화됐을 거다.
'새하나교도 죽도록 싫지만, 이 바 깥엔 어떤 고통이 있을지 가늠조차할 수 없으니 차라리 이곳이 낫다.
뭐 그런 생각의 흐름인 거지.'
상습적인 폭행의 피해자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패턴이다.
"그럼 이대로 여기에 남을 건가 요'?"
"……그럴 거야."
말도 안 되는 억지다.
"그래. 차라리 이 사이비 놈들이랑 같이 파묻혀 죽을 거라고『"류라임 씨! 진정하세요. 진정
류라임이 가위를 이리저리 휘둘렀
다. 숙련되지 못한 자가 저렇게 휘 두르다 스스로 다치는 경우도 많았 다.
나는 빠르게 류라임의 손에서 가 위를 빼앗았다.
무기를 빼앗기자 류라임이 더 매 섭게 굴었다.
"이리 내놔! 놔! 내놓으라고!"
류라임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가위를 번쩍 위로 들어 류라임의 손에 닿지 않게 애 를 썼다.
'그냥 말로 해선 들을 것 같지도
않네.'
평범한 방식으로 류라임을 끌어내 긴 어려울 것 같았다.
말로 타일러서 함께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법이다.
철컥.
나는 가위를 들지 않은 다른 손으 로 노이트를 쥐고 류라임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찢어진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핏물 이 노이트를 적시니 꽤 살벌한 광 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류라임이 날카롭게 헛웃음을 지었 다.
"너도 저놈들하고 한패니까. 날 죽 여서 입막음하려는 거잖아."
"그렇다면요?"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말조심해요. 정말 죽고 싶지 않으 면."
노이트를 겨눈 채 가위를 저 뒤편 으로 던졌다. 의외로 위협이 먹히는 지, 류라임은 내 말에 순순히 따르 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류라임이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 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 죽일 거야?"
"죽일 거냐고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미 다 죽었어요."
"......뭐?"
"내가, 다, 죽였다고요."
류라임은 내가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과한 흥분으로 정신
상태가 오락가락했다.
내게 호의를 보였다가, 갑자기 가 위를 들고 위협하질 않나.
이제 와선 내가 다른 실험체들도 죽인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지 않 은가.
"웃기지 마……. 넌 나랑 같이 움 직였잖아!"
"당신을 만나기 전에 다 죽였어요. 마지막으로 당신을 처리하려고 들 어간 거였는데. 그 영감을 죽이고 있길래 구경 좀 했죠."
"거짓말하지 마!"
맞다. 거짓말이다.
애초에 여기에서 류라임과 그 노 인 외에 다른 이는 본 적도 없었으 니까.
그러나 이게 현실인 줄 아는 류라 임은 그런 공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거다.
"다…… 죽었다고? 전부?"
류라임의 흔들리는 동공이 내게 향했다. 총구에 뭍은 핏자국에도 시 선이 닿았다.
"네. 이제 당신까지 죽이면 새하나 교의 비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
무도 없게 되겠죠."
"날 죽여도, 저기서 싸우는 헌터들 은 못 이길걸?"
류라임이 창밖을 가리키며 항변했 다.
그 헌터가 나 자신이긴 하지만 우 선은 장단을 맞춰준다.
"걱정 마요. 여기엔 자폭 버튼이 있거든요. 그걸 누르면 저 헌터들도 흙더미와 함께 영영 묻혀버릴 거고 요."
새하나교 정도면 자폭 버튼 하나 쯤 준비해둘 법도 하다 여겼는지 류라임은 의심의 기색 없이 진지한얼굴을 했다.
"영영 여기 남겠다더니. 소원대로 해주겠다는데 얼굴이 왜 그래요?"
물론 그녀도 현실 도피성으로 내 뱉은 말이지 진심은 아니었으리라.
설령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이렇듯 남에게 강제로 떠밀리고 싶진 않았 겠지.
"굳이 내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 죠."
탕! 털썩!
"으으으윽!"
총알이 류라임의 종아리에 박혔다.
자연히 그녀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저벅, 저벅.
나는 류라임의 코앞에 서서, 그녀 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대화를 나눴 다.
"잘 있어요. 류라임 씨. 이제 다신 못 보겠지만."
"……잠깐만."
턱.
류라임이 바닥을 기어 내 발목을 잡았다.
올려다보는 눈빛은 더 이상 후회
나 혼란이 아니라,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 이름이 뭐야."
"알아서 뭐 하게."
"불공평하잖아. 난 당신 이름도 모 른다는 게."
나는 한쪽 입꼬리를 얄밉게 말아 올렸다.
"한서하."
내 이름을 말해주자 류라임은 아 드득 이를 갈며 한 번 더 중얼거렸 다.
"한서하. 기억할게."
나는 대꾸도 없이 류라임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스윽, 스윽.
류라임은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면 서 한 번 더 내게 외쳤다.
"두고 봐! 내가 꼭 여길 살아나가 서, 당신한테 복수할 테니까!"
아득바득 외치는 목소리엔 생존을 위한 투쟁심이 서려 있었다.
"꼭! 살아 나가서……!"
나는 류라임에게 보이지 않게 뒤 돌아서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 다.
"널 죽여버릴 거라고!"
비록 좋은 그림은 아니지만. 류라 임에게 강렬한 삶의 의지를 심어주 는 덴 성공했으니까.
"내가 이런다고 죽을 것 같……!"
그런데 그때 류라임의 처절한 외 침이 갑작스레 끊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게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주 변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오싹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퍼뜩 뒤돌았다.
"안녕!"
일전에 몰래 훔쳐본 적 있는 인물 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일시정지를 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류라임 앞에 말이다.
양옆으로 솟은 뿔을 따라 머리카 락이 돌돌 말려 있었다.
화려한 보라색 머리칼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자아 이였다.
고풍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 며 베아트리스가 등장했다.
"내 놀이터에 무단으로 난입한 불 청객이, 너구나?"
상큼하게 미소 짓는 것과 달리 말 에는 뼈가 있었다.
"권성민을 통해 정당하게 들어온 거지."
"아, 그래. 그 귀염둥이에게 줬던 내 선물이 고장 난 것 같더라니. 그것도 네가 한 짓이야?"
베아트리스는 제 뒤에 있는 류라 임을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내 장난감도 재미없어졌잖아."
"류라임이 삶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나 보지."
"너만 아니었으면 이 안에서 자살 했을 텐데."
역시나.
베아트리스가 원했던 게 바로 그 거였다.
류라임이 낙담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악역을 자처하면서까지 이 애에 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은 이유가 뭐야?"
나는 베아트리스의 질문에 대답하 는 대신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류라임을 돌려줘."
나는 류라임이 더 망가지기 전에 이곳에서 꺼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