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챕터: 과거의 편린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하얀색투 성이다. 긴 복도 양옆으로 문들이 빼곡하게 늘어져 있었다.
앞뒤가 제대로 분간되지 않을 정 도로 삭막하고 텅 비어 있었다.
'왜 새하나교 본부로 온 거지? 난
분명 베아트리스에게 가려고……
아. 그렇지.
그 베아트리스의 주특기가 바로 인간의 정신력을 시험해보는 거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류라임에게 이 새하나교 는…… 잊고 싶은 과거 그 자체일 것이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 안 어딘가에 류라임이 있을 거 다. 베아트리스의 손아귀 안에서 잔 뜩 놀아나면서 말이다.
제일 가까이 있는 곳의 문을 열어
보니 휑한 기운만 가득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문을 열다간 끝 이 없을 거다.
'공간 간섭!'
지그시 눈을 감고 스킬을 발동했 다.
그러자 새하나교의 내부 구조가 빼곡하게 머릿속에 들어찼다.
'어? 저곳은……
그러다 문득 내가 익히 아는 곳을 찾아냈다.
복도 끝 문 너머에 다른 방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 느껴졌다.
드높은 천장에 널찍한 홀 모양이 었는데, 바닥에 세밀하게 새겨진 마 법진까지 느껴졌다.
'그곳이야.'
내가 최후에 이찬송과 맞섰던 곳 말이다.
헌터들을 이용해 만든 키메라를 각 끄트머리에 두고, 그들을 모조리 이찬송이 흡수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괴물이 됐었지.
'지금이 어느 시점이지? 류라임의 기억 속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홀 쪽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신도들까지는 재현되지 않은 모양이지.
스윽.
문을 조심스럽게 밀자 문틈으로 홀 안이 살짝 보였다.
'뭐야, 이게.'
내부는 깨끗하고 아무도 없었다. 마치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인 것 처럼.
그러니 새하나교의 마지막 날보다 조금 앞선 시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허공에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노이즈? 이건 꼭, 화면에 오류가 난 것 같잖아.'
허공에 마치 로딩에 실패한 것처 럼 뭉개진 형상이 보였다.
본래 뭐였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 로 엉망이었다.
'류라임의 기억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닌가? 왜 여기만 이렇게 되어 있지?'
복도나 다른 방은 마치 실제인 것 처럼 선명했는데.
'아니면 오히려 류라임의 기억이기 때문에 여기만 텅 빈 건가.'
이 안에서 벌어진 일을 아는 사람 은 많지 않다.
전투에 참여했던 인원이 워낙 소 수니까.
그러니 류라임에게 이 방 안이 공 백으로 남아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내가 한참 이 방에서 싸 우던 시점의 새하나교일 가능성이높단 소린데..
그런 것치곤 내부가 너무 조용하 다.
이 위에서도 혜원 언니와 이운우 가 내려오고 있었으니 이렇게 조용 할 리가 없는데.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잖아.'
내가 내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으니. 하얀 성 안에 나 흘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적막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그때 였다.
"으아아아아으T!"
저 복도 끝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 다.
류라임의 목소리는 아니고 웬 노 인의 것처럼 들렸다.
"그만, 그마아안! 살려줘!"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갔다. 나는 천천히 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뭐, 뭐든 줄게! 원하는 게 뭐야! 마, 말만 하라고. 웅? 이 교주도 죽 었으니 이제 여긴 내 거야! 워, 원 하면 전부 네게 주마……아아아 악!"
교주라. 이찬송을 아는 자인가.
얘길 듣다 보니 누군지 알 것 같 았다.
마지막에 거하게 뒤통수를 쳤던 그 노인 말이다!
마법진을 발동시켜 안유수를 죽음 으로 몰아갔던 그 빌어먹을 자식!
내 손으로 마무리 짓지 못했던 게 천추의 한이었는데.
'잠깐. 그러고 보니 그 노인의 최 후는……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목소리는 이 앞에 있는 방에서 새 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문 바로옆에 서서 잠시 고민했다.
이 문 안에 있을 인물이 어렴풋이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우드득! 우득!
"으……으으으윽! 이 배은망덕한 것! 결국 세상을 구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던 주제에 감히 나한테……!"
콰득!
"아아아아악!"
"음〜. 한 번 더 해봐."
맑게 울리는 둣한 목소리.
티 없이 맑고 청량한 음성은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솔? 아니, 라 정도인가? 잘 모르 겠네. 한 번 더 앵콜!"
우드득!
"아아아악!"
"솔 샵? 너무 헷갈리잖아."
"미쳤어! 너, 넌 제정신이 아니라 고!"
노인이 악에 받쳐 소리 지르자 류 라임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뭘 새삼스럽게. 당신도 이 제정신 이 아닌 종교를 믿었잖아."
"건방지게 누굴 사이비로 모는 게
냐! 교주님은 진정 세상을 구하고 너흴 구원으로 이끄실…… 아아 악!"
"으홈홈〜."
작게 콧노래를 부르는 게 꽤나 신 명나 보였다.
'류라임이다. 분명해.'
부정의 여지가 없었다. 목소리부터 저 행동까지.
내 앞에선 조심하고 있다곤 해도 천성적으로 류라임은 위험한 구석 이 있지 않던가.
'이건 류라임의 기억? 아니면 상황
만 재현한 건가?'
그게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류라임은 분명 이전에 이렇게 말 했다.
-그 사람이었어요. 늘 높은 곳에 서 절 내려다보던. 그 노인이, 반쯤 죽어가는 모습으로 저한테 살려달 라고 빌더라니까요?
-그러면서 제 눈앞에서 서서히 죽 어갔죠.
그래! 류라임은 내게, 자신은 그저
죽어가는 노인을 바라만 봤다고 했 단 말이다.
'류라임이 거짓말을 했던 건가?'
아니면 류라임이 그때 노인을 마 음껏 고문하지 못한 게 아쉬워 뒤 늦게 한을 풀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고 친다면 베아트리스 는 대체 류라임을 이 상황 속에 밀 어 넣고 뭘 보고 싶었던 거란 말인 가.
"아, 그렇지! 그 잘난 교주님 얼굴 좀 보러 갈까?"
"허억, 헉. 그, 그분은……
노인이 기겁해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이미 이찬송의 최후를 봤으 니 그럴 만도 했다.
"하핫! 이 몰골을 누가 보면 정말 재밌……
류라임은 노인의 한쪽 발목을 붙 잡고 질질 끌고 나오다가 나와 눈 이 마주쳤다.
문 바로 옆에 서 있던 탓이다.
'날 알아볼까?'
여기서 날 알아보면 기억이 그대 로인 류라임일 것이고.
아니면 과거의 류라임이 그대로
재현된 것일 테다.
류라임은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넌 또 뭐야."
과거의 류라임이군.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연구원? 처음 보는데. 어떻게 여 기까지 온 거지?"
나한테 반말하는 류라임, 의심하는 류라임 둘 다 처음이라 무척 곤혹 스러웠다.
"류라임 씨."
"날 알아?"
"……대충은요."
"그게 뭐야."
말 그대로 대충이었다.
회귀 전 연쇄 살인마 류라임이나 날 보며 꼬리를 흔드는 류라임은 알아도.
과거의 류라임은 처음 봤으니까.
늘 아래로 묶은 양 갈래 머리가 잔뜩 풀어 헤쳐져 엉망이었다.
제멋대로 잘린 단발에 손에 든 건 날카로운 가위였다.
늘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신경질 적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상냥한 빛으로 가득 찼던 눈동자엔 적의가 가득했다.
"너도 이 사이비 끄나풀이지? 방 해하지 말고 비켜. 죽기 싫으면."
"허억…… 으으으으."
노인의 발목을 쥔 채로 질질 끌자 그가 고통에 어린 신음을 흘렸다.
아까 살벌하게 울린 소리들이 진 짜라는 걸 증명하듯 노인의 얼굴과 팔뚝이 엉망이었다.
"왜 진작 이렇게 안 했나 몰라."
퉤. 류라임은 바닥에 핏물 섞인 침 을 뱉어냈다.
"보아하니 여기도 곧 망할 거 같 은데. 당신도 알아서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어딜 가는 겁니까."
나한텐 도망치라고 하면서 류라임 은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 었다.
"같이 도망치죠."
" 내가?"
내 제안에 류라임이 헛웃음을 지 었다.
" 나가면?"
" 예'?"
"알 거 아냐. 난 밖에 아무 연고도 없다고. 그런데 여길 나가면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진창을 구를 게 뻔한데."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인 대답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류라임이 원래 이 정도로 현실 감 각이 있던가?
그리고 류라임을 따라 걷자 삭막 하기만 했던 주변이 변하는 게 느 껴졌다.
쿵쿵쿵.
뭔지 모를 소음과 진동이 잔뜩 울
려 퍼졌다.
류라임이 없는 곳에 있을 때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던 것과는 대 조적이 었다.
'류라임이 기억하는 곳이라 그런 건가.'
그러면 진짜 과거의 류라임도 이 노인을 이렇게 폭행하고 질질 끌어 여기까지 왔단 말인데…….
'좀 이상한걸. 그렇다면 내려오면 서 혜원 언니가 먼저 류라임을 발 견했을 텐데.'
혜원 언니 성격에 류라임을 발견 하고 그냥 내버려둘 리도 없는데말이다.
"당신. 계속 따라올 거야?"
"네?"
퍼뜩 정신을 차리자 류라임이 이 상하다는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살고 싶으면 도망쳐야 한다니까. 이상한 사람이네."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어차피 다 여기서 죽을 것 같은 데, 못할 것도 없지. 당신은 연구원 도 아닌 것 같고."
콰
류라임이 주저 없는 손놀림으로
노인의 손가락을 들어 꾹꾹 벽을 눌렀다.
의아함도 잠시. 벽이 쩍 갈라지더 니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수 있을 만한 복도가 드러났다.
" 따라와."
휙, 퍽!
류라임은 노인을 대충 바닥에 던 져 놓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 다.
'이래서 혜원 언니랑 마주치지 않 은 거구나.'
작은 깨달음과 함께 나는 류라임
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죠?"
"연구원들이 드나들던 곳. 이 홀에 서 실험을 하면, 아까 그 노인이 여기서 흘을 내려다보곤 했거든."
담담하게 말하곤 있지만 류라임에 게도 좋은 기억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이곳에 올라와 있지만 저 밑에서 실험당하던 것이 원래 누구 였을진 말하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교주를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습 니까."
"교주를 보려고 여기 온 거지. 기
다려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 올라가 꼭대기에 도달하니, 투명한 유리를 통해 홀 안쪽이 들여다보였다"저 안쪽에선 여기가 안 보일 거 거든. 근데 교주는 어디가고 웬 처 음 보는 사람들이……
류라임이 중얼거리는 말에 나도 홀 안을 살펴봤지만 내게 제대로 보이는 건 없었다.
'왜지? 지금까진 다 보였는데.'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과 별 개로 류라임은 거의 홀 안으로 빠 져 들어갈 것처럼 가까이 붙었다.
"어..?"
류라임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왜 저 사람은...... 얼굴이 안 보이지?"
"뭐가 보이긴 해요? 나한텐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눈 없어? 저기, 웬 똑같이 생긴 둘이랑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는 여자 하나가 맞붙고 있잖아!"
똑같이 생긴 둘이라면 안유수, 안 유라 쌍둥이일 테고.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는 여자라
고 하면…….
' 나?'
저곳에 있을 법한 사람은 나뿐인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