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하......
권성민이 흉흉한 눈빛으로 날 올 려다본다.
"넌 끝까지 그렇게 고고하네."
비아냥거림이 잔뜩 섞인 어조였다.
"넌 처음부터 그렇게 잘났으니, 앞 으로도 그렇겠지. 너무 불공평하다
니까?"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난 내 영혼까지 팔아가면서 발버 등 쳤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은 얼 굴로 날 뛰어넘어버리잖아!"
그는 반쯤 울부짖고 있었다. 뿔의 단면에서부터 흘러내린 핏줄기가 그의 이마를 따라 뺨까지 흘러내렸 다.
그 탓인지 권성민이 피눈물을 흘 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나 도, 나도 그냥 너처럼…… 너처럼 되고 싶었던 것뿐인데……. 네 옆에
서고 싶었을 뿐이라고."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넌 너무 선을 넘었어."
그런 투정 따위로 정당화될 수 있 는 일이 아니었다.
권성민이 관여했던 새하나교 사건 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고, 그가 톨룩에 협력하면서 간접적인 피해자들이 또 발생했으니까.
"강해지고 싶었다면 네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했어야지."
결국 권성민의 발목을 잡은 것도 그것이었다.
마력만 남에게서 빌려올 뿐이니 간단한 기척조차 읽을 수 없었지.
여기에 권성민이 아니라 이그니스 가 있었더라면 카멜롯에게 속는 일 따위 없었을 거다.
"말은 쉽지. 나처럼 재능도 뭣도 없는 자식이 널 따라잡으려면 얼마 나 걸릴까. 응? 10년? 20년? 그 뒤 에도 넌 나보다 훨씬 앞서있을걸?"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는 모습이 꽤나 살벌하다.
"내가 이런 수단 말고 너와 대등 하게 싸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 었을까? 내 잘못이 뭔데. 주제넘게
욕심을 낸 거?"
목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는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었다.
"재능이 없으면 욕심도 버리란 거 냐고! 그냥 평생 그렇게, 남의 뒤꽁 무니만 보면서 사는 게 내 운명이 라고 체념해야 했을까?"
"네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킨 게 문제야."
"말했잖아. 다른 방법으론 절대 널 따라잡을 수 없었을 거라고."
권성민은 확신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야."
대체 이자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 같은 자식한텐 정당한 기회조 차 없는 이 세상이 잘못된 거지."
그는 마지막 변론이라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나도 너처럼 타고난 재능이 많았 으면 이렇게까진 안 했을 거야."
더 이상 들어줄 이유도 없었다. 권 성민의 되지도 않는 변명을 듣고 있는 이 시간이 더 아까웠다.
"문이나 열어."
나는 내 동료를 구하러 가야 했으 니까.
그는 냉담한 내 눈빛과 마주하고 는 무언가 체감한 듯 기세가 한풀 꺾였다.
"……결국 내 발버둥도, 네 인생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배경에 불과했네."
작게 중얼거리더니 자조적으로 웃 었다.
"하하. 하. 빌어먹을 세상이라니 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
던 것도 잠시.
나는 어쩐지 기분이 좀 묘해졌다.
'박노아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그는 성좌에게 따져 물은 적이 있 지 않은가.
왜 다른 헌터에겐 내게 했던 것처 럼 너그럽지 못했냐고. 우리에게 주 어진 역할이 엑스트라였기 때문에 그런 거냐고.
그 말이 권성민의 것과 겹쳐 들린 이유는 뭐였을까.
어쩌면 정말로 이 세상은 내게 유 난히 더 친절한 게 아닐까.
나도 모르는 구석에서 남들에게 가혹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쳤 다.
'그렇다 하더라도 권성민이 저지른 짓은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어쩐지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건 어 쩔 수 없었다.
"……내 손을 잡아."
" 뭐?"
"베아트리스 님께 인도해주지. 난 그분의 심복. 언제든지 그분께 가는 문을 열 수 있어. 내 손을 잡으면
너도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는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모 습이 었다.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불현듯 뭔 갈 깨달은 것 같기도 했다.
혹여나 이것도 뭔가 함정은 아닐 까 싶어 그를 빤히 바라보자 다시 입을 연다.
"못 믿겠으면 말고. 지금 이 순간 도 베아트리스 님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지만 말이지."
이미 뿔도 부러진 권성민이 다른 함정을 팔 수 있으리라 생각되진않았다.
설령 함정이라 할지라도 류라임을 구하기 위해선 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카멜롯 씨.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잘 감시해주세요."
내 말에 카멜롯이 고개를 끄덕였 다.
그는 어느새 내 모습에서 다른 이 의 모습으로 얼굴을 바꾼 채였다.
탁.
나는 권성민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한 손으론 여전히 노이트를 겨눈
채였지만, 악수를 하니 뭔가 느낌이 새로웠다.
권성민도 그걸 느꼈는지 눈을 동 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사르르 녹아내리듯 미소 짓는다.
"이제야…… 나도 네 옆에 선 것 같네."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끝으로 나 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 은 느낌을 받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시야가 깜깜하 게 바뀌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지끈 지끈 울리는 두통이 잦아들었을 때.
정신을 차리자 나는 완전히 새로 운 공간에 서 있었다.
아니. 낯선 곳은 아니었다.
전에 와본 적 있는 데였다. 딱 한 번뿐이지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 다.
"……새하나교의 본부."
바로 그곳이었다.
* * *
투둑. 툭.
빗방울이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이리저리 뛰놀았다.
그에 따라 이그니스의 고통도 몇 배나 커졌다.
"아파, 아파, 아파아아아!"
그는 이런 고통이 너무 생경했기 때문에 더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전투를 사랑하는 그였지만 정작 그를 상처입힐 수 있는 이는 몇 없 었던 탓이다.
슈우우욱!
화르륵!
"아프다니까아아!"
표연원의 나무 넝쿨이 이그니스를 둘러싸자 그가 화를 내며 불꽃을 피워냈다.
하지만 성수에 젖은 탓인지 처음 같은 위력은 내지 못했다.
그 탓에 이그니스는 사지가 넝쿨 로 꽁꽁 묶여서 이리저리 버둥댔다.
"이이이익!"
힘으로 뜯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공격 이 들어왔다.
후우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
친다.
신도아가 허공에서부터 미끄러지 듯이 하강한다. 유려한 곡선에 감탄 할 새도 없이 날카로운 발톱이 이 그니스의 살결을 할퀴었다.
화르륵!
상처를 치유하려는 불꽃과 회복을 지연시키는 성수가 서로 달음박질 을 하다가, 결국 불꽃이 승리한다.
동시에 이그니스도 넝쿨을 뜯어내 고 신도아의 어깻죽지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휘익! 슉!
그러나 그 앞을 가로막는 나무줄 기에 이그니스는 헛손질만 하고 말 았다.
"아프게 하고, 짜증 나게 도망이나 치고! 언제까지 이럴 거냐고!"
이그니스도 당장 통증이 극심할 뿐 상처가 심한 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수복되는 불꽃이었 고, 성수가 함유된 비는 신경에 거 슬릴 뿐 그 불을 꺼트릴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이 끝도 없는 술래잡기가 지겨워 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베아트리스의 장난감한테 넘기지 말고 그 녀석을 내가 상대할 걸 그랬어! 그게 훨씬 재밌었을 텐데."
이그니스가 툴툴거리는 것과 반대 로 표연원 쪽은 상황이 녹록지가 않았다.
"허억."... 허억
경진아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창백한 얼굴로 한 번 더 허리춤을 손으로 더듬는다.
그러다 만져지는 게 없다는 걸 깨 닫자 와락 얼굴을 구겼다.
"마력, 포션이, 다 떨어졌어."
"......나도."
표연원도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 로 대꾸했다.
둘 주변으로 다 쓴 마력 포션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어?"
"……길어야 15분 정도."
지금까지 이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전부 경진아가 성수 비를 뿌려 줬기 때문이다.
성수 양 자체가 많지 않아도 그 고통으로 정신을 빼놓으면 표연원이나 신도아가 공격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번 것이다.
그런데 성수 비도 멈춘다면 승기 는 대번에 기울 것이 뻔했다.
"저분도 체력적으로 한계일 거야."
신도아도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 만 서서히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정말 모두에게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나는 이럴 때도 아무것도 못 하고...
원우태가 자책하는 말을 내뱉으며 낙담했다.
어쌔신에 가까운 포지션인 그는 신도아처럼 기동성이 월등하지도 않고 표연원이나 경진아처럼 원거 리에서 보조할 수도 없는 터라 속 만 썩이고 있었다.
"우태 네가 상황을 전반적으로 읽 어준 덕에 지금까지 버틴 거야. 그 런 소리 하지 마."
"연원아. 아직도 소환하기 어려울 것 같아?"
원우태의 물음에 표연원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소환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 사실 이전의 경우들도
내가 소환했다기보단, 드라이어드가 스스로 나온 쪽에 가깝고."
"뭔가 다른 수를 찾아야 하는 데……
표연원은 가만히 제 손등을 내려 다보았다.
은은한 연두색 빛을 내뿜는 문양 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이미 마력도 한계야. 이제 와선 정말로 드라이어드가 나오고 싶다 해도 못 나올지도 몰라.'
기본적으로 그 통로를 여는 것은 계약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마력이 고갈된 것뿐만 아 니라 수십 번 마력 포션을 사용해 마력 통로도 상당히 무리한 상태였 다.
마력을 쓸 때마다 가슴께에서 쓰 라린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럴 때, 서하 누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가 아는 한서하라면 어떻게든 다른 방도를 찾아냈을 텐데.
그러자 문득 이전에 그녀와 나눴 던 대화가 떠올랐다.
-잘은 모르겠지만. 결국 네가 계 약한 것도 숲의 '정령'이지 숲이 아 니잖아?
- 그렇죠.
-그러니 네가 소환하는 그 필드도 진짜 숲이라기보단 숲의 정령이 내 린 권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 말을 듣고 불에 타지 않는 나 무 넝쿨을 소환하려고 수백 수천 번 시도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이건 불가능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접은 지 좀 됐는데.
갑자기 이 대화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표연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번 더 해보자.'
그가 지그시 눈을 감자, 익숙한 감 각이 찾아왔다.
이번엔 어디에 나무 넝쿨을 만들 지보단 소환체 그 자체에 집중했다.
'생김새만 넝쿨이지 진짜 식물인 게 아니니까.'
이그니스를 상대하면서 넝쿨이 불 에 타는 감각은 충분히 느꼈다.
그러니 그걸 오히려 이용하면…… 화염에 내성이 있는 넝쿨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내성이 아니야.'
정령은 늘 주변에 존재하지만 계 약자가 아닌 이상 아무도 그들에게 닿지 못하지 않던가.
막연히 떠올렸던 것들이 이그니스 와 싸우면서 더욱 명확해졌다.
이그니스의 불꽃은 뜨겁게 타오르 지만 마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비가 내리는 이 환경에서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표연원은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 는 생경한 감각을 맛봤다.
누군가 그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 처럼, 표연원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누군가 그를 포근하게 감싸는 것 같기도 했다.
낯선 길을 따라 걷자 익숙한 길이 나왔다.
'드라이어드의 방식이야.'
드라이어드가 현실로 튀어나와 능 력을 쓸 때면 표연원의 마력 통로 를 빌리곤 했다.
그때 느낀 적 있었다.
'정령'을 다루는 느낌 말이다!
슈우우욱!
"윽! 뭐야!"
신도아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빠르게 따라붙을 이그니스를 생각 하며 뻐근한 날갯죽지를 다시 펼치 려는데.
뒤에서 치솟아야 할 열기가 느껴 지지 않았다.
신도아가 의아해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식물 줄기가 이그니스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이그니스가 분에 못 이겨 불꽃을 뿜어댔지만 식물 넝쿨은 꿈쩍도 하 질 않았다.
오히려 그 푸른 빛을 자랑하듯 더 욱 꼿꼿하게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