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쿠구구구궁!
콰아앙!
눈 먼 돌조각이 뺨을 스치며 생채 기를 냈다. 나는 손등으로 스윽 그 것을 훑어냈다.
"이제 더 이상 평범하던 내가 아 니라고! 봐! 이 넘쳐나는 힘을!"
파바바박
흩뿌려지는 마력은 그 존재만으로 도 위협적이었다.
특별한 기교 없이 마력을 응축해 서 사방에 발산하는 것뿐인데도. 어 지간한 마법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 을 냈다.
"하하하하! 하하하!"
미친 듯이 웃는 권성민의 머리 위 에 돋은 뿔이 웅웅 울리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끝없는 우물에 서 마력을 퍼 올리는 것만 같았다.
'이게 마왕의 힘인가? 지칠 법도
한데, 마력이 아직도 넘쳐나잖아.'
마왕의 힘을 끌어다 쓰는 권성민 과 정면 승부를 했다간 나만 큰코 다칠 게 뻔한데!
권성민이 끌어다 쓰는 힘도 한계 가 있을 거라 생각해 제풀에 지치 게 만들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기미가 보이질 않았 다.
철컥.
탕, 탕탕! 탕!
"소용없어!"
후우욱!
권성민이 마력을 두텁게 깔아 방 어막을 만들자 총알이 궤도를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기고만장하던 기세는 어디 갔지? 한서하."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저 뿔만 어떻게 하면 되는데. 접 근 자체가 어려워.'
섣불리 다가갔다가 일격이라도 허 용하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치직, 치직!
그때 먹통이던 무전기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상부에서 다른 지시가 내려온 건 가?'
나는 빼뒀던 인이어를 귀에 끼면 서 다시 한번 빙글, 허공을 돌았다.
콰아아앙!
내가 서 있던 곳이 반파되는 걸 보면서 눈을 감고 공간 간섭을 썼 다.
탓.
권성민의 뒤편에서 다시금 총을 겨눈다.
'특수 탄환을 쓸까? 아니…… 지금 은 아니야.'
몇 발 남지 않았으니 좀 더 결정 적인 순간에 쓰게 아껴둬야 했다.
탕탕! 탕!
위협사격에 권성민은 다시 마력을 펼쳐 방어막을 세웠다.
그 잠깐의 틈을 타고 인이어에서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한서하 헌터. 들립니까?
"들립니다. 소속과 이름은?"
상부에서 보내는 신호는 아닌 것 같았다.
-홍염. 전청운입니다.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가 상황 을 설명했다.
-국제 연합 소속 헌터들과 동행 중. 13부대의 정로운 헌터 합류 완 료. 3분 뒤 도착 예정입니다.
"잠시만요. 이 싸움엔 저만 참가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까?
".류라임 헌터가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이길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콰과과과광!
다시금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가까
스로 피해냈지만 시간 벌기가 고작 이었다.
-여기가 뚫리면 일반 시민들이 위 험합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끝을 봐야 합니다.
"……알아요."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해야 합니 다.
" 안다고요."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탕, 탕탕! 탕!
노이트를 연사하면서도 속에서 울 분이 치밀었다.
이대로 정말 권성민을 잡고 류라 임을 포기하는 게 맞는 건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때 전청운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내가 도와줄까? 누나.
"……누구십니까."
-내 목소리도 잊었어? 이거 섭섭 하네〜.
대체 누구지? 국제연합에 내가 알 만한 사람은 딱히 없을 텐데.
-내 머리에 총도 겨눌 정도로 화 끈한 사이였잖아, 우리.
총을?
' 아!'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 있 었다.
-절 믿으면, 받아줘요.
-내 변신술을 알아차린 사람이 당 신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 로 확인할 줄이야.
검은 화산 게이트에서 나온 직후. 내게 혜원 언니 모습을 하고 나타 났던 사내.
아늑한 바람을 이용해 진짜 혜원 언니가 맞는지 확인한 바 있었다.
변신술의 귀재.
그 뛰어난 능력 때문에 도리어 국 적을 잃은 떠돌이.
만국의 스파이, 카멜롯. 그 남자였 다.
"카멜못?"
-이제야 기억났나 보네.
국제 연합이 카멜롯을 이용해 내 뒤를 캐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여기 까지 카멜롯을 파견했단 말인가?
"하지만 당신 전문은 전투가 아니
라 잠입일 텐데요!"
쿠우우웅!
-그러니 내가 필요한 거지. 그 전 투에 끼어들 수 있는 건 '한서하 헌터'뿐이니까.
"……제 흉내를 내시겠다."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선 고려해볼 법도 했다.
권성민이 속아 넘어가기만 한다면 분명 큰 방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 을 테니까.
"내 모습도 지금 따라할 수 있어 요?"
-물론이지.
언제 내 모습을 복제해둔 거냐고 따질 새도 없었다.
"총은요? 제 흉내를 낼 거면 총도 필요할 텐데."
-다른 헌터의 것을 잠시 빌려가도 록 하지.
괜찮은 계획이 떠올랐다.
카멜롯과 손발이 척척 맞아야만 가능한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인이어를 두 번 톡톡 치면 들어 갈게. 곧 도착할 거야.
"좋아요. 그럼 카멜롯 씨를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표연원 헌터 쪽으로 가주세요."
애써 다른 생각은 안 하려고 하곤 있지만 표연원이 아직까지 잘 버티 고 있을지 무척 염려스러웠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전청운의 전언을 마지막으로 연결 이 끊겼다.
쿠우웅! 쾅!
"도망치는 건 이제 그만하지 그 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후우욱!
강렬한 마력의 움직임 때문에 거 센 바람이 부는 듯했다.
휘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권성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맘껏 사방을 공격해준 덕분 에 사방이 바위 파편들로 들쑥날쑥 엉망이었다.
"도망치지 않겠다더니. 이젠 숨바 꼭질이라도 하자는 거야?"
권성민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한서하가 이리저리 솟아나 있는 돌기둥 사이로 쏙 숨어버린 탓이었 다.
권성민이 정석대로 힘을 길러온 강자였다면 한서하의 기척을 쉽게 느낄 수 있었겠지만.
그가 빌려온 건 베아트리스의 마 력이지 전투 센스가 아니었다.
덕분에 그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헤집어보며 씩씩 분 을 삼킬 뿐이었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잘 숨어보 라고!"
콰과과광!
그가 작게 손짓하자 그 앞에 있던 돌무더기에 구멍이 뻥 뚫렸다.
투두둑, 쿠웅!
중심을 잃은 돌덩이가 제풀에 쓰 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탕, 탕!
"거기구나!"
권성민이 방금 총구를 겨눴던 곳 으로 몸을 돌렸다.
탕탕!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반대편에
서 또 총성이 울렸다.
"스킬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양 인데. 나랑 달리 시간을 끌수록 마 력이 바닥나는 건 네 쪽이야!"
권성민이 몸을 돌려 마지막으로 총성이 울린 곳을 향해 마력포를 던졌다.
콰아아앙!
그러나 마력포가 훑고 지나간 자 리는 아무것도 없이 휑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틈새로 검은 머리카락 이 사르륵 지나치는 게 보였다.
'섣불리 다가가면 또 능력으로 도
망치겠지? 멀리서 쏘는 건 잘 맞지 도 않고.'
권성민은 잠깐의 고민 끝에 한 가 지 꾀를 냈다.
권성민은 품에 있던 영혼 농축액 을 꺼내들고 아주 살짝 바닥에 흘 렸다.
그 위에 자신의 핏방울을 살짝 흘 려보낸다.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꾸물꾸물 사 람의 한쪽 팔뚝 같은 것이 생겨났 다.
'가라!'
권성민이 속으로 명령하자 팔뚝은 손가락으로 일어나서 재빨리 권성 민의 그림자 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과장된 목소리로 크게 소 리 쳤다.
"거기 있구나!"
콰앙! 우웅, 콰아아아앙!
일부러 빗맞히도록 마력탄을 쏘아 대자 동시에 돌무더기가 와르르 무 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력탄은 시선 끌기용일 뿐이었다.
'지금쯤 발목을 붙잡혔겠지.'
권성민은 성큼성큼 달려갔다.
만들어진 생명체긴 하지만 그가 소환한 심복도 결국은 '생명체'였 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 공간 능력자 들에게 생명체와 함께하는 공간 이 동은 강력한 금기였다.
'왜냐하면 시전자의 정신이 망가지 기 때문이지!'
그 충격은 인간의 정신이 받아들 이기 힘든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서하도 그대로 백치가 되고 싶지 않은 이상, 발목을 붙잡혔을 때 공간 간섭을 쓰지 못하게 됐으리라!
'그냥 팔이 아니거든! 전에 썼던 족쇄와 비슷하게 한번 잡히면 다신 풀리지 않지!'
드디어.
드디어 그가 한서하를 제 손으로 꺾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는 두근거리는 심정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숨이 가쁘게 변했고, 무너진 돌무 더기를 파헤치는 손길이 점점 거칠 어 졌다.
"하하…… 잡았다."
권성민은 예상대로 그의 소환수에 게 발목을 붙잡힌 한서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반대쪽 자리가 돌무더기에 깔려 핏물이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 었다.
"잡았다. 잡았다! 숨바꼭질도 내가 이겼다고!"
달콤한 승리의 과실이 눈앞에 있 었다!
"더 반항할 건가? 아니면 순순히 내게 영혼을 넘기는 게……
퉤
권성민은 제 얼굴에 튄 침을 덤덤 하게 닦아냈다.
한쪽 다리가 깔린 한서하가 마지 막 발악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서하가 씨익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을 때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적으로 깨달 았다.
'한서하가…… 저렇게 웃었던가?'
그 생각이 시작이었다.
다음으로는 바닥을 나뒹구는 낯선
총을 봤을 때였다.
'한서하 총이 저렇게 생겼었나?'
그럴 리가.
그걸 자각하자마자 권성민은 바닥 에 누워 있는, 너무도 익숙한 얼굴 을 한 낯선 이에게 물었다.
"너 누구야."
그러자 가짜 한서하는 비틀린 미 소를 지으며 그의 뒤쪽을 턱짓했다.
권성민이 왠지 모를 불안감에 천 천히 뒤돌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노이트를 겨누고 있는 또 다른 한서하와 눈이 마주쳤다.
"안 돼……
그보다 총알이 더 빨랐다.
타아아앙!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다가오는 총알을 막으려고 권성민 도 마력으로 벽을 만들었지만 허무 하게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일반 탄환이 아닌 게 분명했다.
권성민은 차갑게 자신을 응시하는 한서하를 보며, 이건 반칙이라고 외 치려 했다.
그는 분명 '한서하와 나의 싸움'이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내 상대가 굳이 한서하 의 모습으로 변장해 있던 까닭은 눈치챘다.
그래.
그는 한서하와 1대1로 싸우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
'한서하'와 싸우겠다고 했지.
단순 변장이 아니라 한서하의 모 든 걸 똑같이 흉내 냈다면. 그건 한서하가 한 명 더 있을 뿐이지 않 은가.
두 명의 한서하와 한 명의 권성민
이 싸운 셈이었다.
푸우욱!
탄환이, 결국 권성민을 꿰뚫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아니라 그의 뿔이 었다.
"아아아아아아악!"
권성민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 다.
완전히 꺾인 한쪽 뿔이 바닥에 떨 어졌고 나머지 반쪽도 그 여파로 반쯤 부러져 있었다.
그의 전신을 충만하게 채우던 마 력의 공급이 뚝 끊겼다.
뿔의 단면에서 핏물이 주르륵 휼 러나왔다.
"아, 안 돼! 안 돼! 힘이 사라지고 있잖아!"
그는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마력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그럴 때마다 마력들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기만 했다.
"안 된다고! 제발! 베아트리스 님!"
권성민은 다시 한번 제 주인의 이 름을 울부짖었다.
"한 번만 더 제게 기회를 주세요! 제발! 한 번만 더! 제바아아알!"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류라임을 가지고 노 느라 바빠서인지, 그녀가 권성민에 게 흥미가 다해서 그런 건진 알 수 없었지만.
베아트리스는 그에게 웅답하지 않 았다.
남은 건 초라한 배신자와 그의 형 벌을 집행할 단죄자뿐이었다.
"약속대로 네 주인에게 향하는 문 을 열어. 권성민."
한서하가 그의 이마에 대고 다시 총을 겨눴다.
"지금의 너라면 일반 탄환 한 방 이면 바로 죽을 테니까. 얌전히 따 르는 게 좋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