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 신호는?"
"아직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레이트홀에서 나오는 파장이 신호 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전한 헌터 모두, 신호가 안 잡 힌단 말이지……
이운우가 낮게 중얼거리자 연구원 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설명을 덧 붙였다.
"지금 다른 연구원들이 최대한 방 법을 찾고 있습니다."
"늦어요."
이운우가 딱 잘라 대꾸했다.
"상대는 마왕입니다. 그 인원으로 다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하지만……
별 수 없지 않냐는 말을 꺼내려다 연구원은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사 내는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들 수있는 남자 아니던가.
"홍염하고 연락 닿았어요?"
이운우가 자신의 보좌관에게 물었 다.
"네. 본래 SSS급 게이트 클리어를 위해 차출됐던 국제 헌터들을 급하 게 운용할 수 있게 허가가 떨어졌 다고 합니다."
"그리고요?"
"홍염 측 길드원도 내주겠다고 합 니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 다.
뒤이어 보좌관은 홍염의 성배 지 분을 임시로 사용할 권리, 홍염과 협력 관계에 있는 다른 헌터들의 운용과 홍염 측이 미리 확보해준 전쟁 물자 제공까지 덧붙였다.
"국제 헌터들의 지휘권은요?"
"그건…… 홍염 측에서 보내온 헌 터가 담당하겠다고 합니다."
제일 핵심적인 부분은 내주지 않 는 게 참 능구렁이 같다고 해야 할 까.
그러나 이운우로서는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 신호도 닿지 않는 저 안에 한서하가 들어가 있었으니까.
"당장 만나자고 하죠. 시간이 없으 니, 국제 헌터들 리스트와 어떻게 운용할지 의견을 미리 들어야……
"그게…… 아까부터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미 찾아오셨습니다."
보좌관의 말에 이운우가 번쩍 고 개를 들었다.
"전청운 헌터께서 기다리고 계십 니다."
익숙한 이름에 이운우는 저도 모 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윤강백이 어쩐 일로 홍염의 도련 님을 내어주었는지.
배려인지. 아님 엿 먹이겠단 건지.
하필이면 그 사내가 찾아오다니. 지독한 우연이었다.
이운우는 전청운이 기다리고 있을 문 쪽을 잠시 응시했다.
"……웅접실에 있습니까?"
" 예."
"제가 가보죠."
저벅, 저벅.
웅접실까지 가는 복도가 그리 길
지 않았는데도 별생각이 다 들었다.
전청운.
홍염으로 넘어간 전서호의 조카.
푸른 불꽃을 지닌 귀공자라, 모두 들 전청운이 전서호의 뒤를 이어 청사의 주인이 될 것을 믿어 의심 치 않았다.
그가 거하게 전서호의 뒤통수를 치고 홍염으로 내빼지만 않았더라 면 말이다.
'전청운, 전청운. 당신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까.'
전서호가 전다호의 죽음 뒤 혼란
스러워할 때, 전청운을 보고 이성을 잃은 적이 있었다.
후에 전서호는 크게 후회하지만 이미 전청운은 크게 상처입고 마음 의 문을 닫은 뒤였다.
그에 대한 속죄로 전청운과 비슷 한 또래의 고아를 데려다 마치 친 자식처럼 정성스레 키웠다는 건…… 청사 내부에선 그다지 비밀 도 아니었다.
'전청운의 자리를 빼앗은 굴러들어 온 돌.'
처음에 그의 위치는 그 정도에 불 과했으니까.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지.'
전청운의 대역이 필요하던 찰나에, 마법에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고아 가 하나 눈에 띈 건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청사를 넘겨받은 것마저도 과분한 일이었다. 머리로는 그도 이 이상 욕심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았 다.
그런데도 이운우는 이따금 알 수 없는 충동적인 감정을 느끼곤 했다.
탁, 스윽.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는지 걱정되는군요."
응접실 문을 여니 앉아있던 사내 가 일어섰다. 이운우가 늘 바라 마 지않던 것을 가진 사내가.
검은 머리카락에 동양적인 생김새 의 사내. 특유의 무표정을 지은 채 였다.
그래. 저 표정.
전청운은 항상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순진한 얼굴로 이운우가 갖고 싶어 하던 것을 죄다 갖곤 했다.
이운우의 삶은 전청운의 그림자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 그 자체 였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한서하는 무사한가?"
"그레이트홀에서 나온 파장이 신 호 교란을 일으켜 지금 제대로 연 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살아 있을 겁니다."
이운우는 저도 모르게 그리 대꾸 했다.
전청운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이 아 니었다. 그저 그 한서하가 이렇게죽을 리 없다는 막연한 신뢰였다.
"그렇다고 믿어야죠."
"……국제 연합에서 제공해준 헌 터는 총 53명. 모두 각국의 최상위 급 헌터다."
"SSS급 게이트 클리어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니 말이죠. 아마 추측건 대 지금 그레이트홀에 출현한 마왕 이 그 SSS급 게이트의 주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 무래도 브레이크 아웃은 유례없는 일이라. 국제 연합에서도 사건 조사 를 위해 최대한 협력하겠다는 입장
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서로 원하는 바가 같다면 얘기가 빠르게 진행될 테니까.
"좋습니다. 그럼 빠른 구조를 목표 로, 전략을 짜보도록 하죠."
* * *
"크홉……
미처 고통을 감추지 못해 신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갔다.
그때마다 정로운이 멈칫한다.
그러자 류라임이 망설임 없이 한 걸음 앞서 나갔다. 정확하게 무릎 관절을 노리고 기술이 들어간다.
탁, 타악! 휙!
두어 번 공방을 주고받은 뒤에 류 라임도 뒤로 물러섰다.
"괜찮으시죠?"
"신경 쓰지 말아요. 전 괜찮으니 까."
나는 고통 때문에 잔뜩 서린 식은 땀을 닦아내며 애써 태연하게 대꾸 했다.
"류라임 씨. 잘하고 있어요."
"네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로운 씨 동생분을 아프게 하는 것보단 이게 나아요."
내 말에 정로운도 입을 다물었다.
"저야 헌터니 이 정도 고통도 견 딜 수 있지만. 정로운 씨 동생분은 아닐 겁니다."
혜원 언니를 아프게 할 수도 없었 다.
밖에서 게이트 클리어 중일지도 모르는데, 이런 일에 말려들게 했다 간 혜원 언니가 위험에 빠질 수도있었다.
"이게 최선이에요."
단호하게 말하자 정로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앗! 조심해요!"
후우욱!
류라임의 경고를 듣기 전에 정로 운이 먼저 대응했다.
' 얼어붙어라!'
쿠구구구궁!
우리 쪽을 향해 달려든 호문쿨루
스가 얼음에 하반신을 붙잡혔다.
살을 저미는 듯한 한기가 동시에 나를 괴롭혔다.
콰직! 콰드득!
호문쿨루스는 고통 따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얼음 조각들을 부숴 내기 시작했다.
고통에 주저앉아 있을 틈도 없었 다!
콰드드득!
놈이 벌써 얼음을 부숴내고 다시 달려들었다.
'공간 간섭!'
빠르게 놈의 등 뒤로 이동해 머리 에 총구를 겨눴다. 곧장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우드득!
"허억……
놈의 머리가 180도 회전했다.
살벌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아득 해지는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놈이 뒤틀린 목으로 나와 얼굴을 마주하며 씨익 웃는다.
나랑 똑 닮은 얼굴로 말이다.
"인간과 아주 흡사하지만 인간은 아니거든. 그러니 목이 부러져도 얼
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는 거지."
권성민이 저 뒤에서 우릴 구경하 며 설명을 덧붙였다.
빌어먹을!
놈이 여전히 목을 꺾은 채로 걸어 왔다.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한 장면처럼 기괴했다.
"하압!"
쿠구구궁! 푸욱!
정로운이 손짓하자 바닥에서 솟아 난 얼음 결정이 호문쿨루스의 팔다 리를 꿰뚫었다.
그마저도 극한의 고통으로 다가왔 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대장!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보다, 저 녀석 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약 점이 있을 겁니다."
그래. 호문쿨루스. '만들어진' 인 간.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골렘이나 사역마에 가깝다.
"핵. 핵이 있을 거예요."
흑마법사가 일일이 조종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사고해서 움직이는 골렘이라면 분명 중심이 되는 핵이 있을 거다.
"하지만…… 핵이 어디 있는 줄 알고요!"
"몸 안 어딘가엔 있겠죠. 헤집어보 면 나올 거예요."
내가 살벌한 소릴 하자 정로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날 고문하라는 소리처럼 들렸을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호문 쿨루스를 죽일 수 없을 테니까.
"머리를 노려요."
팔다리며 복부는 이미 죄다 찔러 봤으니 남은 곳은 몇 안 됐다.
그리고 개중 가장 유력한 부위는 바로…… 저곳. 놈의 머리였다.
"그러면 대장이 전투 불능이 될지 도 몰라요. 그게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는 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내 머리를 박살 내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 거든요."
"뭐 다른가요? 저한텐 똑같게 들
리는데."
"방법이 있어요. 아마도."
확실하진 않지만.
후욱!
그 순간 얼음을 깨부수고 나온 호 문쿨루스가 우릴 향해 달려왔다.
나는 도망치려는 정로운의 목덜미 를 낚아챘다.
의아함이 서린 것도 잠시.
후욱!
나는 정로운을, 놈의 면전 앞에 들 이밀 었다!
"어, 어어어어?!"
정로운이 당황하면서도 호문쿨루 스의 공격을 막아낸다.
휘익! 탁, 퍼억!
잠깐의 공방을 주고받은 다음 정 로운이 내 예상대로 아이템을 사용 했다.
' 얼어붙어라!'
쿠구구구구궁!
멈춰선 호문쿨루스의 바로 앞에 정로운의 얼굴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호문쿨루스가 정로운을 인식하고 정로운의 여동생 모습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내 모습이 흐트러지고 무너져 내 린다.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도, 정로운 의 동생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모호한 경계의 순간.
철컥.
탕!
총알이 녀석의 이마를 꿰뚫었다.
다행히 총알이 내 머리를 뚫고 지 나가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습이 변하는 그 순간을 노린 게 통한 모양이었다.
총격으로 반쯤 갈라진 놈의 머리 안쪽에서 핵으로 추정되는 마력석 도 박살난 게 보였다.
" 후우......
정로운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만약 머리에서도 핵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든 사지를 결 박하고 부위별로 헤집어봐야 했을 거다.
감각을 공유하는 나도 고통스럽지
만, 수행하는 이에게도 만만치 않은 트라우마를 심어줬겠지.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서 구경만 하던 권성민이 흙 바닥을 구르느라 엉망이 된 우릴 보며 웃고 있었다.
"제법 훌륭하게 해냈네. 기대 이상 이야."
"권성민."
매섭게 그를 노려보자 그가 어깨 를 으쓱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친절하게 우리
가 호문쿨루스를 이길 때까지 기다 려준 거지?'
그 속내가 뭔지 짐작도 가질 않았 다.
"그런데 한 가지 잊은 게 있지 않 나?"
그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묻는다.
아까부터 우릴 아주 갖고 놀고 있 었다.
"호문쿨루스를 상대하느라 그만 깜빡한 모양이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휙!
나는 곧장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 봤다.
영문을 모른 채 날 따라 뒤돌아본 정로운도 뭔갈 눈치챘는지 입을 쩍 벌렸다.
''.어아 어?''
다시 봐도 없었다.
"류라임 씨……?"
정로운의 물음이 공허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