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류라임은 작금의 사태가 아주 불 만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녀의 영원한 우상, 한 서하가 드디어 살아 돌아왔는데 코 빼기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TV 화면으로 안색을 확 인한 게 전부였다.
"우리한테 먼저 찾아와주실 줄 알 았는데..
류라임이 축 늘어져 있자 정로운 이 그녀를 다독였다.
"아직 몸을 회복 중이라고 하잖아 요. 어쩔 수 없죠."
"그치마안. 역천의 길드장이나 청 사의 길드장은 자주 얼굴 보는 것 같았는걸요."
"그야 그분들은 길드장이니까
"우리는 같은 대원인데요!"
류라임이 부루퉁한 표정을 짓자
정로운이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우린 우리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훈련? 그건 질리도록 했는데."
류라임은 훈련장에서 뛰노는 게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훈련장에선 불꽃놀이도 못 하잖 아요."
그녀가 사랑하는 폭발을 마음껏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좀 강한 폭탄을 가져와서 써보려 고 하면 건물 무너진다면서 정로운 이 극구 말린 탓이었다.
"그럼 대련이나 한 판 더 할까 요?"
"얼음 빼고?"
"대신 폭탄도 빼고요."
정로운의 제안에 류라임이 잠시 골똘히 고민하다가, 크게 고개를 끄 덕이려는 순간이었다.
휘익, 탁!
허공을 날아온 신도아가 창틀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매의 날개는 사람의 팔로, 매의 발톱이 매섭던 다리는 사람의 다리로 변했다.
"정로운. 류라임."
"신도아 씨."
정로운이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그런데 어째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일어나. 가야 할 곳이 있다."
"가야 할 곳이요?"
"한서하가 어디 있는지 찾아냈어."
그 폭탄선언에 정로운이 눈을 크 게 떴다.
동시에 류라임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신도아에게 매달렸다.
"진짜요? 재활치료 중이라고 들었
는데! 어느 병원인지 알아낸 거예 요?"
"아니. 병원이 아니다."
류라임이 고개를 갸웃, 했다.
"역천의 길드장, 표혜원의 사택이 다."
"네? 하지만, 분명 아직 몸을 회복 하고 있다고……
정로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 거리자, 신도아가 차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야. 한서하는 거기에 갇혀있는 거다. 강제로."
"허업……
정로운이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나, 납치요?"
"아마도."
"하지만 대장이 그런 걸 당할 만 한 사람이 아닌데……
정로운이 작게 항변하자 신도아는 단호하게 말을 끊어냈다.
"가보면 알겠지."
신도아는 표혜원의 사택 위치를 알려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찔리는 게 없으면 우릴 보게 해 줄 테고 아니면 못 만나게 하겠지."
그 말에 정로운과 류라임이 고개 를 돌려 서로를 바라봤다.
둘은 고개를 끄덕, 하고는 비장하 게 대답했다.
"좋아요."
"가보죠!"
주택가 사이 2층 전원주택. 역천의 길드장이 머물고 있는 사택이었다.
'여기서 서하 님도 같이 살고 계신
다 했었지. 부럽다. 서하 님이랑 같 은 집에서……
류라임은 부러운 마음을 가득 담 아 집 근처를 샅샅이 훑었다. 특별 히 이상한 점은 없어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면 되겠죠?"
정로운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왠지 모를 떨림에 잠시 주 춤했다.
만약 이 안에 정말 한서하가 갇혀 있다면? 구출해야 할까?
하지만 역천의 길드장은 그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말이다.
그런 고민들을 한가득 안고 망설 이자 신도아가 답답한 듯 정로운을 밀어냈다.
"내가 하지."
"앗,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정로운이 할 수 있다며 다시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드디어 초인종을 누르려는 그때.
덜컥.
문이 스스로 열렸다.
"응? 누구세요?"
낯선 목소리가 그들에게 정체를 물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내 려 묶고, 유순한 눈매를 한 여인이 었다.
한쪽 눈을 감고 있는 게 아주 신 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표혜원이 아닌 다른 사람의 등장 에 정로운이 뻣뻣하게 굳었다.
"저, 여기, 표혜원 씨 집 아닌가 요?"
"네. 맞는데요."
생긋 웃으며 대꾸하는 모습이 누 군갈 납치 감금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근데, 전에 본 적 있는 것 같은 데.... 어디서 봤더라.
"한서하를 만나러 왔다."
신도아가 대뜸 본론을 꺼냈다.
정로운의 착각이었을까. 한없이 다 정하고 부드러웠던 여인의 분위기 가 일순 날카롭게 변하는 것 같았 다.
'……기분 탓인가?'
그러나 두 눈을 깜빡이고 난 다음 에는 아까처럼 상냥한 기색만 남아 있었다.
"아아, 서하를 찾아오셨구나."
탁.
여인이 문밖으로 나오더니 아예 문을 닫았다.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다는 간접 적인 신호였다.
"전 송다정이라고 해요."
"아, 네. 반가워요, 다정 씨. 그러 니까…… 아! 송다정 대장장이님!"
정로운이 화들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줄과 같은 아 이템을 잠금 해제한 것이 바로 송 다정이었기 때문이다.
"저, 이 아이템 기억나세요? 송다
정 대장장이님께서 해제해주신 아 이템인데."
"아-. 기억나네요. 서하가 부탁했 던 것 같은데."
"네! 맞아요!"
정로운은 생명의 은인을 만난 것 처럼 반가웠다.
전부터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 하고 싶었지만, 송다정은 현재 세계 적인 수준의 대장장이로 명성이 높 았기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서하네 부대 대원분들이시네요!"
그제야 송다정은 그들이 누군지 알아챘는지 활짝 웃었다.
"한서하를 보고 싶은데."
신도아가 계속되는 잡담이 지겨웠 는지 한 번 더 본론을 꺼냈다.
"으음, 이거 어쩌죠. 지금 당장 뵙 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왜지?"
"지금은 안정에 집중하고 있는 시 기거든요."
송다정이 부드러이 웃으며 대꾸했 다.
"그런데 지금 부대원분들을 뵙게
되면, 얼른 일어나서 게이트에 나가 야겠다는 생각에 조급해지지 않겠 어요?"
"그게 맞지 않나.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게이트로 가는 게 우리의 소임인데."
신도아의 말에 송다정의 낯이 살 짝 굳었다. 정로운만 눈치챘을 정도 로 아주 작은 변화였다.
"한서하도 그걸 바랄 거다."
"그러겠죠?"
"내가 아는 한서하는 그런데. 당신 이 아는 한서하는 다른가?"
신도아의 물음에 송다정이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녀가 아는 한서하도, 그런 사람 이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안에 들 여보낼 수 없었다.
"그럼 말을 바꾸죠."
송다정은 하필, 정말 하필이면 표 씨 남매도 집을 비우고 이운우도 없는 이 시점에 쳐들어온 이들 때 문에 매우 곤란했다.
무력으론 그들을 상대할 수 없을 테니 어떻게든 표씨 남매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서하가 아니라 우리가 원치 않는 다고 하면요?"
"헛소리다."
신도아가 아주 냉정하게 일갈했다.
"본인들의 이기심을, 남을 위해 그 러는 거라고 포장하는 꼴이군."
정곡을 찔린 송다정은 말문을 잃 었다.
그야 분명 이건 아주 이기적인 행 태가 맞았으니까.
"더 들을 것도 없군. 비켜라."
w 잠..
탁!
신도아가 송다정의 팔뚝을 움켜쥐 었다. 강력한 손아귀 힘에 송다정이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팔을 보호하고자 하는 대장장이의 본능이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
송다정은 신도아와 눈을 마주한 다음 그럴 수 없다며 그 앞을 가로 막았다.
"이 안에 들어가고 싶다면 날 무 력으로 꺾어야 할 거예요."
" 원한다면."
신도아가 다시금 송다정의 팔에 손을 얹자 송다정이 턱을 들어 올 리며 도발적인 말을 던졌다.
"감당할 자신 있어요?"
신도아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송다 정이 여유롭게 뒷말을 이었다.
"이 팔이 얼마나 가치 있을 것 같 아요?"
세계적인 수준의 대장장이.
게다가 손이석이 무기 공급에서 손을 뗀 이후로 최상위 헌터들의 무기 공급은 송다정이 책임지고 있 다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송다정의 팔 한쪽 은 과연 얼마나 천문학적인 값어치 를 가질까.
"어디 자신 있으면 한번……
콰아아앙!
송다정의 말을 끊고 뒤편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모두가 멍한 얼굴로 폭발음이 들 린 곳을 바라봤다.
류라임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활짝 웃는다.
"어! 얘기 중이셨어요?"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류라임
씨."
정로운이 두렵다는 듯 중얼거리자 류라임이 해맑게 대꾸했다.
"안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 요? 그래서 들어가는 입구를 하나 더 만들어봤어요!"
짜잔, 하며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1충 벽 한쪽이 뻥하니 뚫려 있었다.
'무슨 냄새지?'
정로운은 뚫린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향을 맡았다. 약초를 태운 것 같은 향이었다.
송다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벼, 벽이…… 벽이……!"
송다정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뭐라고 말해야 하지? 갑자기 저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벽을 부쉈다 고? 믿어주긴 할까?' 하며 작게 중 얼거렸다.
신도아는 송다정의 팔을 놓고는 류라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군."
"헤헤. 그쵸? 이제 얼른 서하 님 보러 가요!"
정로운은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입 을 다물기로 했다.
"같이 가요!"
그리고 정말 뚫린 벽을 통해 안으 로 들어가는 이들과 함께했다.
"어딜 들어가는 거예요! 이거 무단 침입이라고요!"
송다정이 황급히 말렸지만 도저히 이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대장장이답게 나름 손아귀 힘은 자신이 있었지만, 꽉 잡아봤자 송다 정을 팔에 매단 채 앞으로 걸어 나 가니 의미가 없었다.
"으. 무슨 냄새예요, 이거? 집에서 향이라도 피워요?"
정로운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앞 으로 걸어 나갔다.
시야가 온통 뿌연 색이었다. 벽을 통해 좀 빠져나갔는데도 이 정도라 면, 평소엔 앞을 가늠하기도 힘든 수준이었을 거다.
"2층에 있을 거예요!"
류라임이 신이 나서 먼저 달려갔 다.
2층으로 올라간 다음 인기척이 느 껴지는 곳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서하 님! 서하 님! 라임이가
왔..!"
벌컥.
"..어?"
문을 열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 다.
뿌연 연기의 주범으로 보이는 향 초가 타고 있었고, 그 바로 옆 침 상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한서하였다.
아주 평온한 낯으로 잠들어 있었 지만 심박과 호흡이 기이할 정도로 느렸다.
"서하 님……?"
그 기묘한 광경에 류라임이 저도 모르게 한서하의 이름을 불렀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신도아가 매섭게 묻자 송다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봐버렸으니 어쩔 수 없네 요."
송다정은 침상에 누워 있는 한서 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 다.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해둔 거예요.
코끼리 다섯 마리도 즉시 잠에 빠 지게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농도가 아니면 금방 다시 깨어나 버리다니. 헌터의 신체 능력이란 대단하죠."
송다정은 이만큼 수면향이 빠져나 갔으니 이젠 소용없겠다고 덧붙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