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표혜원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모든 게 느려터진 것 같 았다.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늦어?'
굼벵이도 이것보단 빠를 것 같았 다.
옆에서 조연호가 작게 '길드장님이
급한 거예요.' 하고 중얼거렸지만, 표혜원은 들은 체 만체 했다.
"후우. 게이트 클리어를 최대한 빠 르게 마치긴 했는데, 너무 늦어버렸 잖아."
"아뇨. 일주일 걸릴 줄 알았던 게 이트를 몇 시간 만에 끝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기록적인……
"이운우. 고 영악한 게 일부러 날 게이트에 보낸 건 아닐까? 자기가 먼저 서하 보려고?"
"아뇨. 분명 조사 결과를 공유했을 땐, 청사 측도 한서하의 행방에 대 해 아는 바가 없……
"진짜 이번엔 그냥 안 넘어갈 거 야!"
표혜원은 조연호의 목소리가 들리 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결국 조연호는 무어라 말하는 걸 포기하고 후우, 깊은 한숨만 내뱉었 다.
그래도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번 져 있었다.
살아있을 거라고, 여러 번 되뇌긴 했지만 진짜 살아 돌아오니 또 감 회가 새로웠다.
"건강 검진 결과 건강에도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안 되는데."
"네? 다친 것보단 건강한 게 낫지 않나요?"
표혜원이 기뻐할 줄 알았기에 조 연호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표혜원이 고개를 저었다.
"팔다리 하나라도 부러져야 좀 가 만히 병원에 눌러앉아서 쉴 텐데. 멀쩡하면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서 날 간 떨어지게 할 거란 말이 지……
조연호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런 이유로 한서하가 다쳐있길 바라는 게 어이없다가도 그 심정이 반쯤 이해 가기도 했다.
"……수면향이라도 준비할까요?"
"나쁘지 않지."
살벌한 소리가 오갔다.
"잠시만요."
조연호는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 며 갑자기 멈춰 섰다.
"왜? 왜왜? 갑자기 서하가 어디 아프기라도 하대?"
차라리 아팠으면 좋겠다고 말했으 면서 막상 이변이 생겼다고 하자표혜원이 울상을 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조연호는 휴대폰 화면을 직접 보 여줬다.
휴대폰 안에는 실시간 기자회견이 재생되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다름 아니 군}…….
"……서하잖아."
한서하였다.
찰칵,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마구잡이로 터지 는 가운데, 단상 앞에 서 있는 사 람이 낯익었다.
하얀 얼굴, 특징적인 무표정. 옷은 간소하게 차려입었지만 틈틈이 붕 대가 감겨 있어 몸 상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안 아프다며."
"그러게요. 아픈 것 같진 않은 데…… 연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최근 제가 회복에 집중하는 사 이, 저와 관련된 여러 논란들이 생 겨난 것을 압니다. 이제 기자회견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 으니 관련된 유언비어가 떠도는 걸 막고자 합니다.
화면 속 한서하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몸 상태가 지금은 어떻습니까?
-많이 회복됐습니다.
-계속 병원에 계셨던 겁니까? 하 지만 공식 발표엔 분명 '실종'이라 고 되어 있었는데요.
-처음엔 실종 상태였지만 이내 병 원으로 이송됐습니다. 관련 사안은 일부 관계자만 알고 있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차근차근 답해주 자 끝내 모두가 궁금해하던 것을 묻는 이도 생겼다.
-유언비어라고 하면 어떤 유언비 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장내가 놀랍도록 싸늘하게 식었다.
여기서 한서하가 뭐라고 대답하는 지에 따라 내일 1면에 실릴 특종이 달라질 것이다.
_저는…….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리자 표혜원 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너무 시달렸나 봐.'
유가족 측의 밑도 끝도 없는 생떼 에 오랜 시간 애를 먹었다.
혈연주의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은
근히 유가족 측의 입장을 두둔하는 자들이 많았던 탓이다.
굳이 찾아보진 않았지만 저절로 귀에 들려오는 것들도 있었다.
다른 것보다 자신 때문에 역천의 이미지에 흙탕물이 튀는 게 제일 끔찍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모든 게 끝나려 하고 있었다.
- 우당탕탕!
-서하! 서하야!
그때 누군가 난입했다.
카메라 끄트머리에 경호원에게 제
지를 받는 누군가가 잡혔다.
그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유가족 측 대표. 서하의 고모라던 여자. 한영희.'
-나야, 네 고모! 아이고, 우리 딸! 드디어 살아 돌아왔네!
호들갑떠는 목소리로 한서하에게 아는 체를 한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흡, 그 래도 이렇게 살아, 홉, 살아 돌아왔 으니…….
약간 울먹울먹하더니, 이내 울음을
와르르 쏟아냈다.
찰칵, 찰칵!
기자들이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 아냈다. 아마 '감동적인 재회' 따위 의 제목을 붙여 속보로 내보낼 것 이다.
한영희가 호들갑을 떠는 와중에 한서하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한영희는 끝내 단상 위까지 올라 가 한서하에게 들러붙었다.
그리고 자그맣게 무어라 속삭인다.
'뭐라고 한 거지?'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남
몰래 뭔가 말하는 것 같았는데. 내 용이 들리진 않았다.
다만 그 직후에 한서하가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표혜원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뭐라고 말했길래……?'
혹여나 그럴듯한 제안을 해서 그 걸 한서하가 받아들였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그게 모두 에게 더 이득이라면, 과연 한서하가 모든 걸 제쳐두고 표혜원을 위해줄 까?
표혜원은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 다.
그래서 더욱 불안한 마음이 들었 다.
-고모님.
한서하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거의 10년 만에 뵙네요.
원했던 말이 아닌지 한영희의 얼 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찰칵, 찰칵!
-10년 만이요? 10년 만의 재회라 고 하신 겁니까?
-하지만 친딸처럼 가까운 관계였 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자들도 한서하가 누굴 선택했는 지 알아채고 질문을 쏟아냈다.
"후우. 다행이네요."
조연호도 내심 마음을 졸였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길드장님?"
표혜원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렴. 10년 만이라니, 우리가 얼마 나 가깝게 지냈는데. 네가 학생일적에 내가 교복 다 다려서 학교 보 냈는데!
한영희가 마지막 발악을 했다. 언 론과 대화를 나누며 꾸며낸 이야기 를 진실인 양 부르짖는다.
-이상하네요. 전 제 교복 혼자 다 려서 입고 다녔는데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 어! 그 여자지. 그 여자가 너한테 먼저 접촉해서……!
-어릴 적에 부모님을 여의고 여러 친척집을 전전했지만, 절 진심으로 품어주신 분은 없었습니다. 16살 무렵부턴 아예 독립해서 혼자 살았고요.
웅성웅성. 화면 너머로도 현장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느껴졌다.
한서하가 살아 돌아와 직접 누구 의 말이 진실인지 밝혔으니, 이보다 더 명확할 수가 없었다.
한영희의 얼굴이 무너지는 게 아 주 일품이었다.
"……연호야."
"네."
"이 기자회견 어디서 하고 있는 거야? 빨리 가자."
"네. 바로 그쪽으로 갈게요."
-거짓말이야! 둘이 짜고 치는 거 지! 어떻게 네가 가족을 버릴 수 있니, 서하야아아!
울부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둘은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주변이 아주 난장판이었다.
기자들은 끊임없이 사진 찍고, 기 사를 써냈다.
내 고모라는 작자는 울부짖으며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외쳤다.
나는 급격히 몰려오는 피곤함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서하야! 그 여자가 뭐라고 널 회 유했는지 몰라도……
탁!
내 팔뚝을 붙잡아오는 탓에 나도 모르게 거세게 쳐내버렸다.
한영희가 놀란 얼굴을 한다.
"제 몸에 손대지 말아주시죠."
싸늘하게 대꾸하자 한영희가 더욱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 다.
"너, 너! 가족끼리 어떻게......『
"한서하 헌터! 그럼 유서는 자의로 쓰인 게 맞습니까? 압박을 받아서 강제로 작성했던 건 아닙니까?"
"아닙니다. 자의로 작성했고 대부 분의 헌터 길드에서 관례처럼 신입 들에게 유서 작성을 권유합니다."
이걸 기자들도 모르진 않았을 텐 데.
그저 입맛대로 정보를 취사선택해 서 다른 이들에게 혼란을 심어줬겠 지.
"그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들에게 유산을 상속하려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들이 제게 가족과도 같은 존 재기 때문입니다."
나는 진심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어린 시절부터 뭐든 혼자 해내온 제게 처음으로 따스하게 손길을 내 밀어준 분입니다."
나도 모르게 혜원 언니와 연원이 를 떠올리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 가 지어졌다.
"서하야아아아!"
때마침,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당탕탕, 막아서는 경호원들을 물 흐르듯 가볍게 피해낸다.
헌터의 가공할 만한 신체 능력을 이용해 무척 빠른 속도로 내게 달 려온다.
"혜원 언니!"
"서하야아아!"
와락!
혜원 언니가 나를 꼬옥 끌어안았 다.
나는 그녀를 마주 안으며 반가움 을 표했다.
찰칵, 찰칵.
이 상황마저 카메라로 찍는 기자 들은 못 본 척 무시했다.
"어디 갔었어……
" 죄송해요."
"얼마나 찾아 헤맸는데."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뒤이어 헉헉거리며 조연호가 힘겹 게 달려왔다. 혜원 언니가 다 뿌리 치고 홀로 달려온 모양이다.
조연호도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흐릿하게 웃 었다.
나는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영희를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제게 가족은 이제 이쪽입니다."
"……혈연을 이렇게 저버릴 순 없 는 거야."
"제가 저버린 게 아니에요."
내가 어린 시절, 아무것도 없던 때 에 이미 나는 당신들에게 버림받았 으니까.
"당신들이 날 저버린 겁니다."
한영희는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뒤돌아섰다.
"후회할 거야."
라며 돼먹지도 않은 협박을 남긴 채로 말이다.
기자회견은 그렇게 끝이 났다. 누 군가의 파렴치한 사기 행각이 이미 죄다 까발려진 뒤였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속삭였던 거야?"
혜원 언니가 팅팅 부은 눈두덩이 를 얼음찜질하며 물었다.
"그걸 봤어요?"
"웅. 들리진 않았지만."
나는 멋쩍게 뒷목을 쓰다듬었다. 별 거 아닌 이야기였다.
"그냥…… 절 협박하더라고요."
"뭐라고?"
일반인이 헌터를 협박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무력 차이 가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친한 척하라고. 안 그러면 제 불우했던 과거를 다 폭로하겠다고 요."
혜원 언니가 대번에 낯빛을 굳혔 다.
"그거 괜찮은 거야?"
"상관없어요."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까요. 결국 제 입으로 다 말했고."
세간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이였다 면 그 협박이 먹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내가 남에게 어떻게 비 치는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 었다.
"애초에 비밀도 아니었……
말을 잇다가 나는 멈칫했다.
몸이 좀 이상하다.
불현듯 테오도르가 내게 했던 경 고가 떠올랐다.
"..언니. 혹시, 이거.
나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털썩 쓰 러 졌다.
"미안해. 서하야."
어렴풋이 혜원 언니가 내게 사과 하는 목소릴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