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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253화 (264/361)

253화

화악!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는 알 수 없 는 공간이었다.

온통 하얀색 일색인 곳에 덩그러 니 서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주변 을 휘휘 둘러봤다.

그때, 머리 위에서 환한 빛이 내려 오면서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렸 다.

-■■■…… ■■■ ■■ ■■■

' 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 다. 뭔가 들리긴 했는데, 도통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러자 잠시 침묵한 뒤에, 다시 목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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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말해야 좋을까.

자애로운 여성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낮게 가라앉은 남성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겹쳐 울렸으며 노인의 깊이 들끓는 기침 소리도 함께 들렸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 이며 동시에 울리는 것 같았다.

듣자마자 깨달았다. 이건 나와 동 등한 격의 생명체가 아니다.

'성좌'라고 불리는 이들. 지상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자들이었다.

-당돌하게도 우리에게 도움을 요

청했더구나.

"동물원도 입장료를 내는걸요."

남의 인생을 훔쳐보면서 관람료 한 푼 안 내는 건 불공평하지.

-본래는 우리가 너와 이렇게 마주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목소리가 '우리는 모든 것에 간접적으로 개 입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한 개인과 직접 접촉하는 건 금지되어 있거 든.' 하고 덧붙였다.

"그런데 왜 절 만나러 왔죠?"

- 네가 우릴 불렀으니까.

목소리가 작게 웃는 것 같았다.

- 네가 우릴 눈치챈 것도 모자라 서, 직접 손을 뻗지 않았니.

고작 그런 이유로? 이해하기 어렵 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목소리가 친절하게 뒷말을 이었다.

-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 겠지. 네가 아주 아끼고 사랑하는 인간이 있다고 가정해보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혜 원 언니나, 표연원, 다정 언니, 이 운우 같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늘 무대에 올라 아름답고 강렬한 이야기들을 선보이지. 넌 항 상 그들을 관객석에서 바라볼 뿐인 거야.

무대에 오르는 혜원 언니라.

나는 내가 떠올린 사람들이 분장 을 하고 연극을 선보이는 걸 상상 해봤다.

연극 내용은 대충 '로미오와 줄리 엣' 정도로 할까.

예쁘장하게 생긴 이운우가 줄리엣 역할을 맡고, 혜원 언니가 로미오를 맡는 거다.

청사와 역천의 길드장들이 선보이 는 연극이라고 하면 관객은 꽉꽉 차겠지.

둘 다 러브신을 연기할 때는 속으 로 질색을 할 거다.

재밌는 상상이었다. 그들을 관객석 에서 바라만 봐야 하는 게 좀 아쉬 울지도 모른다.

-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무대 위에서 자기들끼리 노래하던 이들이, 불쑥 네 이름을 부르는 거야.

목소리는 무척 황홀한 광경을 떠 올리는 것처럼 굴었다.

- 그 찬란한 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 다.

- 늘 남에게 쏘아주던 스포트라이 트가 네게 되돌아왔을 때의 환희를.

나는 어렴풋이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을 선보이던 혜원 언니가 무대 위에서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걸 생각해봤다.

'……잘 모르겠는데.'

무대를 망칠까 봐 걱정되기만 했 다.

-무대 위에서만 뛰놀던 이들이 관 객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단 걸 알 아차리면, 그 존재가 더 없이 사랑 스러워지지.

"그래서 날 보러 왔다?"

팬미팅 같은 개념인가.

이렇게 말하니 어째 성좌들의 꼴 이 좀 우스워지는 것 같긴 한데. 그게 제일 적절한 비유 같았다.

- 그래. 인과율을 많이 소모하긴 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지.

성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전 세 계에서 몇이나 될까.

이들은 말하자면 잊힌 관객이다.

무대를 항상 지켜보지만 무대 위 등장인물들은 관객의 존재조차 모 르고 있으니까.

그러다 내가 박노아를 통해 이들 의 존재를 눈치채고, 끝내는 무대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그들을 부르 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내게 열광했을지 머리로는 대충 예상이 갔다.

- 끝이 다가오는구나.

목소리가 애정이 듬뿍 담긴 말투 로 내게 물었다.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니. 무엇 이든 말해보렴.

"무엇이든?"

- 그래. 무엇이든.

목소리는 내가 원한다면 당장이라 도 지구로 날 돌려 보내줄 수도 있 고, 내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향상시 켜줄 수도 있고, 클로에의 능력치를 너프시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나같이 내게 유리한 제안이었지 만 난 별로 끌리지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무대 위의 일을 해결하는 건, 등장

인물인 내가 맡은 역할이다.

갑자기 관객석에서 누군가 뛰쳐나 와 적을 물리친다고 한들 그게 무 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잠깐은 몸이 편할지언정, 무대의 완성도는 떨어질 텐데.

등장인물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관객석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하는 연극은 누구라도 원치 않 을 거다.

"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자, 목소리 는 무척 기쁘게 화답했다.

-이러니 널 사랑할 수밖에.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직 후, 알림이 울렸다.

[알림: 알 수 없는 요소의 개입에 의해 시스템이 일부 조정됩니다.]

후욱!

다음 순간 나는 숨이 턱 하고 막 혔다.

"커흡!"

쿨럭, 목구멍을 통해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핏물이었다.

입 안이 잔뜩 비린 맛으로 가득했 다.

갑자기 온몸을 몽둥이질하는 것 같은 통증도 치고 올라왔다.

내 뺨을 간질이는 것이 클로에의 머리카락이란 걸 알았을 때, 나는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음을 눈치챘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헐 떡이는 현실로 말이다.

아주 잠깐 지나치게 현실적인 꿈

을 꾼 것 같았다.

온몸을 누비며 뛰어노는 통증이 여기가 현실이라고 우악스럽게 주 장한다.

"그럼 이제 안녕이에요."

클로에가 내게 작별 인사를 고했 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이트 를 겨우 쥐었다.

클로에가 총구 앞에 제 이마를 들 이댄다.

"쏘고 싶으면 쏴요. 어차피 소용은 없겠지만."

방아쇠 한번 당기기도 힘겨웠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고, 감각이 둔탁했다.

그래도 해내야 했다.

이를 악물고 팔을 움직였다.

노이트의 총구가, 클로에의 이마를 지나 뒤편의 핵을 겨눈다.

"원한다면 그쪽도 상관없죠."

둘 다 무용지물인 건 똑같다며 클 로에가 작게 속살거렸다.

글쎄. 과연 그럴까.

[알림: 알 수 없는 요소의 개입에 의해 시스템이 일부 조정됩니다.]

그래. 이제야 일을 좀 하는군.

[알림: 특수 탄환 '바로잡는 창천' 이 열렸습니다!]

내가 원했던 건 단 하나.

그게 바로 이 한 발이었다.

[5. 바로잡는 창천: 잘못된 것, 부

정한 것을 사용자의 정의에 맞게 바로잡습니다. 대상은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철컥.

모노클 너머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영혼이 보였다.

얼기설기 짜 맞춘 몸통 위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있었다.

뭉툭한 코 끝, 짧은 단발머리에 뻥 뚫린 눈두덩이. 고통에 신음하는 것 처럼 입을 쩍 벌렸고, 양 볼은 패 어 있었다.

클로에가 뭔가 이상을 느꼈는지 놀란 얼굴을 했다.

" 잠깐……

이미 늦었다.

타앙!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 다.

날 막으려고 손을 뻗는 클로에와, 거대한 심장을 향해 날아가는 탄환.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지는 가운 데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고, 마, 워, 요.'

끔찍하게 고문당했을 아이가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다.

푸우욱!

탄환이, 클로에의 심장에 적중했 다.

[알림: '바로잡는 창천'이 대상자 를 복구합니다.]

"안 돼애애애!"

비명을 배경으로 나는 쿨럭 한 번 더 피를 토해냈다.

이제 정말로 한계였다.

[알림: 대상자(개체:클로에 외 8 인)는 그 대가로 일정 부분 기억을 상실합니다.

-키워드: 댄베

스르륵, 눈이 감겼다.

심장이 멎어 가는 게 느껴졌다. 정 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날 몰아붙이 던 고통이 점점 흐려져 간다.

* * *

꺄르륵, 꺄르륵.

어린아이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 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고 깨끗한 소리로 세상의 기쁨을 모두 담은 양 하늘 높이 올랐다.

"하하하, 클로에!"

댄버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목 소리에도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 아빠아!"

와락, 아이가 댄버에게 안겼다.

"이거, 이거 봐요!"

노란 꽃을 서툴게 엮은 것을 댄버 에게 내민다.

댄버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게 뭐 냐고 묻자, 아이가 웃으며 대꾸했 다.

"뒤뜰에 핀 꽃으로 만들었어요! 예 쁘죠!"

"웅, 정말 예쁘네."

"그쵸? 그니까 아빠 줄게요."

"정말?"

"웅웅. 그니까 고개 숙여봐요!"

아이가 여러 차례 재촉하자 댄버 는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화관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그 풀더미가 댄버의 머리 위에 얹 혔다.

"고마워, 클로에."

댄버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도 댄버를 마주 안으며 웃었 다.

"고마워, 클로에……

댄버의 목소리가 슬쩍 어그러진다.

"고...... 마워...... 클로.…"

에..하

늘어진 테이프처럼 기괴하게 변하 자 아이가 뭔가 이상하단 걸 눈치 채고 퍼뜩 눈을 떴다.

유아빠..7"

조심스럽게 댄버를 불러보지만, 댄 버는 클로에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우리 딸……. 사랑스러운 공주 님……

"아빠. 놔줘요."

"왜 하필이면 네가……

"아빠아!"

클로에가 거칠게 비명을 지르며 댄버를 뿌리친다.

"칙!"

비로소 다시 마주 본 댄버의 얼굴 은 아까와 너무 달라져 있었다.

다정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 데없고, 눈은 붉게 충혈되고 양 볼 이 홀쭉하게 들어갔다.

머리는 산발인 데다가 옷은 찌든 내가 났다. 안경은 일부분 부서져 있기까지 했다.

여아빠 9*

너무도 달라진 모습에 클로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왜 하필 네가 아파야만 했던 걸 까. 클로에."

" 어?"

댄버의 말이 끝나자마자 클로에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뭐, 뭐야……. 왜 발이……

왼쪽 발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지 않고, 감각 도 없었다.

"꺄아악!"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오염이 발목

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싫어, 싫어어어!"

비명을 지르며 뒤로 기어가지만 클로에가 자신의 발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싫…… 허업......!"

끝내 오염은 클로에를 집어삼키고 온몸이 검게 물들었다.

시야가 까맣게 변하고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통 까 만 그곳에서 클로에는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 아빠......

클로에는 댄버를 찾아 헤맸다.

'아빠. 어딨어요? 여긴 너무 춥고, 어두워요……

언제나 클로에가 부르면 달려와 줬던 댄버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도 리가 없었다.

클로에는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때.

-내…… 우리 클로…… 원치 않...

어렴풋이 댄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저 여기 있어요!'

클로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고 싶었다.

-..클로에?

'절 좀 꺼내줘요! 아빠랑 같이 있 고 싶어요!'

-아아아아! 클로에! 내가, 내가 너 를……!

'아빠! 아빠o}o}o}f

그리고 한참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서로 싸우는 것 같기도 했 고, 무언갈 거세게 내려치는 굉음이울리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고요해 졌고, 그게 끝이었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댄버의 목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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