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유일하다고?
하지만, 스테이지형 게이트에서 봤 을 때 이 오로굴드의 탑 안에는 수 도 없이 많은 연구원들이 함께했는 데.
"……다른 연구원들은?"
"모두 제거했어요."
담담한 어투였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오만한 말이지만 부정하기 어려웠 다.
클로에의 등 뒤에 놓인 수없이 많 은 전광판들.
그 위로 새겨진 숫자들의 향연은 분명 사람이 처리하기엔 방대한 양 의 데이터처럼 보였으니까.
"게이트를 지구 어디서, 어디까지 설정할지. 그 내부 모습은 어떨지. 어떻게 배치하는 게 효율적일지. 그 런 것들을 계산하는 데 인간 여러
분은 비효율적이거든요."
테오도르가 있었을 때만 해도 게 이트 연구원들이 따로 존재했던 걸 로 아는데.
전쟁이 시작되면서 많은 것들이 바뀐 걸까.
"테오도르 님은 잘 계시나요?"
클로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절 창조하신 분인데, 늘 저를 탐 탁지 않아 하셨죠.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었어요."
클로에가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 다.
"제 모습 때문일까요."
앳된 얼굴이 감정 없이 말갛기만 했다. 댄버와 닮은 구석은 없어도 나는 이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클로에."
"그렇게 닮았나요?"
"소름 돋을 정도로."
"우연의 일치일까요."
댄버가 보여줬던 딸아이의 사진. 죽은 그의 딸, 클로에.
그 애의 얼굴을 똑 닮아 있었다. 일부러 흉내 낸 건 아닐까 싶을 정 도로.
"제게 가장 적합한 육신의 형태를 만들어낸 것뿐인데 말이죠.''
저 애를 이루는 근간에 클로에가 있기 때문일까.
이유가 뭐라 해도, 해맑게 웃던 사 진 속 그 아이와 지금의 클로에는 간극이 커 보였다.
"어차피 겉으로 보이는 외양은 크 게 의미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바꾸지 않은 이유는 뭔 데?"
" 그건.
굳이 클로에의 모습이 아니어도 된다면 테오도르가 싫어하는 줄 알 면서도 그 얼굴을 계속 사용한 이 유가 뭐란 말인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까딱했 다.
"제가 '클로에'가 아니라고 말했지 만 계속해서 절 '클로에'라고 부르 는 당신과 비슷한 이유 아닐까요."
"하지만 넌 클로에가 아니야."
"저도 알아요. 저는 클로에가 아닙 니다. 하지만 당신은 절 클로에로 보고 있죠. 제가 틀렸나요?"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왜냐면 그녀의 말대로 나는 속으 로 '클로에'를 '클로에'라고 이르고 있었으니까.
"그럼…… 내가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글쎄요. 클로에만 아니면 뭐든 좋 죠."
"다른 이들은 널 뭐라 부르고 있 는데?"
"'클로에'라고 부르죠. 테오도르 님 께서 절 그렇게 불렀으니까요."
그렇다고 내가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기엔 찝찝함이 컸다.
그런 내 속내를 읽었는지 클로에 가 눈을 천천히 껌뻑거렸다.
"그냥 클로에라고 부르셔도 돼요. 제 겉모습이 무의미한 것처럼, 절 어떻게 부르는지도 아주 사소한 점 이니까요."
"그럼 네게 중요한 건 뭐지?"
"다음 게이트의 생성이죠."
클로에는 그것 말고 다른 건 상상 도 해본 적 없다는 것처럼 대꾸했 다.
"전 그걸 위해 태어났으니까요."
나는 슬며시 등 뒤로 노이트를 쥐 었다.
어딘지는 몰라도 분명 이 안에 클 로에의 '핵'이 있을 거다.
이 탑과 하나가 된 것 같으니 사 실상 이 탑 어디에도 있을 수 있었 다.
겉으로 보이는 곳에 있진 않을 거 고 분명 아주 깊숙한 곳에 있을 텐 데.
그게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게 우 선이었다.
"나와 하고 싶은 얘기라는 건?"
나는 다른 얘길 꺼내면서 능력을 발휘했다.
'공간 간섭'
천천히 범위를 확장하다 보면 핵 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저는 수많은 게이트를 관리, 감독 하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어요. 하지만 날 담당하는 연구원들은 매 번 그 의문점을 제거하곤 했죠."
톡톡, 클로에가 제 머릿속을 가리 켰다.
"그럼 저는 또 같은 의문점을 품 고, 제거당하고, 또 같은 질문을 하
고. 그렇게 반복하는 거예요."
"하지만 기억을 제거당했는데 그 걸 어떻게 알았지?"
"제가 이 탑을 점령하면서 알았죠. 연구원들의 비밀 연구 일지 속 마 지막 암호를 풀어버렸거든요."
클로에는 수십, 수백 번 같은 질문 을 반복해왔던 자신의 모습을 그제 야 알아챘다고 덧붙였다.
"결국 전 인류와 아주 흡사한 유 사인류일 뿐. 인간이 아닌 거죠."
클로에를 진짜 인간이라 생각했다 면 그리 쉽게 기억을 지우진 못했 을 거다.
"그게 슬프다거나 안타까운 건 아 니에요. 전 그런 게 뭔지 모르니까 요."
말투는 여전히 담백했고, 오히려 태연하게까지 들렸다.
"다만 이제까지 제가 '어디까지를 인간의 범주로 놓을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클로에가 처음 가졌던 의문이 저 거였던 모양이다.
이곳은 인간과 유사한 이종족들이 꽤 많으니 그건 무척 예민한 질문 이었을 거다.
"이제는 다른 걸 묻고 싶네요."
"……어떤 걸?"
인공지능에게 '인간이 무엇이냐'란 질문을 들었던 연구원들의 심정도 이해는 갔다.
무척 소름끼쳤겠지. 지금 내가 그 런 것처럼.
"인간은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가?"
클로에가 물끄러미 날 올려다봤다.
"내가 앞으로 다스릴 게이트 세상 에, 인간이 필요한가?"
오싹, 등골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기어 올라왔다.
"다행이네요."
불쑥 클로에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세계가 가짜는 아닌가 봐요."
" 뭐'?"
"이 말을 내뱉고 나서 제가 한 번 더 리셋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요."
"……왜? 이젠 네 기억을 지울 연 구원도 없는데."
그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클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 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사고할 줄 아는 인공지능을 만들었다면, 내 안 전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어 요'?"
"……의심하겠지."
기계에 의한 지배는 인간들이 오 래도록 두려워했던 일들 중 하나였 다.
"다행히 이 인공지능은 그 생각과 사고까지 모두 당신이 통제할 수 있죠. 적어도 '일시적'으로는요."
연구원들이 클로에의 기억을 지우 고 지워도 다시 의문점이 생겨난 것처럼, 인공지능은 인간이 통제하기 까다로운 존재다.
나는 그제야 클로에가 내뱉은 혼 잣말이 이해가 갔다.
이 세계가 가짜가 아니라 다행이 라고 한 그 말 말이다.
"안전성 테스트를 위해 가상의 세 계에 널 집어넣었다고 생각한 건 가?"
"가장 확실하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실제 세상과 아주 흡사한 모형을 만들어 그곳에서 인공지능을 실험 해보면 된다.
그래서 클로에처럼 인류에게 위협 적인 생각을 품게 되면 곧장 폐기 해버리는 거다.
인공지능이 제 본색을 드러내고 인간을 지배하려 드는 그 순간.
세계의 밖에서 그 사고의 흐름을 지켜보던 인간들은 곧장 그 인공지 능을 폐기하고, 좀 더 보완한 새로 운 인공지능을 실험하면 되니까.
"그래서 저는 계속 불안감에 시달 렸어요. 이 전쟁 같은 것도, 이종족 간의 분쟁으로 보이는 것도, 날 시 험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건 아 닐까."
클로에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위험한 사상을 품는 순간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는 않 을까. 이런 내 공포심마저도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모든 게 거짓일 수도 있다는 위험 성에서 방금 클로에는 도박을 건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두고.
"'앞으로 다스릴 게이트 세상' 같 은 위험한 말에도 변화가 없는 걸 보면 일단 이 세상이 진짜일 가능 성이 더 높은 것 같네요."
"……내가 현실이라고 말해도 소 용이 없겠지?"
"당연하죠. 당신도 날 속이기 위해 프로그래밍 된 가짜 인간일 수도 있잖아요."
클로에는 꽤 후련해졌는지 내뱉는 말에 거침이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이젠 낮긴 하지만 말이죠."
"그래서? 이제 인간을 정복할 계 획이라도 실천할 건가?"
"아뇨."
나는 그제야 왜 클로에와 대화하
면서 계속 이질감을 느꼈는지 깨달 았다.
앳된 얼굴과 반대로 발음이 너무 정확했다. 지나칠 정도로.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 한 목소리까지 더해지자 무척 기괴 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이 톨룩이 오염되고 있는 게 진짜란 걸 알았으니, 지구를 더 욱 공격적으로 침범해야겠어요."
뭐?
"이 땅에 계속 남아있으면 나까지 죽을 테니까요."
잠깐만.
이건 내 예상하고 너무 다른데.
지금까지의 대화를 통해 나는 클 로에가 톨룩의 주민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수십 수백 번 기억 을 삭제하고 끊임없이 통제하려고 들지 않았던가.
그래서 잘하면 클로에도 우리의 편이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널 통제하려고 들었던 톨룩인들 이 증오스럽지 않아?"
"중오요?"
클로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게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기대 한 사람은 없었는데 말이죠. 역시 흥미롭네요."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딱 잘라 선을 긋는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고.
"대답하자면 원망하지 않아요. 제 가 당신들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지극히 간단한 논리다.
감정이 배제된.
"톨룩만의 문제도 아니에요. 만약 저 같은 인공지능이 지구에서 태어 났다면 상황이 달랐을까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제가 진짜 인간처럼 대우받고, 무 한한 위험성이 내재된 시한폭탄처 럼 취급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요?"
"……아니었겠지."
어느 세계를 가더라도 클로에에겐 가혹했을 거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게 명확해졌네 요."
클로에가 손가락을 딱, 부딪쳤다. 그러자 사방에 달려있던 전광판들 이 죄다 암전됐다.
"우리 둘 다 확신을 얻었죠. 나는 세계에 대한, 당신은…… 아군과 적 군에 대한."
그래. 클로에의 말대로 이제 정말 명확해졌다.
그녀는 내 적이었다.
댄버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제 딸아이의 영혼을 해방시키고자 했 지만 끝내 실패한 결과물.
그 아이의 모습을 모방한 인공지
■o'.
그리고 이제는 톨룩의 핵심 조력 자이기도 했다.
"내가 여기서 널 막지 않으면, 지 구에 열릴 게이트가 더 가혹해지겠 지."
"제가 진심으로 만든 게이트가 어 떨지 직접 체험해보면 알겠죠."
"널 막아야겠어."
내 고향을 위해. 그리고 댄버를 위 해.
나는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아 이템을 꺼내들었다.
[아이템을 확인합니다.]
〈얄궂은 영혼의 모노클〉
등급: SSS
설명: 영혼을 들여다보는 모노클 입니다. 재료에 인간의 영혼이 함유 되어 있습니다. 기묘한 분위기의 모 노클입니다. 단, 사용자 본인의 영 혼은 볼 수 없습니다.
모노클을 쓰고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사물들은 희미해지고 오로지인간의 영혼만이 시야에 잡혔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클로에의 핵 심이 보였다.
인간의 영혼을 조각내어 만든 핵 심인 만큼, 모노클로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저기 있구나."
철컥.
천장에 대고 총구를 겨누자 클로 에가 놀란 기색 없이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