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하암〜."
이사벨라가 작게 하품을 했다.
"속은 좀 어때."
"괜찮아. 머리가 좀 아프긴 하지 만."
이사벨라는 반쯤 의자에 눕다시피 했다.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하고 잠 옷 차림인 걸 보면 머리가 제법 아 픈 모양이었다.
"다니엘이 다녀갔다며."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 던히 애를 썼다.
이사벨라의 입에서 다니엘의 이름 이 나오는 게 어쩐지 기묘한 느낌 이었다.
"……신세를 졌네. 골치 아프게."
"하루 묵고 가라고 했는데 그냥 돌아가겠다더라고. 그래도 씻고 새 옷 입혀 보냈으니, 최소한의 예의는
차렸어."
"고마워."
이사벨라는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 을 지그시 눌렀다.
고운 얼굴에 얄팍하게 금이 간다.
"그렇게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는 데..
"들었어. 중립파 쪽 비위를 맞추느 라 그랬다며."
"능구렁이 같은 영감들. 이리저리 간만 보느라 바쁘지.''
이사벨라가 이를 아드득 갈았다.
"빌려준 옷도 받아야 하고, 제복도
돌려줘야겠네."
"내가 다녀와도 되고."
내 능력이면 훌쩍 다녀올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이사벨라는 작게 고개 를 저었다.
"아니야. 나도 할 말이 있어서."
"……무슨 말?"
나는 이사벨라 몰래 바짝 긴장했 다.
정작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어투로 대꾸해왔다.
"별 건 아니고. 조만간 있을 사냥 대회에서 5황자한테 몰래 공을 몰
아주는 게 어떻냐고 말해보려고."
나도 내 나름대로 바쁘지만 이사 벨라도 정신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내가 직접 사냥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3황자에 비하 면 5황자는 기사 숫자가 적기도 하 고……
고작해야 사냥 대회긴 해도, 치열 하게 굴러가는 궁중 암투에선 작은 일까지 신경 써야 하는 법이지.
이사벨라가 잘 해주고 있는 것 같 다.
그보다 나는 어젯밤 보고 만 것에 대해 묻고 싶었다.
"……어젯밤에 본 건데."
나는 조심스럽게 서두를 열었다.
"그 흉터. 어쩌다 생긴 거야?"
이제는 마법으로 가렸는지 목덜미 가 매끈하다. 잠옷 차림인데도 화려 한 보석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이사벨라는 잠시 놀란 눈을 하더 니, 이내 씨익 웃었다.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이야. 이건 이 저택 안에서도 아는 사람이 손 에 꼽힐 정도거든."
"귀족 부인한테 흠이라?"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사실 그 런 건 사소한 일이지."
이사벨라는 가볍게 제 목덜미를 손으로 훑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어떻 게 비욘드 출신인 내가, 이사벨라 멜몬드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는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회귀 전에 이미 들어서 대충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그다지 즐거운 얘 기도 아니었다.
"……바꿔치기한 거잖아."
" 맞아."
이사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 게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잠옷 원피스가 촤르륵 원을 그린 다.
"'원래' 이사벨라 아가씨는 평민 세상에 관심이 많았거든. 몰래 시장 에 나와 평민 아이들과 어울려 놀 곤 했지."
그런 그녀에게, 귀족 가문은 감옥 처럼 느껴졌을 거다.
"멜몬드 백작가와 약혼이 성사됐 을 때, 진짜 이사벨라는 도망치기로 결심했어. 그리고 그 빈자리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야."
시장 바닥에서 그녀와 어울리던 평민 아이들 중, 하필이면 이사벨라 가 대역이 된 것은 운명의 장난일 까.
"진짜 이사벨라가 워낙 천방지축 이었던 탓에 사교계 데뷔를 안 해 서 얼굴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만…… 이런 흉터는 꽤나 큰 흠집 이거든. 그래서 감추기로 했지."
"원래 이름은 뭐지?"
나는 줄곧 그녀를 '이사벨라'라고 불러왔다. 단 한 번도 진짜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그냥 이사벨라라고 불러. 진짜 이
름도, 신분도 다 버린 채로 난 여 기서 '이사벨라'로 살아가고 있으니 까."
이사벨라가 되기 위해 그 정도는 각오했단 말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새 로운 신분으로 살아갈 각오를 했기 에 과거의 이름은 무의미하다는 선 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흔적'이야. 이사벨라가 처음부터 이사벨라가 아니었다는 유일한 흔적……
이사벨라는 조금 씁쓸한 어조였다.
"말투도, 성격도, 습관도. 전부 사
라졌지만 내게 유일하게 남은 것 중 하나지."
"화상 흉터라면 신관에게 치료받 아도 됐을 텐데."
왜 아직까지도 귀찮게 매일 마법 으로 가리는 걸까.
이사벨라에겐 이제 신관을 만날 자격도 권력도 있을 텐데.
"그건…… 말하자면 좀 복잡한데."
이사벨라가 멋쩍게 웃었다.
"얘길 들어보면 어린 내가 비욘드 앞에 놓여 있었다 하더라고. 근데 그냥 버리고 간 게 아니라…… 옆
에 둔 쪽지에 이 흉터를 지우지 말 라고, 그게 내 생명을 구할 거라고 신신당부하는 말이 적혀 있었대."
"흉터를?"
"이상한 일이지?"
이사벨라는 태연한 낯이었지만 나 는 갈수록 퍼즐 조각이 착착 들어 맞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뭔진 모르지만 그냥 지워버리기 엔 어쩐지 찝찝하더라고."
이사벨라는 뒤이어 '아마 내 친어 머니는 어디서 미신 같은 걸 들었 던 모양이야.' 하고 덧붙였다.
나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침묵했다.
'다니엘은 이사벨라를 찾고 있을 텐데……. 과연 이사벨라도 자기 원 래 가족을 찾고 싶어 할까?'
지금 이사벨라에게 가족은 비욘드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비욘드에서 자란 덕인지, 비욘드의 어른들은 특히나 이사벨라를 제 딸처럼 아끼는 게 눈에 보였다.
물론 이사벨라가 로스 가문 사람 이란 걸 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 는 건 없겠지만…….
'다니엘에게도 평생 복수를 다짐할 정도로 아픈 기억인데. 다시 그 기 억을 되살리는 게 좋은 일일까.'
내가 섣불리 판단할 수 있는 문제 가 아니라 더욱 고민스러웠다.
내 얼굴이 좀 미묘했는지 이사벨 라가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라면 알아도 상관없겠지. 이미 비욘드의 일원이기도 하고."
"……만약에."
나는 불쑥 물었다.
"만약 네 친부모가 찾아온다면 어
떨 것 같아?"
너무 뜬금없는 질문인 탓일까. 이 사벨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네 아까부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가뜩이나 머리도 아파 죽겠는데."
"아니. 별 건 아니고…… 그냥 궁 금해져서.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괜찮아."
내가 황급히 수습하자 이사벨라는 턱을 괴고 흐음, 콧소리를 냈다.
"어릴 적엔 그런 상상을 하기도 했지. 내 진짜 부모가 나타나서 나 한테 이렇게 말해주는 거야."
이사벨라는 꿈결을 거니는 듯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널 잃어버리 고 한참을 찾았단다. 이제야 널 찾 게 됐으니 우리와 함께 돌아가 행 복하게 살자꾸나'……. 뭐, 그런 거."
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할 때. 눈칫밥 얻어먹으며 계속 해서 내가 작아지는 것 같을 때.
기적처럼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서
'이제 집으로 가자, 서하야.' 하고 말해주길 바랐었다.
"뭐. 어릴 때니까. 그때는 그런 평 범한 가정이 부러웠거든. 물론 비욘 드 안에서 나도 사랑받으며 자랐지 만, 진짜 엄마 아빠가 있는 건 또 다른 느낌일 거 아냐."
아무리 아낀다 해도 제 자식을 살 피는 부모만큼 살뜰하진 못했겠지.
아니면 결국 그들도 '비욘드의 아 이들'을 사랑하는 거지 '이사벨라' 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 다.
"물론 이젠 안 그러지. 비욘드가
내 집이고 가족이란 걸 아니까."
이사벨라는 눈부시게 웃었다. 환한 미소가 얼굴 가득 꽃핀다.
"그래서 친부모도 별로 궁금하지 않아. 날 진짜 버렸던 건지, 잃어버 린 건지. 이 흉터는 무슨 의미인 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고 싶기 도 했는데. 이제 와선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나는 그런 그녀를 한참 들여다보 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로스 가'보다는 '비욘드'의 사람인 그녀에게 내가 괜한 걸 알 릴 필요는 없겠지.
우연히 알게 된다면 몰라도 내가 나서서 알려줄 일은 아닌 것 같았 다.
"고마워. 많이 참고가 됐어."
"무슨 일인진 몰라도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을 거야. 원래 그런 가정사엔 끼어드는 거 아니거든."
자신의 일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을 얹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 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겠어. 그러려고 했어."
"그래. 나도 톰 아저씨네 맨날 부 부싸움 하는 거 끼어들면 결국엔
나만 골치 아파지더라!"
이사벨라는 무어라 투덜투덜하더 니 다시 이마를 부여잡고 침대에 누웠다.
"으으, 머리야……
"마저 쉬어. 따뜻한 차라도 내오라 고 할까?"
"응. 미지근하게."
탁.
나는 이사벨라를 방 안에 두고 밖 으로 나왔다.
아직도 좀 껄끄러운 부분은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내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니 그저 지켜볼 수밖에.
'다니엘이 언제쯤 눈치챌까.'
둘 사이가 마냥 좋은 것도 아닌데. 그토록 찾아 헤매던 혈육이 이사벨 라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하려나.
'둘 다 붉은 머리카락인 이유가 있 었네.'
아주 드문 색깔인 건 아니지만 그 둘처럼 선명한 붉은색은 드물었으 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영 영 묻어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저, 소장님."
박노아가 퀭한 눈을 하고서 백목 련을 불렀다.
"왜 그러시죠?"
반면에 백목련은 깔끔한 옷차림에 평소처럼 냉철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비실대던 박노아가 겨우 손을 들 고 질문을 던졌다.
"오늘 그날 아닌가요? 한서하 씨 유가족들하고 역천이 각자 기자회 견하는……
"맞아요."
"안 보셔도 되겠어요?"
박노아는 '전부터 그 사람들 되게 싫어하셨잖아요.'라는 말을 겨우 삼 켜냈다.
한서하의 유가족들은 조금이라도 더 재산을 빼먹으려고 갖은 수를 쓰고 있었는데, 개중 하나가 이번 기자회견이었다.
"헌터들은 애초에 위험성이 높아
늘 사망을 대비하고 다니잖아요. 밝 혀진 바에 따르면 한서하 씨의 재 산은 대부분 그 표씨 남매 앞으로 되어 있다던데……
"유가족이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 죠. 표씨 남매가 일부러 유서를 조 작한 게 아니냐면서요."
덕분에 사방이 아주 시끄러웠다.
"사망한 헌터는 언급하지 않는 게 불문율인데…… 그 유가족들 때문 에 아직도 이 난리라니까요."
백목련이 차게 비웃으며 대꾸했다.
한서하의 주변인이었던 이들이야, 유가족들의 뻔한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지만 외부인들은 그러지 못해 서 말들이 많았다.
특히나 어린 시절 맡아주던 때 찍 어둔 사진을 공개하면서 눈물을 흘 리는 모습은 거의 배우 수준이었다.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라도 보는 게……
" 아뇨."
백목련이 박노아의 말을 끊어냈다.
"신경 끄기로 했어요."
" 예?"
"헛소리에 관심을 주면 더 날뛰는 법이거든요. 법적으로 한서하 헌터
의 재산 분할엔 아무 문제가 없고 조사 결과 조작의 흔적도 나오지 않았으니, 더 이상 그런 같잖은 감 성놀음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소리엔 은은 하게 분노가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