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챕터: 누군가의 사정
-슬슬 돌아올 준비를 하는 게 좋 겠구나.
테오도르가 내게 충고했다.
"생각보다 빠르네."
-빠르긴! 여긴 아직도 난리야! 네 재산을 어떻게 분할할지 네 친척이라는 작자들이 소송을 걸었다.
"그럴 줄 알았어."
사실 내게는 남과 같은 이들이지 만, 법적으로는 일단 내 친족이니 뭐라도 더 주워 먹고 싶어 안달이 겠지.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내용이었 다.
-말도 마라. 역천과 청사가 힘을 합쳐서 전 세계를 이 잡듯이 뒤지 고 있는데, 속도가 상상 이상이야! 둘 다 잠은 자고 있는 건지 의심스 러울 지경이라고.
"잠은 좀 자야 할 텐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나!
혜원 언니가 밤새워가며 날 찾고 있을 걸 생각하니 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긴 했다.
잠은 자면서 지내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서자 테오도르가 답답하 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럼 뭐가 문젠데."
-전 세계를 다 뒤져서 노이트 리 볼버가 어디에도 없단 걸 알게 되 면, 그들은 다시 날 찾아와 온갖 재촉을 다 할 거란 말이다…….
테오도르의 목소리는 반쯤 떨리고
있었다. 꿀꺽, 침 넘기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렇게 시치미 뗐는데 이제 와서 네 행방을 안다고 말하면 정말 날 죽일지도 모른다…….
"죽이진 않을 거야. 넌 연금술사로 서 중요한 전력이고, 톨룩에서 귀화 한 첫 번째 인물이니 상징적인 의 미도 있으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다! 으으, 넌 절 대 모르겠지…….
이운우나 혜원 언니가 경우를 모 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설마 테오도르를 해치기야 하겠는가.
엄살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 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걸 잘 알겠어. 재료는 다 준비된 거야?"
-그래. 이번엔 저번처럼 무모하게 굴지 말고, 정확히 예견된 일정에 맞춰서 움직여야 해.
"알아. 저번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내 죽음 말곤 선택지가 없었으니 까.
이론만 완벽했던 차원이동 장치가 잘 작동한 건 정말 천만다행인 일 이었다.
-성공률이 높지 않다 보니 다시 준비하는 데 애먹긴 했지만, 곧 완 성될 것 같구나. 너도 마음의 준비 를 하고 있거라.
"알겠어.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 해."
뚝
연락이 끊기자 기다리고 있던 이 사벨라가 한마디 거들었다.
"항상 제멋대로인 건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똑같은 모양이네."
" 내가?"
"그래. 네가."
이사벨라와 나는 그동안 제법 친 해진 상태였다.
테오도르와 안전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이사벨라의 집 안 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비욘드와 관련된 일들을 수행하면 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사벨라의 말에 내가 금시초문이 라는 듯 어리둥절해하자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뭐, 그런 점이 제멋대로라는 거 지."
영문을 모를 말들이었다.
"그래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은데. 더 할 일이라도 있어?"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사상 선전도 잘 되고 있는 것 같 고, 마력초를 이용해서 자금 문제도 해결했으니 내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없어 보였다.
이 이상 간섭하는 것도 이상한 일 이고.
"……혹시 별 다른 일 없으면, 조 만간 열리는 무도회에 같……
"아. 생각났다."
이사벨라에겐 미안하지만 무도회 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예법 같은 걸 잘 모르기도 하고.
"난 춤도 못 추고, 신분도 불명확 해서 무도회에 같이 가긴 어려울 거야."
"그렇긴 하지만…… 내 시녀라 하 거나 변방 작은 영지의 귀족 영애 인 척하면 상관없을 걸."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곤란해서."
5황자나 에녹이라도 거기 껴있으 면 일이 순식간에 꼬여버릴 거다.
내 말에 이사벨라도 어쩔 수 없단 걸 알았는지 체념한 듯한 얼굴을 했다.
"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게 있어."
"뭐길래?"
"……잠깐 다녀올게."
"뭐? 지금?"
이사벨라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들어오느
라 이미 바깥은 해가 저문 지 오래 인 한밤중이었기 때문이다.
"웅. 가봐야겠어."
그 애는 너무 오랜 시간 기다렸으 니까.
하늘 높이 솟아오른 하얀 첨탑.
황제 개인 소유물을 쌓아놓은 그 탑에 갇혀있는 한 소녀를 기억한다.
엘리사 클라우드. 에녹의 여동생으 로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첨탑에 갇힌 카나리아를 말이다.
팟!
너무 한밤중에 찾아온 탓일까. 아 이는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늘 펜던트가 달려 있던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나 허전했다. 펜던트가 제 본래 주인을 찾아간 탓이었다.
"엘리사."
나는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엘리사. 내가 왔어."
"으으..9"
엘리사가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았 는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을 끔뻑, 끔뻑 하더니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요정님? 요정님 맞아요?"
아차. 그런 낯간지러운 설정이었 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그치만, 요정님은 분명…… 요만 했는데……?"
엘리사는 엄지와 검지로 내 예전 투사체 크기 정도를 어림짐작해 보였다.
그야 그때는 그렇게 작았는데 갑 자기 사람 크기가 되어 돌아오면 당혹스럽긴 하겠지.
"쉬잇. 내가 여기 찾아온 것도, 갑 자기 모습이 커진 것도 비밀이야. 지켜줄 수 있지?"
"헙I 0日日븝|" W . ---- = .
엘리사가 곧장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무어라 웅얼거린다.
소리가 먹혀 제대로 들리질 않았 다.
"아니. 지금 당장 말고. 다른 사람
한테 말하면 안 된다는 얘기였어."
"아무한테도요?"
"그래. 엘리사네 오빠한테도."
에녹이 알면 더더욱 큰일이니 입 단속을 철저히 해야 했다.
에녹의 얘기가 나오자 잠시 고민 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크게 고 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오빠도 비밀이 많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할 거예요! 엘리사 도 비밀이 있을 수 있는걸요!"
"그럼, 그럼."
엘리사는 언제 졸렸냐는 듯 두 눈
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날 응시했다.
"저, 그럼 요정님! 오늘 하루도 제 친구가 되어 주시는 건가요?"
"나야 항상 엘리사와 친구였지. 저 번 그 순간부터 계속."
"와아!"
와락, 엘리사가 날 꼭 끌어안았다.
"다시 찾아와줘서 기뻐요……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애틋하 다.
말로는 기다리는 것에 지쳤으니 돌아오지 말라 했지만 내심 사람이 그리웠던 게 분명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비앙카는?"
" 비앙카는……
엘리사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어느 날부턴가 안 나왔어요.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항상 이렇게 사 람이 바뀌곤 했으니까, 그냥 비앙카 도…… 더 이상은 절 보고 싶지 않 은 거겠죠."
갑자기 사람이 바뀐 모양이다. 게 다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 것 같고.
'그럴 것 같진 않았는데.'
행동이 거칠긴 했지만 엘리사를
불쌍히 여기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곧장 화제를 바 꿔 다른 이야기들을 조잘댔다.
"아! 그런데, 요즘 들어 오빠가 절 자주 찾아와줘요! 갑자기 어쩐 일 일까요? 상사가 오빠한테 일을 덜 시키나 봐요."
요즘 게이트 수가 줄었나?
나야 최근에 톨룩에 있어 자세한 동향을 모르니, 절로 귀가 쫑긋해졌 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글쎄요? 저는 날짜 세는 법을 잘
몰라서..
아차. 탑 안에 갇혀있는 엘리사에 게 시간 감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끼니를 챙겨주는 하녀가 있긴 하 지만 그마저도 점심인지 저녁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먹는 것 같 았으니까.
"아마도 엘리사를 더 자주 보고 싶어진 모양이야."
아니면 황제에게 간청해서 더 자 주 보게 해달라고 애원했거나.
뒷말은 엘리사를 위해 삼켜냈다.
"그렇겠죠? 헤헤, 맞아요! 오빠도
자주 찾아오고 요정님도 제 친구가 됐으니 요즘 이렇게 행복한 날들이 더 있었나 싶어요."
엘리사가 황홀경에 젖은 듯, 달콤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리사. 이 탑 밖으로 나가고 싶 지 않아?"
주제넘은 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엘리사가 어떠한 이해관계 가 얽혀 이곳에 매여 있는 거라면, 잠깐 산책을 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그러나 엘리사는 무척 단호했다.
"안 돼요."
"잠깐 나갔다 다시 돌아오는 건?"
"그것도 싫어요……. 전, 전 그냥 여기가 좋아요. 외롭지만, 엘리사를 싫어하는 사람도 엘프도 없는걸 요!"
' 엘프도'?
그 말이 무척 기묘해서 나는 되물 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사를 싫어하는 엘프가 어디 있다고 그래."
이곳은 인간들의 세상인 것을.
그러나 엘리사는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 흉측한 귀 때문에 다들 절 싫어하는걸요. 오빠랑 요정 님 말고는 전부 그랬어요."
귀?
나도 모르게 엘리사의 귀에 시선 이 꽂혔다.
전에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한 적 이 있었지.
'엘프라기엔 짧고, 인간이라기엔 긴…… 어중간한 길이의 귀.'
그때는 그냥 그 정도 감상평에 그 쳤는데, 엘리사의 말을 들어보니 대충 예상되는 게 있었다.
"……혼혈이구나."
인간과 엘프의 혼혈, 하프엘프.
그들은 인간에게도 엘프에게도 환 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이었다.
내 말에 엘리사가 고개를 푹 숙였 다.
"……맞아요."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잔뜩 밴 것 은 설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었다.
"그, 그래도 요정님은 괜찮죠? 요 정님 귀는 둥글고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저랑 친구 해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엘리사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제가, 피가 섞인 게 더러워서, 그 래서 친구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런 건 상관없어, 엘리사."
애초에 난 엘프도 톨룩인도 아니 니까.
겉보기엔 톨룩인과 아주 유사해도 결국 난 지구의 사람이었고, 그래서 엘프와 인간의 피가 섞인 것 정도 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이 세상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 지만.
"걱정 마. 네 친구가 되겠다고 한 걸 철회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요? 다행이다……
엘리사는 눈물 맺힌 눈가를 애써 감추며 웃었다. 겨우 끌어올린 입꼬 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다행이다. 제가 괜한 소릴 했나 봐요. 요정님은 그럴 분이 아닌 데……
안쓰러운 마음에 엘리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요즘 오빠가 이상한 소릴 해서 더 불안했던 것 같아요."
"……무슨 소릴 했는데?"
에녹이 뭔가 말했다고? 그는 자신 을 문관이라 속일 정도로 엘리사를 감싸고돌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엘리사를 불안하게 만 드는 말을 했다니?
"그게…… 자꾸만 만약 오빠가 너 무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으면, 100 번 넘게 잠을 잤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엘리사가 머뭇거리며 뒷말을 이었
다.
"그땐, 귀를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 도여길 빠져나가 인간들 틈에서 살라고 했어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 지?
'에녹이 죽음을 각오할 만한 일이 생겼다……?'
대외적으론 그의 호적수였던 내가 목숨을 잃어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어야 하는 때 아닌가.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