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베아트리스는 뿔을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나야 마력초가 누구한테 가든 상 관없지〜. 인간한테 파는 것보다 값 도 잘 쳐준다면야 나쁠 것도 없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거래에 성공할 것 같아 기쁜 표정을 지으려는 순 간, 베아트리스가 뒷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 귀염둥이가 인간 세계 에 발을 걸쳐두고 있어서!
생긋 웃는 얼굴이 얄밉다.
-내 귀염등이 체면을 생각해서라 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 미안!
아마도 저 '귀염등이'는 권성민을 말하는 걸 거다. 그가 황제에게 협 력하고 있단 얘긴 들은 바 있으니 까.
'마력초를 독점할 수 있으면 여러 모로 유용하긴 했을 텐데……
마력석 생산을 비욘드에서 독점할 수 있었을 테니까.
"3배로 쳐주지."
-값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나도 이제 마왕인데 내 심복들에게 자비 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어?
"4배."
-100배여도 전부는 안 돼.
그제야 벨제부브도 전부 구입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바꿨 다.
"그럼 전부 말고 얼마나 팔 생각 이지?"
-꺄하하! 그러게? 도련님이 달라 고 하니까 그냥 막 주기 싫네?
베아트리스가 자지러지는 목소리 로 까르르 웃어댔다.
"베아트리스……
벨제부브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로 그녀를 부르자, 베아트리스가 깔 깔대던 것을 잠시 멈춘다.
-흐음〜. 전부는 어렵고. 절반 정 도는 될 거 같은데.
-베아트리스 님!
-절반 정도는 괜찮아, 괜찮아!
권성민이 작게 그녀를 불렀지만 베아트리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 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뭐지? 값은 얼마든지 쳐주겠다."
-돈은 필요 없어! 센티피드가 재 산을 잘 쌓아둔 덕에 지금 충분히 풍족하거든.
"그럼 뭘 원하지?"
과연 베아트리스가 무슨 조건을 제시할까. 잠깐 침묵이 흐르는 동안 긴장감이 감돌았다.
-있지. 난 우리 도련님이 그렇게 도련님 모습인 게 너어~무 좋아!
벨제부브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옛날 생각이 나잖아! 그래서 말
인데, 도련님 옛날처럼 차려입고 영 상석 좀 찍어주면 안 돼?
"안 된다."
벨제부브가 딱 잘라 거절했다.
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는지 '으 윽' 하고 침음성을 냈다.
"……다른 건 원하는 게 없나."
-응! 없어!
단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빠른 대꾸였다.
나는 벨제부브를 압박하려는 목적 으로 단검으로 벽을 툭툭 두드렸다.
'피 얻고 싶으면 순순히 따르는 게 좋을 텐데?'
그 속에 숨은 뜻을 알았는지 벨제 부브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벨제부브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화를 꾹꾹 눌러 담는 목소리로 대 답했다.
"……알겠다. 승낙하지."
-와! 진짜? 내 컬렉션에 추가해둘 게! 특별히 개인 소장할 테니까 걱 정 말구!
"하아……
-그럼 마력초 절반은 도련님 마왕
성으로 보낼게! 영상석도 같이 보 낼 테니까 영상 찍어서 보내줘야 해, 알겠지이?
"알겠으니 이만 끊어라."
-아, 그런데 영상 찍을 때 그거 입어주면 안 돼? 왜, 어릴 때 자주 입었던 그 푸른색 정장에 지팡이까 지 세트였……!
팟!
벨제부브가 뒷말을 듣지도 않고 연결을 끊어버렸다. 은은하게 빛나 던 문양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는다.
"이제 됐겠지."
"물론이지. 도련님."
"그렇게 부르지 마라."
벨제부브가 차갑게 대꾸했지만 어 린아이 모습이라 위엄은 없었다.
"난 약속을 지켰다. 너도 계약을 이행할 때야."
내 피를 먹고 싶단 말을 거창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나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팔뚝을 내밀었다.
"내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만이야."
"물론이다."
콰득.
벨제부브의 송곳니가 살결을 파고 들었다.
♦ ♦ *
우우응!
마력석이 맑은 빛깔로 빛났다. 안 에 자그마한 알갱이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자신의 활동성을 입증한다.
"서, 성공입니다!"
연구원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외쳤다.
"마력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추출 했습니다! 이 정도면 꽤 상등품입 니다. 당장 내다 팔아도 손색이 없 을 정도입니다."
"드디어……
올리버가 감격에 찬 얼굴을 했다.
"드디어 우리도 이사벨라 님에게 기대기만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뒤이어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거 들었다.
"마력석을 내다 팔면 저게 다 얼 마야!"
"항상 애물단지였는데 결국 해냈 네요."
"자금 조달은 이거면 충분하겠어 요!"
올리버가 저벅저벅 걸어와 내 앞 에 섰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푹 숙여 내게 감사 인사를 한다.
"가난에 쫓겨 우릴 찾아온 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 귀족들의 횡포에 못 이겨 도망친 이들을 돕는 데 유 용하게 쓰일 겁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멋쩍은 느낌을 감출 수가 없 었다.
"와, 진짜 마계에 다녀온 거야?"
셀이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마력초가 마계에서만 자란다는 얘 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혼자서?"
셀이 거듭 묻기에 뒷말을 흐렸다.
마계가 인간들에겐 지옥이나 다름 없지만, 나는 게이트를 누비면서 그 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오랜 시간 적응해왔다.
하지만 비욘드의 사람들이 과연 그걸 견딜 수 있었을까. 글쎄다.
'견딜 수 있었다 하더라도, 내 공 간 간섭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홀로 가는 게 더 나았을 거야.'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봤을 때 솔 로 플레이가 최선의 선택지였다.
"마력초가 필요한 줄은 어떻게 알 고?"
"그건 비밀이지."
셀이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마력석 채취엔 마력초가 필요하
다' 주장하고 이들을 설득하는 것 보단 차라리 나 혼자 움직이는 게 훨씬 빠르다.
'이렇게 직접 가져와서 보여주는 편이 낫지.'
그렇게 하면 이견도 없이 깔끔하 다.
"마력석은 당장 팔지 말고 조금 기다렸다가 파는 게 나을 겁니다. 황실에 납품되는 마력초의 양이 줄 어서 마력석 값이 폭등할 테니까 요."
내 조언에 올리버는 묵묵히 고개 를 끄덕였다.
그도 이제 내 말을 귀담아듣는 편 이 더 낫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 다.
"와, 어떻게 혼자서 마계에 갈 생 각을 하지? 물론 강한 건 알지만 거기서 마왕이라도 마주치면 끝장 인데?"
셀이 거듭 호들갑을 떨었다.
이 마력초를 구해준 게 그 마왕이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가 겨우 내려갔다.
"별일 없었어. 결과적으로 마력초 도 잘 구해왔고."
피는 좀 빨리긴 했지만. 팔뚝에 붕 대를 칭칭 감은 것 말곤 다친 데도 없었다.
"이상하다니까, 정말……
셀이 작게 중얼거리는 걸 애써 모 르는 척했다.
* * *
사르륵.
옷자락이 부드럽게 스친다.
여인이 한 손엔 등불을, 다른 한
손에 지팡이를 든 채로 미소 짓는 다.
"간만에 오셨군요."
두 눈을 감은 사서. 메티스가 서고 를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여긴 변하는 게 없군."
카를로스가 메티스를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서고가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 서가 먼저 변하겠습니까."
"보통은 변하거든."
카를로스는 익숙한 듯이 메티스의 등불 앞에 섰다.
"오늘은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오 셨습니까."
"'모래시계'에 대한 기록을 다시 보려고 왔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불의 빛 이 길게 늘어지며 한쪽 방향을 가 리키기 시작했다.
메티스가 앞서 등불 위를 걸었고 카를로스가 그 뒤를 따라갔다.
황제인 그가 누군가의 뒤를 쫓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모래시계'에 대한 언급은 아주 오래전부터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어떤 기록을 보길 원하십니까?"
"최근 300년간의 기록으로."
메티스가 지팡이로 바닥을 톡, 내 려 쳤다.
화아악!
그러자 그 지점부터 시작해서 바 닥에 회로 같은 것이 환하게 빛나 기 시작했다.
회로는 바닥을 타고 사방으로 뻗 어 나갔다가 서서히 한쪽 방향으로 모였다.
"이 빛을 따라가면 원하시는 걸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카를로스는 칠혹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따라 발을 내 디뎠다.
사방이 온통 어두워 아무것도 보 이질 않았다.
그러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 임도 없었으니, 이 끝에 그가 원하 던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타닥.
하얀 빛무리가 허공에서 고운 자 태를 뽐내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대담하게 손을 뻗어 그 빛무리를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파도와 같은 정보의 흐 름이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물결처럼, 피할 수 없이 그 흐름에 휘말리고 말았 다.
카를로스는 엄습해오는 두통에 인 상을 살풋 찌푸렸다.
" 흐음.
갖가지 정보들 사이에서 그는 원 하던 것을 찾아냈다.
고대어가 새겨진 석판을 유물로 발견해낸 것이다.
지금은 멸망했지만 이 대륙에는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가 발전했었 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점령했고 모든 것을 다룰 줄 알았다고 한다. 심지 어 미래마저도.
후손을 위해 남겨둔 미래의 파편 들이 유물처럼 발견되곤 했다.
厂세상이 타락하고 오염하여 그 끝이 보일 때, 시간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행하라.」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방도는 그것뿐이니. 현명한 자들은 내 말을 따를 것이고, 아둔한 자들은 내 말 을 부정할 것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수레바퀴는 멀고도 가까운 곳, 한 꺼풀 넘어 도달한 곳에 있을지 어다.J시간의 수레바퀴.
그 해석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 지만, '시간의 수레바퀴'는 톨룩에 서 모래시계를 지칭하는 은어로 통 용되고 있었다.
한 바퀴 돌리면 사르르 모래를 흘 리는 그 아름다운 시계 말이다.
오염이 극에 달한 지금 이 시점에
서, 이 예언대로 모래시계를 뒤집는 게 절실했다.
'한 꺼풀 넘어 도달한 곳……
카를로스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것만 같았다.
차원의 벽을 넘어 도달한 또 다른 세계. 가깝고도 먼 그곳.
지구 말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인공 지능을 만들고, 땅따먹기 형식으로 전쟁 양 상을 유도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이 때문이었다.
지구 어디인지는 몰라도. 어딘가에
이 예언 속 모래시계가 존재하리라 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지구가 오염되어도 상관없지.'
지구를 적당히 오염시켜 동조율을 높인 다음, 그곳으로 넘어가 모래시 계를 되돌리면 되는 일이다.
약간의 오염은 말끔하게 사라질 테니까.
'지구의 어디에 있을지는 도무지 모르겠군.'
뭐라도 더 힌트가 없을까 싶어 찾 아왔지만 역시나 다 아는 내용들뿐 이었다.
다만 예언이 적혀 있던 석판은 반 쯤 쪼개진 것으로 그 뒷내용은 아 직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흐름을 보면 이 뒷부분에 더 자세 한 얘기가 나올 법도 한데……
예언석은 신묘하게도 늘적절한 시기에 맞춰 출토되곤 했으니, 원한 다고 바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 었다.
카를로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눈 을 떴다. 여전히 그는 깜깜한 어둠 속에 있었다.
"원하는 건 찾으셨나요?"
바닥의 불빛을 따라 되돌아오자 메티스가 웃으며 그를 반겼다.
카를로스는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그다지."
"이런. 안타까운 일이군요."
아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 조한 목소리였다.
"다음에 또 오도록 하지."
"폐하. 주제넘게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막 도서관을 나서려는 카를로스를 메티스가 불러 세웠다.
"뭐지?"
"제 후임 '메티스'를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메티스가 해사하게 웃었다.
"곧 도서관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요."
곧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은 밀한 충고였다. 카를로스는 코웃음 을 쳤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저 역시 그러길 바란답니다."
메티스는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