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챕터: 그녀의 행방
이글이글 불타는 용암이 검은 돌 덩이 사이로 흘러내린다. 들끓는 소 리가 살벌하다.
바위틈을 뚫고 자라난 식물들은 푸른색과 보라색 빛깔을 뽐낸다.
투둑, 툭.
가방에서 육포를 뜯어 입에 넣었 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5일째. 일명, '마계'라고 불리는 마족들의 땅이 다.
척박한 환경 탓에 인간들이 살긴 어렵지만, 이 마족들은 태어난 곳이 척박할수록 강하기 때문에 이런 곳 을 선호했다.
비욘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갑자기 이곳으로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
드래곤 협곡 틈새에 쌓여있는 마 력석들 때문이다.
-이거…… 마력석이네요.
-우리에겐 마력석을 채굴할 기술 력이 없어서 완전 그림의 떡이야. 아직 연구 중이거든.
자수정처럼 보라색으로 일렁이는 마력석들이 비욘드 회의실 한편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본 결과 연구도 상 당 부분 진척됐지만, 마력석을 추출 할 때 마력의 손실 없이 캐내는 법 에서 꽤나 애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술은 지구에서도 연 구를 진행해 성공한 바 있었다.
'비욘드에서 한참 헤맬 만도 하지. 마력석 채취의 핵심 재료는 바로 여기. 마계에 있으니까.'
그 재료를 채취해 연구실에 넘기 기 위해 마계까지 들어왔는데. 도통 찾기 어렵다.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듣기로는 마계에서만 자라는 식물 로 보라색 잎사귀에 은색 줄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했다.
일명 '마력초'.
직접 섭취하면 온몸의 마력 통로 가 굳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독 초다.
'마계에서 제국 황실로 비밀리에 공급하고 있으니 어딘가에 대량 생 산지가 있을 텐데.'
마계가 아주 넓은 것도 아니니 금 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벌 써 5일째 헤매고 있다.
무작정 마계를 뒤지는 것이 생각 보다 훨씬 무식한 짓이었단 걸 실 감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곳 중 찾아 보지 않은 덴 마왕성 근처뿐인 데……
유통의 편리성을 생각하면 마왕성 근처에 군락을 만들어뒀을 가능성 이 크다.
마계를 다스리는 3개의 왕좌.
벨제부브, 이그니스 그리고 센티피 드.
센티피드가 죽었으니 다른 마족이 그 자릴 차지했을 터였다.
'이그니스의 마왕성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어.'
용암호수에서 태어난 그는 마왕성 도 용암호수 위에 지었는데, 때문에 이그니스 말고는 누구도 드나들 수 가 없었다.
'마력초가 용암 위에서 자라진 않 을 테니까.'
그럼 남은 건 두 곳이다.
벨제부브. 그리고 이름 모를 또 다 른 마왕.
'우선은…… 그래도 이름 아는 쪽 으로 가볼까.'
벨제부브라면 아직 힘도 약화되어 있을 테니까.
* * *
벨제부브의 성채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끝에 놓여있었다.
까마득한 절벽 사이사이에 박쥐들 이 터전을 잡고 뛰놀고 있었다.
벨제부브의 본모습을 본 적이 있 던 터라 어쩐지 미묘하게 느껴졌다.
'여기도 아닌가.'
인근을 샅샅이 훑었으나 마력초의 '마' 자도 보이질 않았다.
마왕성을 지키는 호위들조차 보이 지 않는 건 좀 의아했지만,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려는 찰나였다.
"웬 쥐새끼가 기어 들어왔나 했더 니."
오싹.
나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을 느꼈다.
"네가 여기 있을 줄이야."
나는 천천히 뒤돌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뛰 어난 미색이 엿보이긴 하지만, 미남 이라기엔 다소 어색하다.
'미남이라기보단 미소년에 가깝겠 어.'
고작해야 10살 남짓해 보이는 어 린아이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 머리를 하고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벨제부브?"
나는 혹시나 싶어 떨리는 목소리 로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오만하게 대꾸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가 감히 '벨제 부브'라고 불릴 수 있단 거지?"
"아니……. 모습이 좀 달라서."
내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이전 같았으면 위압감 넘치는 모 습이었겠지만 이제는 그저 귀여울 뿐이다.
"힘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 서 이 근처엔 누구도 얼씬대지 말 라고 했는데…… 누가 겁도 없이 들어왔나 했다."
그래서 마왕성을 지키는 기본 전 력도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슬쩍 노이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거 호위도 없고 힘이 약해져 있 는 벨제부브라. 너무 먹음직스러운 모습이지 않은가.
'이대로 쓱싹해버리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벨 제부브는 픽 웃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왜?"
"호위가 이 근처에 없는 거지 아 예 없는 게 아니니까. 이 모습이라 도 시간 끌기 정도는 할 수 있다."
벨제부브가 손짓하면 얼마든지 이 곳을 향해 날아올 고위 마족들이 드글드글하단 의미였다.
'……확실히. 그건 위험하지.'
지금 나는 투사체 상태가 아니라
온전히 넘어온 것이다.
지구로 넘어갈 준비를 다 끝마치 지 않은 채로 죽으면 그야말로 '죽 음'이다.
그건 곤란하다.
"어떻게 지구인인 네가 여기에 있 는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는 지. 묻고 싶은 건 많지만……
그가 날 똑바로 응시하며 뒷말을 이었다.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정확하네."
그도 이제 나를 잘 파악하기 시작
한 것 같다.
"마침 잘됐군."
벨제부브가 불길하게 입꼬리를 말 아 올렸다.
"내가 약해졌을 때 제일 처음 새 겨진 피가 네 것이었으니, 다른 인 간의 것보다 네 피는 내게 특효약 과 같다."
"그래서?"
"내 힘을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오 래 걸려 짜증 나던 참이었거든. 네 피를 내게 제공하는 게 어떤가? 상 웅하는 대가를 제공하지."
나는 살짝 멈칫했다.
벨제부브라면 마력초가 어디서 자 라는지 알고 있을 터였다.
남은 마왕성은 이제까지와 다르게 호위도 있을 테니 위험성이 크고, 그곳에도 마력초가 없다면 정말 행 방이 오리무증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마력초의 행방을 찾기 위해 벨제부브를 회복시키는 일이 과연 옳은 걸까?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난 괜찮은데, 내 부하들이 좀 화 를 낼지도 모르겠군."
명백한 협박이었다. 애초부터 선택 지는 없었던 건가.
철컥.
"내기해볼까? 네 부하가 빠른지, 내가 널 죽이고 도망치는 게 더 빠 른지."
순식간에 노이트를 꺼내 겨누자 벨제부브가 여유롭게 웃었다.
미간에 닿은 총구를 톡톡 치면서 도발한다.
"난 내가 총을 맞고도 안 죽고, 부 하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 끌기에 성공한다는 데 걸지."
마족이란! 머리에 총을 맞고도 안 죽을 테니 잘 생각하란 경고였다.
"그래서. 대답은?"
제길. 이 자식한테 들켰을 때부터 이미 계획이 틀어진 거였다.
"좋아. 대신 마력초를 가져와줘."
기왕 거래하게 된 거 내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겠지.
"마력초라……. 마력초는 내 관할 이 아닌데."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스윽.
나는 단검을 꺼내 내 팔뚝에 가져 다 댔다.
톡, 건드리자 살결을 가르고 붉은 핏방울이 살짝 맺혔다.
먹음직스러운 걸 보듯 벨제부브가 입맛을 다셨다.
"베아트리스는 짜증 나는 녀석이 지만. 네 피는 그럴 가치가 있지."
"베아트리스?"
전에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데. 묘 한 기시감이 들었다.
"센티피드의 자리를 꿰찬 새로운 마왕이다. 일명, '몽상가' 베아트리스
나는 불현듯 그 이름을 어디서 들 었는지 깨달았다.
-네 패배야. 권성민.
-베아트리스 님! 베아트리스 님! 제게, 제게 조금만 더 힘을……!
그래. 그때 들었던 이름이다.
권성민의 주인. 그를 혹마법사의 길로 이끌었던!
'전에 들은 적 없는 이름이라 하위 마족인 줄 알았는데. 마왕이 될 정 도로 강력하다고……?'
좋은 징조는 아니다. 주인이 강할
수록 그 부하인 권성민의 힘도 강 할 테니까.
이마 위에 살짝 튀어나와 있던 뿔 이 이제는 얼마나 자랐을지.
그걸 생각하면 끝마치지 못한 숙 제가 남은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최근에 즉위했으니 아직 마력초 도 수확하기 전이겠군. 마침 잘됐 어."
벨제부브가 씨익 웃었다.
잘 차려입은 옷태나 반지르르한 얼굴이 그를 마치 귀한 집안의 철 없는 도련님처럼 보이게 했다.
"따라와."
벨제부브가 날 성채의 꼭대기로 이끌었다.
제일 꼭대기 충 가운데에 전신 거 울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고풍스러운 문양이 거울 외곽을 따라 새겨져 있었다. 평범한 거울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벨제부브가 거울에 손을 대고 무 어라 중얼거리자 외곽의 문양에 서 서히 빛이 스며들었다.
나는 거울에 내 모습이 보이지 않 도록 슬쩍 거울 뒤편에 섰다.
-치직, 치지직…….
잠깐의 노이즈가 들린 뒤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이게 누구야! 우리 마계의 귀염 등이, 벨〜제부브 아냐!
"……베아트리스."
거울 속에 낯선 이의 모습이 비쳤 다.
회색빛이 도는 엷은 보라색 머리 카락이 양 옆으로 높이 솟아 있었 다.
보이진 않지만, 머리에 길게 돋은 뿔을 따라 머리카락을 감싼 것 같았다.
열댓 살은 됐을까.
한참 어린 외양의 여자아이가 고 풍스러운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저 꼴을 이그니스도 봐야 하는 건데! 아, 어떡해? 나 너무 웃겨서 배가 땡겨. 혹시 이거 새로운 암살 시도였어? 만약 그런 거라면 아주 효과적이었네!
"베아트리스. 장난치려고 부른 게 아니다."
-웅, 웅. 그렇겠지. 보다시피 난 지금 너〜무너무 바쁘거든!
베아트리스가 거울 방향을 틀어 자신의 책상을 보여준다.
수북하게 쌓인 서류 더미에 책상 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보다도 얼핏 보인 남자가 무척 낯익었다.
-정말이지. 낮에는 인수인계, 밤에 는 암살자 처단. 이보다 더 바쁠 수가 없다니까? 내가 마왕이 된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없군."
벨제부브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가 왜 베아트리스를 '짜증 나는녀석'이라고 칭했는지 알 것 같았 다.
-이제야 알았어? 꺄하하!
"마력초를 좀 구하고 싶은데."
-근데 센티피드가 좋은 군주이긴 했나 봐. 내 땅에서 아직도 센티피 드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울……. 이 거 다시 작성해 오라고 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웅. 마음에 안 들고, 짜증 나고, 계산이 안 맞아.
확실하다. 거울 너머로 들리는 목 소리는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권성민.
베아트리스의 심복. 인류의 배신 자, 그 남자가 저곳에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목숨을 취하고 후환을 없애버리고 싶지만, 베아트 리스의 옆에 붙어있는 이상 그것도 어려워 보였다.
-아, 그래. 마력초 말이지?
"마력초가 필요해. 인간들에게 공 급할 양을 제외하면 얼마나 남지?"
- 그을쎄?
베아트리스가 펜으로 제 머리카락 을 톡톡 두드렸다.
탁탁, 안에 있는 뿔과 맞부딪치며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전쟁 때문에 수요가 급격히 늘었 거든. 남은 재고도 남김없이 팔아달 라고 아우성이던데.
"어차피 그 계약은 센티피드의 이 름으로 맺어졌으니, 지킬 의무는 없 지 않나."
-흐음? 우리 도련님이 마력초는 갑자기 왜 필요하실까아~?
베아트리스가 그를 '도련님'이라고 부르자 벨제부브는 짜증스러운 말 투로 대꾸했다.
"값은 2배로 쳐주지."
-전부 다 사겠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마력석 채취에 마력초가 필 요한 건 맞지만, 마력초는 아주 소 량만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벨제부브는 내가 거절의 의사를 표시한 걸 봤음에도 불구하 고, 내뱉은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래. 전부 다 내가 사지. 2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