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챕터: 지구의 사정
-삐이 이!
파이로가 허공에 대고 울부짖었다.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푸드덕 날갯짓을 한다.
"파이로. 미안, 답답하지?"
송다정이 울상을 한 채로 작게 속
삭였다. 음울함에 젖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참아줘. 네가 덩치가 너무 커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이야."
커다란 철창. 마치 새장 속에 갇힌 듯한 모양새에 파이로는 뻬이이, 다 시 한번 거세게 울었다.
여러 번 마법진을 둘러 그 열기가 바깥으로 새어 나오진 않았지만 집 채만 한 몸집의 파이로는 그 존재 만으로도 큰 위협이었다.
"쉬이. 자꾸 울면 못 데려갈 수도 있단 말이야! 제발 조용히 해 줘..
송다정이 반쯤 울먹이자, 파이로는 그제야 좀 누그러든 기색으로 삐이, 울었다.
고개를 숙여 송다정과 눈을 마주 한다.
파이로는 송다정이 왜 이리도 서 글퍼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송다정은 억장이 무너 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지만 애 써 무시했다.
"아. 멈췄다."
움직이던 차가 멈췄다. 거대한 화
물차에 실린 채 이동하던 참이었다.
"자. 파이로. 저길 봐."
송다정이 철창을 빙 두른 검은 천 을 슬쩍 걷어내며 말을 이었다.
"장례식이야. 네 주인의."
담담한 말투였지만, 끝이 조금 떨 려왔다.
- H베이?
파이로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저 너머에서 인간들이 여럿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얼핏 보였다. 죄다 검은 옷을 입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계약이 아직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 때문에 장 례식이 이만큼 미뤄지기도 했지."
씁쓸한 어조였다.
그녀 역시, 아주 어슴푸레한 희망 같은 것을 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 이다.
파이로를 보면서 아닐 거라고, 어 딘가 분명 살아있을 거라고 마음을 달랬던 것이 벌써 한 달이다.
이 정도면, 송다정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서하가, 죽었어."
-삐이 이?
"무슨 말인지 몰라? 소환수들에겐 죽음이란 개념이 없나?"
송다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눈만 껌뻑거리는 파이로에게 작게 속삭였다.
"죽는다는 건, 이제 두 번 다시 못 본다는 뜻이야."
-삐이? 뼤이이이!
파이로가 좁은 곳에서 날개를 퍼 덕거렸다. 말도 안 된다고 항변하는 것처럼.
"진짜야. 최근에 서하가 널 부른 적이 없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서 하는 이제 널 부를 수 없어, 파이 로."
-삐이이! 삐삐삐!
"넌 혼자 남은 거야."
송다정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누구 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다고 생 각했다.
파이로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 게 하는 말인지 헷갈렸다.
"혼자…… 남은 거라고……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깊고 깊은 수렁 속에 발끝부터 잠 겨드는 것 같았다.
저릿한 통증이 가슴팍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퍼어엉! 콰앙!
그때 돌연 폭발음이 울렸다.
"어?"
송다정이 저도 모르게 울음을 그 치고 바깥을 살폈다.
폭발음이 들려온 방향이, 한서하의 장례식이 열리는 곳과 같은 쪽이었 다.
송다정은 단숨에 안색이 창백해진 채 밖으로 달려 나갔다.
"파이로!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금방 돌아올게에에!"
- 삐이 이 이!
그 대답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었으나 송다정은 일단 달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발을 빠르게 놀렸다. 놀라서 달려 나가는 시민들과 반대로 역주행한다.
"태병아!"
"다정 누나!"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황급히 붙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웬 폭 발인데!"
"저, 저도 잘은 모르겠슴다! 분명 장례식이 진행 중이었는데, 갑자기 같은 부대원이라는 사람이 들어가 더니 그대로……
슈우욱!
김태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누군가 날아들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본 적이 있 는 인물이었다.
"류라임 씨!"
"우웅? 아! 다정 씨네요!"
살벌한 낫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 는 인물은 다름 아니라 소녀처럼 귀여운 얼굴의 소유자인 류라임이 었다.
그녀는 주변이 온통 갑작스러운 테러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홀로 생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갑 자기 폭발이 일어나고 장례식이 엉 망이 된 거죠? 서하가 가는 마지막 길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아, 그거요? 제가 했어요."
"......예?"
송다정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 고 되물었다.
그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경찰차 사이렌이 사방에서 울려서.
그래서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린 김태병의 얼굴이 그 게 아니란 걸 가리키고 있었지만,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뭐라고요?"
"이 폭발, 제가 일으켰는데요?"
송다정은 분노보다 황당함을 먼저 느꼈다.
"대체 왜요……? 류라임 씨도 서 하를 잘 따르고 좋아하셨으면 서…… 갑자기, 왜……
"응? 그야 그렇잖아요. 멋대로 마 지막이니, 장례식이니 하는 게 기분 나쁘잖아요."
보통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 는 말이라, 송다정은 다시 한번 '예?'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서하 님이 이대로 죽었을 리가
없는데. 장례식 같은 걸 치르면 아 무래도 불길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막은 거예요!"
해맑게 웃는 얼굴에 송다정은 할 말을 잃었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 녀를 안타깝게 여겨야 할지, 죽은 이의 마지막 길을 엉망으로 만든 것에 분노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 질 않았다.
"저기 있다!"
"잡아! 잡아!"
휘이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찰들이 류라임을 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술래잡기 나 좀 하려고요."
"네? 아, 네에……
" 얍!"
류라임이 바닥을 박차고 다시 하 늘로 날아올랐다.
송다정은 어쩐지 멍한 기분이었다.
"……서하가, 살아있을까?"
그렇다고 굳게 믿는 이를 보니, 어 쩐지 간질간질한 것이 가슴속에서 움텄다.
그러나 김태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현실 도피는 비참할 뿐임다."
그 말에 송다정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다.
"그렇겠지."
"네. 장례식이 엉망이 됐으니, 오 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슴다. 조만간 수습하고 다시 장례식을 열 테니, 저는 발인식 때 오려고 함 다."
"다시 할까? 사실, 아직 파이로의 계약도 그렇고 좀 더 기다려봐도
좋을 것 같은데."
"뭐…… 아마도 할 검다."
김태병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유가족이 강력하게 원하고 있슴 다."
"역천 쪽에서? 그럴 줄은 몰랐 네……
송다정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자 김태병이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 아님다."
김태병이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익숙한 얼굴들이 상복을 입 은 채 서 있었다.
굳은 얼굴의 표혜원과 표연원이었 다. 그런데 옷이 상주 차림이 아니 었다.
조문객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문득 한 가지 진실이 머릿 속을 스쳤다.
"맞다. 혈육은 아니었지."
"네. 사실상 가족처럼 지내긴 했지 만, 일단 법적으로는 아니지 않슴 까."
"그럼, 유가족이란 건……
김태병이 목소리를 낮게 가라앉혔 다.
"친인척들입니다."
"……대충 알겠어."
한서하라는 개인이 얼마나 단단했 는지와는 별개로, 그 애는 고작해야 20살 초반이었다.
그리고 그 애가 간간이 흘리던 말 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철이 들 무렵부터는 아 예 따로 나와 살았다고 했다.
그러니 그 친인척들이 한서하와 얼마나 데면데면한 사이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런데 유가족이 강력히 장례식을
원한다니.'
이들은 사실상 한서하가 죽길 바 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헌터는 기본적으로 부유하지. 목 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이니까.'
한서하가 따로 사치를 부리는 타 입도 아니었고, 돈을 쓰기는커녕 늘 게이트로 향하는 인간이었으니.
그동안 쌓인 금액이 꽤 어마어마 할 거다.
하이에나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재산을 자기들 입맛대로 쪼개 먹을 생각에 아주 애가 탈 거다.
그런 생각이 들자 송다정은 저도 모르게 저절로 안색이 굳었다.
"좋은 꼴은 아니네."
그 말에 김태병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강백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무척 바쁜 몸이지만, 이번 안 건이 너무 중요해 어쩔 수 없는 선 택이었다.
첩첩산중을 넘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 다음에야 그는 고대하던 인 물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윤강백의 인사에 손이석은 고개를 홱 돌렸다.
"내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너 무하십니다."
"돌아가거라."
손이석의 단호한 반응에도 윤강백 은 물러설 수 없었다.
"무기 공급을 끊으셨다고 들었습 니다."
"그래."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아시지 않습니까."
"난 모른다."
손이석이 푹푹, 풀무를 밟으며 대 꾸했다.
"에휴. 파이로 고 녀석한테 너무 기댔더니 불길이 예전 같지 않구 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됐다! 경험도 없는 자식이 뭘! 불 길 망치지 말고 비켜라."
그 호통에 윤강백은 도로 물러섰
다.
"헌터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습니 다."
후욱, 후욱! 풀무에서 나오는 바람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손이석은 대꾸가 없었다.
"게이트가 점점 더 많이 생기고 있고, 인력은 더 부족해지기만 합니 다. 손이석 대장장이님의 무기 공급 마저 끊기면 정말로 전세가 어떻게 뒤바뀔지 모릅니다."
"난 이미 속세와 인연을 끊은 몸 이다."
"이 전쟁에서 지면 손이석 대장장 이님도 무사하지 못하실 텐데요."
"그 역시 내 선택의 결과라면 감 수해야지."
고집불통다운 소리였다.
그러나 윤강백은 어떻게든 손이석 을 구슬려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므 로, 그 말을 겨우 삼켜냈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이 세상에 어디 대장장이가 나뿐 이더냐? 그들에게 부탁하거라! 부 족하긴 하나 내 제자도 산 밑에 있 지 않느냐."
"턱없이 부족합니다."
윤강백이 담담하게 현 상황을 읊 었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 해도, 사용자 가 죽으면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니 까요. 이미 너무 많은 헌터가 죽었 습니다. 헌터 아카데미 조기 졸업 제도를 적용하고, 헌터 연수원 대신 훈련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적극적 으로 전투 인원을 충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부족합니다."
손이석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윤강백이 하아,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3세대와 4세대 사이가 몇 년 차 이인지 아십니까."
"난 모른다, 그런 거."
"4년입니다."
그제야 손이석이 풀무를 밟던 것 을 멈췄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그의 턱 선을 타고 흘렀다.
"터무니없이 짧죠. 1세대와 2세대 사이 간극이 거의 50년에 달했던 걸 생각하면 말입니다."
"그땐…… 이런저런 것들이 도입 되던 때였지. 2세대를 가르치느라
1세대인 우리도 계속 현역으로 활 동했었고."
손이석이 그리운 듯한 눈빛을 했 다.
"죄다 죽어버렸지만. 에잉,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