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챕터: 독이 든 술잔
휘영청 달이 뜬 밤, 신혼부부 올리 버와 리트는 사라졌다. 그 마을이 원래대로 돌아온 직후에 말이다.
어딘가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갔다 고 누군가 말했을 뿐, 그들이 정확 히 어디로 사라졌는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마법 사 리트가 재등장했다.
5황자의 앞에 말이다.
* * *
타닥.
창문을 딛고 서자 못마땅한 듯한 얼굴의 세드릭이 내게 말했다.
"문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나."
"아예 시종장에게 정식으로 인사 드릴 걸 그랬네요. 마족과 계약한
혹마법사인데 5황자 저하를 뵈러 왔다고요."
내가 그의 말을 비꼬자 세드릭은 눈썹을 꿈틀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 였다.
그것도 잠시, 그가 5황자가 머무는 방으로 날 안내하면서 작게 물었다.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 뭐가요?"
"너 말이다. 넌, 이곳에 있어도 되 는 사람이 아니지 않나."
내가 지구인인데 어떻게 톨룩에 있냐, 뭐 그런 얘기인 것 같았다.
나는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반대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테오도르 얘기였다.
그도 톨룩인이지만 지구에 눌러앉 은 지 꽤 됐으니까. 내 말에 세드 릭이 기묘한 얼굴을 했다.
"네가 4황자 저하는 어떻게 알 지?"
"4황자요?"
"방금 네가 얘기한 사례가 4황자 저하를 가리킨 게 아닌가."
나는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 다.
갑자기 웬 4황자?
'4황자 얘긴 딱히 못 들어봤던 거 같은데.'
회귀 전이나 후나, 4황자는 그다지 존재감 있는 황자는 아니었다.
"설마."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닫고 잠 시 말문이 막혔다.
"……4황자 저하의 성함이…… '테 오도르'입니까?"
"모르고 있었나?"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 날 바라보 는 세드릭에게 무어라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넋이 나갔다.
아니. 테오도르가 고위 귀족이라는 추측은 여러 번 해봤다.
그가 차준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서 사람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그런데, 고위 귀족도 정도가 있는 거다!
'황족이라고? 걔가?'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 실없이 허 허 웃는 테오도르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투사체의 모습으로 넘어와 손바닥만 한 크기였을 때도 생각났다.
'아니. 세계 문학 전집이랑 편의점 마카롱에 좋아 죽던 걔가 황족?'
내가 봐왔던 황족들하곤 느낌이 너무 다르다.
5황자는 멍청하긴 해도 입맛은 고 급이라 전쟁터에도 요리사를 끌고 다녔고, 회귀 전 황태자였던 녀석은 거의 온몸에 금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수준이었다.
"이제는 폐황자가 되었고, 언급이 금기시됐으니 모를 수도 있겠군."
아니. 4황자가 언급되지 않는 이유 가 그것 때문이었나.
나는 4황자가 1황자처럼 죽었거 나, 2황자처럼 미치광이라서 그런 건 줄 알았지.
톨룩을 배신하고 지구로 넘어간 배신자라서 그랬을 줄이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바 뀌는 건 없지만.'
고위 귀족이지만 모든 권리를 포 기하고 지구로 넘어왔다는 점은 이 전과 다르지 않으니까.
'내가 봤던 오로굴드의 탑이 거짓 인 게 아닌 이상, 동기가 명확하 지.'
스테이지형 게이트는 톨룩에서 컨 트롤할 수 없다는 게 '구름 아래 숲' 게이트 사례를 통해 명확해졌 으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또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약속한 바는 지켜야 할 거다."
세드릭이 낮게 속삭이는 말에 정 신을 차렸다.
"물론이죠. 5황자 저하는, 황제가 되실 겁니다."
그걸 위해 이렇게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가 탐탁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스르륵 문을 열었다.
5황자가 전보다 한층 피폐해진 얼 굴로 날 반겼다.
"오, 리트! 내 속마음을 아는 몇 없는 충신. 자네가 왔군."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그래. 게이트가 아니면 보 기 어렵다고 하더니. 무슨 일인 가?"
그런 설정이었지. 나는 준비해둔 변명을 둘러댔다.
"특별히 그분께서 허락해주신 덕
에 잠시 이곳까지 나왔습니다. 오래 시간을 내진 못합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챙겨온 술병을 꺼냈다.
"귀한 술을 가져왔는데 한잔하시 겠습니까?"
"술, 술 좋지. 허심탄회하게 얘기 하는 데 술이 빠져서 되겠나."
툭. 테이블에 꺼내놓는 술은, 다름 아니라 '베리주'다.
붉은 빛깔이 감도는 술을 보며 5 황자가 감탄한다.
"향이 달콤한데."
"과실주입니다."
이걸로 초기 목적은 달성했다. 5황 자가 '베리주'를 알게 됐으니까.
"작은 마을에서 나는 특산품으로 만드는 술이죠. 생산량이 많지 않아 처음 맛보실 겁니다."
"호오. 그래, 한정판, 뭐 그런 거 군."
나는 5황자에게 술을 권하며 그의 한탄을 들어줬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좀 초췌해 져 있다 했더니, 황제가 자꾸만 그 를 들들 볶는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자꾸만 나한테 전략회 의에 참석하라 하시고, 형님 눈초리 는 점점 따가워지고……. 조만간 출 전이라 마음도 뒤숭숭한데. 휴우. 내 진심을 아는 이가 정말 몇 없구 나."
"저하. 그래도 열심히 하시다 보면 언젠간 원하시는 대로 한량 같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 목표를 방해하는 주범이 나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줄줄 한탄을 늘어놓는다.
세드릭이 날 아주 가증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귀족들은 나한테 이것저것 바치 고…… 싫다고 거절하면, 더 비싼 걸 바치라는 건 줄 알고 두 배로 갖다 바치고……
"저런. 다들 저하의 깊은 뜻을 몰 라주는군요."
"내가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5황자는 쌓인 것이 많았는지 거의 울 것처럼 굴었다. 아니 실제로 눈 물이 살짝 배어나온 것 같기도 하 다.
나는 적당히 그를 달래면서 베리 주를 한 잔 더 먹였다.
* * *
"다니엘 경이 돌아왔습니다."
황제, 카를로스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잔뜩 쌓인 서류들이 그의 책상 양옆에 놓여있었다.
"빠르군. 반란이 쉽게 제압됐나 보 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끝났다 고 합니다."
그의 옆에서 함께 업무를 보던 책 사, 조슈아가 대신 대꾸했다.
"나도 모르는 걸 왜 네가 알고 있 지?"
"지금 제가 그 서류를 처리해서 폐하께 올릴 예정이니까요."
조슈아가 제가 들고 있던 서류를 그대로 카를로스에게 건넸다.
다니엘이 돌아오기 전 서신으로 먼저 보냈던 보고서였다. 카를로스 는 그 내용을 대충 훑고는 '흐음' 하고 비음을 흘렸다.
"불필요한 피는 흘리지 않는 게 좋지만…… 이 경우엔, 좀 필요했던 것 같은데."
카를로스의 말에 조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판단은 아니야. 5황자가 개입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 실망이군."
"군주로서는 그렇죠."
조슈아의 말에 카를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황태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황 자로서는…… 제법 그럴듯한 전략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빈센트라면 절대 그렇게 처리하
지 않았을 테지."
"예. 그게 크게 보면 이로운 선택 일지언정 당장은 백성들의 반감을 사기 십상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카를로스도 지지 않고 대 꾸했다.
"결국 황태자도 황제가 될 재목을 뽑는 것이다."
"만약 5황자 저하께서 같은 선택 을 했다면, 그분은 3황자 저하의 열화판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내 아들에 대한 평가가 박하군."
카를로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지
만, 정말로 제 아들을 아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걸 조슈아도 알기에 부드럽게 웃어 넘겼다.
"어차피 따라잡을 수 없다면 아예 다른 선택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 법일 수 있겠죠."
그가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귀 뒤 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의도하고 저지른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확인해보면 되겠군."
카를로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니엘을 불러 그가 가져온 그 술병을 가져오라 하거라."
보고서에 적은 바에 의하면 그 '베 리주'라는 것을 그도 한 병 챙겨왔 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5황자를 불러, 확인해보면 되겠구나."
그 말에 조슈아가 고개를 조아렸 다.
"바로 그리하라 명하겠습니다."
5황자, 시온은 영문도 모르고 죽상 을 하고서 그의 앞에 끌려왔다.
그야말로 도살장에 끌려온 돼지처 럼,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를로스는 도저히 그가 뭔가 꿍 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들질 않아서 잠시 시온을 빤히 응시했다.
그마저도 시온에겐 큰 부담이었는 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어,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 까?"
카를로스가 한참을 가만히 있자 참지 못하고 시온이 그에게 물었다.
예법에는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카 를로스는 본디 그런 것을 섬세하게 따지는 편이 아니었다.
"한잔하겠느냐."
" 예?"
"한잔하겠냐고 물었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해가 중천이었다. 심지어 장소도 황제의 집무실이었고.
그런 곳에서 술이라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조합이라 시온은 조심스레 되물을 수밖에 없 었다.
"뭐 문제가 있느냐."
"아, 아뇨! 아닙니다. 한잔 주신다 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카를로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시온이 서둘러 꼬리를 말았다.
시종이 미리 준비한 잔을 건네자, 시온은 조심스럽게 걸어나가 카를 로스의 앞에 섰다.
쪼르륵.
카를로스는 말없이 베리주를 따랐
다.
조슈아가 관찰하듯이 시온을 바라 봤다.
"저, 저만 먹는 겁니까?"
"난 업무를 보고 있지 않느냐."
카를로스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툭 대꾸했다.
시온이 대체 그가 왜 이러는지 몰 라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이해를 포기한 것처럼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꿀꺽, 꿀꺽.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서 인지 시온은 물 마시듯이 베리주를 쭉 들이켰다.
그는 한 입 먹자마자 이 술이 무 슨 술인지 눈치챘다.
얼마 전에 그가 리트에게 받았던 술과 맛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에서 생산하는 술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폐하께서……?'
하지만 그런 의문은 곧 공중에 흩 어 졌다.
카를로스라면 아무래도 이상할 것 이 없었다.
그가 천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 는 밀레니얼로 집무실을 꾸민다 하 더라도, '그 카를로스'라면 그럴 수 있다고 여겼으리라.
"맛이 어떠냐."
"예. 맛있습니다. 달달하고, 감칠맛 이 끝에 감도는 것이 일품입니다."
시온이 빠르게 입에 발린 말을 내 뱉었다.
"그래?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군."
"네, 네. 생산량이 적은 게 아쉽습 니다."
그 말에 카를로스는 서류를 훑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시온을 바라봤다.
" 흐음......
"제, 제가 말실수를 한 모양입니 다! 역시 귀한 술은 좀 적게 생산 해야 그만큼 희소성이 높아지는 건 데, 제가 짧게 생각해서 그만……
"아니. 됐다. 이만 나가 보거라."
그 싸늘한 대꾸에 시온은 식은땀 을 삐질 흘렸다.
"나가 보라니까."
"예. 알겠습니다……
시온은 시무룩한 얼굴로 예를 차
리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 다가, 카를로스는 조슈아에게 말했 다.
"네 말이 맞았군."
"알고 계신 모양입니다. 베리주에 대해서."
"멍청한 척하는 것도 일부러 그러 는 건가?"
카를로스의 말에 조슈아는 대꾸하 지 않고 생긋 웃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말이군."
카를로스는 말하지 않아도 대충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