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238화 (249/361)

238화

"이대로 물러서면 얻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제가 중앙에서 오신 분들 과 얘길 나눠보고 세금이나 징병에 대한 문제만 해결되면 조용히 마을 로 돌아가겠다고 말해볼게요."

"너무 위험해요."

올리버가 짐짓 나를 말리는 체했 다. 그러나 부러 단호하게 고개를저었다.

"이대로 버티다가 저들이 습격하 면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 채 쫓 겨날 겁니다. 귀족을 시해한 죄로 전부 사형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할 지도 모르고요."

내 말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 붙었다. 평민들에게 가장 두려운 형 벌이 바로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진 속에 혼자 들어가겠 단 말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무장하지 않은 채로 다가가면, 제 가 싸우러 온 게 아니란 건 알 테 죠."

"그래도……

"제가 듣기로 저 중앙군은 5황자 저하를 따르는 이들이라 했습니다."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정확히 말 하자면 저 중앙군을 이끄는 다니엘 이, 5황자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중 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이들이 알 리 없었다.

"5황자 저하는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이 크시고, 솔선수범하여 전쟁 터까지 직접 나서는 분이라더군요. 그런 분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조금 다를지도 몰라요."

"맞아, 5황자가 망나니짓을 일삼다 가 최근 개과천선했다고 듣긴 했는 데."

"예끼, 이 사람아. 그게 개과천선 이겠어? 때를 기다리며 스스로를 감추고 계셨던 거지."

다른 황족들과 달리 전쟁터에 자 주 출전하는 5황자에 대한 얘기는 백성들 사이에도 잘 퍼져있었다.

'아마 황제가 적당히 선전용으로 내세운 거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적어도 백성들만 앞에 내세우고 정작 자신은 후방에 숨어있는 다른 황족들보단 훨씬 나아보이니까.

"그럼 차라리 내가 가는 게 어떻 겠소? 나는 상인 일을 오래 해 셈 이 빠르고 협상에 능하오."

"아니요. 제가 가겠습니다."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다들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저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되 었으니, 마무리도 제가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하라에게 끌려가면서 반란

이 시작된 것이었다.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 쯤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위험 부담이 있으면 제 가 져야 한다고 봅니다."

내 말에 다들 뭉클한 표정을 지었 다.

올리버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며 토닥거렸다.

연기가 제법 늘었다.

다음 날 해가 뜨자 나는 홀로 적 진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성문을 나서 기사들이 모인 곳으 로 향하자, 그들이 당혹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스릉.

검을 들어 내게 겨누긴 하지만, 아 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협상을 하러 왔습니다. 가장 높으 신 분을 불러주세요."

* *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가장 안쪽 천막으로 불려갔다.

가는 길 내내 기사들이 매서운 시 선으로 날 감시했다.

천막 안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 이 보였다.

맹금류같이 노란 눈동자가 날 응 시했다. 평소보다 훨씬 딱딱하게 굳 은 얼굴로 날 바라본다.

"협상을 하러 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우습군. 지금 본인들이 그런 말을 꺼낼 처지라 생각하는 건가?"

다니엘이 차게 날 비웃었다. 그러 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야 저희는 여러분께 상대도 안 되겠죠."

"그런데?"

"하지만 무력으로 밀어붙이지 않 으시는 이유도 있지 않습니까."

기사들이 이곳에 주둔한 지도 벌 써 3일째였다.

내 말에 다니엘이 어디 들어나 보 자는 듯 눈썹을 까딱했다.

"기본적으로 백성이 곧 그 영지의 재산이기 때문이죠. 저횔 당장 몰아 내는 건 편하지만 후일을 도모하지 않는 선택지기도 하고요."

"반란을 일으키는 백성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은데."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그 랬겠죠."

하지만 내가 그들 대표로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이미 우린 스스로를 증명 했다.

"더구나 이 마을은 농사가 발달해 인근 지역의 식량까지 책임지는 지 역이잖아요?"

당장 우리가 사라지면 이 인근 마 을은 올겨울에 식량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급하게 다른 마을에서 공수해 올 수는 있겠지만, 마을 간 교통이 좋 지 않아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었 다.

"협상할 수 있으면 협상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듯 다 니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도 묘하게 달 라진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무작정 내 조건에 맞춰달라고 떼 를 쓸 줄 알았던 모양이지.

"저희가 바라는 조건은 이 정도입 니다. 최대한 현실적으로 뽑았고, 대부분 전대 영주님 때와 비슷한 조건입니다."

나는 미리 챙겨온 서신을 꺼냈다. 이걸 협상하느라 거의 밤새 회의를 진행하고 오는 길이었다.

" 흐음......

다니엘이 서신을 뒤적거리며 읽었

다.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영주와 시 민들의 요구를 적당히 절충한 수준 이니 그도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 이다.

"나는 기사라 이런 일은 잘 모른 다. 그러니 내가 함부로 이 일을 처리하긴 어렵군."

다니엘이 서신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 시는 5황자 저하께서 이 자리에 계 셨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하셨을 거 다."

다니엘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5황 자를 언급하자 주변 기사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우선은 받아들이지. 현 영주를 풀 어주고 해산한다면 차후 다시 자리 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겠다."

그건 아주 너그러운 처사였다.

반란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작지만, 일단은 귀족에게 반기를 든 사건 아닌가.

이런 일은 으레 주변 백성들에게 본보기 삼기 위해 철저히 짓밟아주 곤 했다.

하지만 당장 전쟁 중이라 마을에 서 일하는 장정들이 부족해 관련자 를 모두 처벌하면 농사가 불가능한 점, 주변 마을의 식량 공급지인 점 등등이 복합적으로 개입한 결과겠 지.

"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이들을 엄 벌하라 하셨습니다!"

기사들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 로 외쳤다.

본디 기사란 황제가 내린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이들이니, 반발이 거 셀만도 했다.

"그러셨지. 하지만 조사 결과, 현

영주가 지나친 폭정을 일삼은 결과 였음이 명확하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이들은 반란을 일 으키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본보기 로 주도자들은 목을 쳐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그 기사의 말 이 맞았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 한 본보기는 늘 중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다니엘과 내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첫째, 반란의 불씨를 피우는 것. 둘째, 5황자에게 공을 돌리는 것.

이 두 가지를 위해선 반란을 일으 킨 이들을 거세게 처벌해선 안 되 고, 도리어 너그럽게 용서하며 그것 을 5황자의 공으로 돌려야만 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들의 현실을 알았으면 불쌍히 여기셨을 거다. 엄 벌하라 명하시긴 했지만, 이미 스스 로 물러나겠다 말하는 이들에게 애 꿎은 피를 흘리게 하실 분은 아니 다."

아니. 그 황제라면 아마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가차 없이 목을 베었을 지도 모른다.

" 실은

나는 여기서 하이라이트 장면을 하나 만들어내기로 했다.

"실은, 이곳까지 올 수 있게 용기 를 낸 것도 그분 덕분입니다."

" 그분?"

"직접 밝히진 않으셨지만…… 여 러분이 오시기 전에 한 기사님께서 왔다 가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기사인 걸 티 내지 않으시려 했 지만, 그 자태는 가려지지 않기에 금방 눈치챌 수 있었죠."

살짝 아부를 섞어주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겉옷을 바꿔 입어도 자신에겐 감 출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그분께서 저희에게 방향을 일러 주셨고, 그 덕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아마…… 협상의 여지도 없이, 저희 가 꼼짝없이 죽을 줄 알고 계속 투 쟁했을 겁니다."

"흥미로운 얘긴데. 그 기사가 5황 자 저하랑 무슨 상관이지?"

다니엘이 적당히 추임새를 넣었다.

"그야……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

만, 저는 똑똑히 봤습니다."

나는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며, 작 게 속삭였다.

"그 기사님의 옷자락 사이로…… 황가의 문양이 드러나는 걸요."

"황가의 문양!"

"그렇다면 분명 직속 기사임은 틀 림없는데……

황가의 문양은 그 자체로도 신성 한 것이라, 황족과 그 최측근만 사 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 기사가 어떤 황족의 최 측근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꼭 5황자 저하라는 법은 없지 않나."

"저는 신분이 미천하여 다른 높으 신 분들에 대한 얘기는 잘 모릅니 다. 그저 막연히 그분께서 백성을 아끼신다 들었으니 그분인가 보다 했을 뿐이죠."

내 말에 다들 맥이 빠진 얼굴을 하기에, 나는 툭 뒷말을 내뱉었다.

"다만 주워듣기로, 5황자 저하께서 술을 좋아하신다고 하여..... 저희 마을의 특산품인 '베리'로 담근 술 을 조금 챙겨드렸습니다."

"베리'?"

나는 미리 챙겨온 과일을 꺼냈다.

포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보다 알이 작고 씨도 거의 느껴지지 않 을 정도로 작은 과일이었다.

"다른 곳에선 잘 자라지 않고 저 희 마을에서만 특수한 방법으로 기 르는 작물입니다. 아마 처음 보셨을 겁니다. 이 마을은 농작물을 주로 재배해서 생산량이 아주 적거든요."

"과연. 처음 보는군."

"감사의 표시로 이 과일을 술로 담근 것을 챙겨드리자, 기사님께서 '주군께서 좋아하시겠군.' 하며 기 뻐하셨습니다."

나는 술병을 하나 건넸다. 베리를 담가 만든 독한 술이었다.

"이 과일주를 5황자 저하께서 알 고 계신다면, 그분께서 저횔 살려주 신 것이고. 아니라면 제가 착각한 것이겠지요."

내 말에 기사들은 묘한 표정을 지 었다.

어디까지나 억측이지만, '베리'라는 그럴 듯한 표식과 함께하니 꼭 수 수께끼처럼 느껴질 것이다.

다니엘은 술병을 옆에 있던 기사 에게 건넸다.

"챙겨두거라."

"옙. 알겠습니다."

다니엘은 내게 살벌하게 경고했다.

"혹여 5황자 저하의 이름을 팔아 목숨을 잠시 부지하려는 속셈이라 면, 아주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황족의 이름을 판 대가는 결코 가 볍지 않거든."

내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자, 다 니엘은 휙 손짓을 했다.

"일단 이만 물러가거라. 지금 영주 는 임시로 부임해 있었으니, 차기 영주가 곧 배정될 것이다. 그자와

담판을 짓는 자리를 따로 마련해주 마."

"감사합니다. 기사님."

나는 고개를 아주 깊게 숙인 다음,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예민한 기감을 통해 뒤에서 그들 이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5황 자 저하의 입김이라지만……

"쉬잇. 모르는 척해. 요즘 그분의 위상이 심상치……

"맞아. 곧 황태자 즉위식이 있지 않나. 그때까지…… 밉보이지 않는게 낫……. 그분이 진짜 황…… 되 시면 어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