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좌르륵!
아침에 창을 열고 커튼을 걷자, 창 틀에 앉아있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 날아갔다.
창틀에 기대 잠시 햇볕을 쬐고 있 자니 창 너머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스미스 부인."
"좋은 아침이네요. 빌."
요 앞에 서있던 빌이었다. 그는 이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 이였는데, 지 금 내 남편 역할을 하는 올리버를 고용한 고용주기도 했다.
"올리버는 곧 내려갈 거예요. 준비 중이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속에서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와 씻고 있을 거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차 한잔 대접 해드릴게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부인."
빌이 넉살좋게 웃었다.
나는 새들이 놓고 간 쪽지를 주머 니에 챙겨 넣고, 빌을 집 안으로 들였다.
"아침마다 데리러 와주셔서 감사 해요."
"아무렴요. 이 마을에 몇 안 남은 귀한 청년 아닙니까."
그는 이 마을 외곽 지역에서 살며 옆 마을에 물건을 내다 파는 상인 이었는데, 본래 다른 평민들에게 물 건을 포장하게 시키고 그 품삯을주곤 했다.
"새로 오신 영주님께서 죄다 끌고 가버리셨으니……
지금 와서는 일할 사람이 없으니, 마을 안쪽에 사는 올리버를 직접 출퇴근시켜주고 있지만 말이다.
"별채가 완공되기까지 얼마나 걸 릴까요?"
"글쎄요. 적어도 몇 개월은 더 걸 릴 겁니다."
나는 물을 끓이는 시늉을 하면서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슬쩍 읽었 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저런. 피터 이장님께서 요즘 농사 를 지을 사람이 없어 곤란하다고 하시던데."
"올해 농사는 글렀습니다."
빌은 쯧 혀를 찼다.
"당장 올겨울을 어떻게 보낼지, 원."
"영주님께서도 뭔가 생각이 있으 시겠죠."
"부디 그래야 할 텐데 말입니다."
비아냥거리는 어조였다. 나는 뜨거 운 물에 잎사귀를 하나 띄워 대접했다.
"게다가 이 작은 영지에서 대체 뭐 뜯어갈 게 있다고 세금은 자꾸 만 올리는지!"
빌은 울분을 터뜨렸다. 마을을 오 고 가는 모든 것에 관세를 매기기 시작한 탓에 상인들의 피해도 막심 했다.
"온갖 고생을 해서 옆 마을에 가 져가도 가격이 비싸니 아무도 사질 않습니다. 그러면 그 운송비며 인건 비며! 에잉……
이런 상인들에게 가장 민감한 문 제는 이거겠지. 잘 건드린 모양이다.
빌은 눈앞에 영주가 있으면 멱살 잡이라도 할 것처럼 울분을 토해냈 다.
"스미스 부인도 조심하셔야 합니 다. 아직은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주님께서 가만히 두시는 모 양인데, 언제라도 잡혀갈 수 있으니 까요."
"무서운 일이네요. 부디 굽어살피 셔야 할 텐데."
내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자, 빌 이 연민에 젖은 표정을 지어 보였 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 죠."
그때 올리버가 옷을 꿰어 입으며 나왔다.
"괜찮네. 차 한잔 대접해 주시기에 편히 기다렸지."
"고마워요. 리트."
올리버가 내 가명을 불렀다. 이제 는 꽤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뭘요. 저도 곧 나가봐야 하니, 두 분도 서두르세요."
"이만 가지."
"예, 그러죠."
올리버는 내게만 보일 정도로 살 짝 낯을 굳히고 내 앞에 섰다.
내 손을 들어 손등에 스치듯이 키 스하고는, 서둘러 내려놓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머니 에 있던 쪽지를 꺼내 그에게 건넸 다.
그도 티 나지 않게 손을 가볍게 그러쥔다.
"다녀올게요."
"네. 이따 저녁에 봐요."
"허허. 항상 사이가 보기 좋습니 다."
빌이 흐뭇하게 우릴 바라봤다.
방금 은밀하게 서신을 주고받은 건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실행일은 오늘.'
그래.
오늘이, 이 불만으로 가득 차 금방 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 불 씨를 지피는 날이었다.
* * *
"새댁! 오늘은 요거, 요 터럭벌레 고기가 아주 신선해~r
"에휴, 터럭벌레라니……. 몬스터 고기를 돈 주고 사는 날도 있네그 려."
왁자지껄해야 하는 시장에는 음울 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마을에선 하루 이틀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다들 죽상을 한 채 로 곯는 배를 움켜쥐고 가격을 흥 정하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몬스터 고기 는 질기고 비려서 못 먹겠네."
"그래도 먹고살아야지……. 거, 터 럭벌레 고기는 얼마요?"
"관세가 높아 다른 마을에서 들어 온 물건은 쳐다도 못 보겠구만."
마을 전반적으로 음습한 분위기가 가득한데, 이 시장은 그나마 유일하 게 사람 냄새 나는 곳이었다.
나는 살 것도 거의 없지만 일부러 그곳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만간 기다리던 소식이 날아올 테니까.
탁탁탁탁!
누군가 빠르게 이곳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토미 아니야?"
"무슨 일이지?"
뒤에서 누군가 술렁거렸다.
이 마을에서 제일 소식이 빠른 토 미는,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내게 알려주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다.
요 며칠간 꾸준히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그 값어치를 할 때가 왔다.
탁탁탁, 빠르게 울려 퍼지던 발걸 음 소리가 내 등 뒤에서 멈춰 섰 다.
"허억, 헉, 헉…… 스미스 부인!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니, 토미?"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되 물었다.
"스미스 씨가…… 올리버 씨가!"
"……그이가 왜."
나는 대번에 낯을 굳혔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단 걸 알 았는지 시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 해졌다.
다들 숨을 헐떡거리는 토미에게 집중했다.
"올리버 씨가……! 허억, 헉, 잡혀 갔어요! 영주님한테요!"
"뭐? 자, 자세히 말해봐! 영주님께 서 갑자기 왜!"
내가 놀라서 그를 수차례 흔들자 토미가 다급하게 나를 말렸다.
"저, 저도 몰라요! 갑자기, 갑자기 들이닥쳐서……!"
"……어디 있어?"
" 예'?"
"내 남편 어디 있냐고!"
"시내요! 시내에서 잡혀갔어요!"
나는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내던 지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옆에 있 던 시장 상인들이 하나둘 말을 걸 었다.
"그래서 언제 도착하겠어! 따라오 게, 내가 마차를 태워줄 테니! 야채 싣는 마차라 좀 더럽긴 하지만 말 이야."
"시내면 아직 영주성에 들어가진 않았을 거야! 영주성 앞으로 가보 게!"
"아이고, 이를 어째. 아직 어린 부 부인데..
나는 마차를 빌려주겠다는 상인에 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마차를 얻 어 탔다.
그런 내 등 뒤로 걱정 어린 말들 이 쏟아졌다.
"꽉 잡게! 좀 거칠게 몰 테니까!"
"부탁드려요!"
"이랴!"
촤악!
채찍이 말을 거세게 재촉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 는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 * *
"이 안은 길이 좁아 들어갈 수가 없네!"
"감사해요. 제가 직접 가볼게요!"
나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안으로 내달렸다.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이 차오르는 시늉을 했다.
사방에서 날 보고 수군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최소 한두 번은 우리 와 마주친 적 있는 이들이었다.
안타까움, 분노, 체념, 탄식. 그런 것들이 배경으로 스쳐 지나갔다.
"허억, 허억."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인파 사이에 있는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영주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내 남 편, 올리버였다.
"올리버!"
"안 돼!"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내게 손을 내저었다.
"오지 마요, 제발! 오지 마요!"
밤낮으로 연기 연습을 시킨 성과 였다. 나는 보람에 차 뭉클해진 심 정을 가득 담아 한 번 더 외쳤다.
"영주님! 제발, 제 남편이 무슨 잘 못을 저질렀는진 모르겠지만.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부디 이 이를 끌고 가지만 말아주세요. 제발 요."
한번 영주성에 끌려가면 언제 다 시 나올 수 있을지 몰랐다.
귀족에게 무례를 저지른 이들은 곧장 끌려가 지하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으니까.
"네 부인이냐."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올리버가 열연을 펼쳤다.
나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애써 모른 척하는 모습이 보는 사람들을 뭉클하게 할 만했다.
"맞습니다! 제가 부인입니다! 그러 니 부디 저를 벌하시고, 이 사람은 살려주세요."
"저는 정말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잔뜩 쥐어터진 주제에 어디서 그 런 힘이 나왔는지, 올리버는 나를 밀쳐내며 모른다고 일관했다.
그 모습을 영주가 흥미롭게 바라
보고 있었다.
"이거. 한 사람은 부인이라 그러 고, 한 사람은 아예 모르는 사이라 하니……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러더니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 었다.
"더 절박한 이가 진실을 말하겠 지."
까딱, 손짓하자 올리버와 내 목에 동시에 칼이 들이밀어졌다.
허억, 주변에 있던 이들이 절로 숨 을 들이켰다.
날카로운 날이 금방이라도 숨통을 조일 것처럼 매섭다.
"자. 다시 말해보거라. 이 여자가 네 부인이 맞느냐?"
올리버가 떨리는 눈빛으로 날 바 라보더니, 이내 질끈 눈을 감고 외 쳤다.
"아닙니다!"
"맞습니다!"
나도 피를 토하는 것처럼 목소리 를 토했다.
"아직도 거짓을 고하다니. 감히 내 앞에서."
그가 살풋 인상을 찌푸리자 사방 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럼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거기 너, 너. 그리고 너까지."
"히 익!"
"예, 예! 영주님!"
"네, 네, 넵!"
지목당한 이들이 덜덜 떨면서 대 답했다.
"이 둘이 부부가 맞느냐?"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둘이 모르면 나머지 한 명이라도 알겠지."
미처 대답 못한 한 명이 눈을 부 릅떴다. 그가 우리를 힐끗 바라봤 다.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고, 나는 고 개를 끄덕였다.
이에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자, 영주가 채근했 다.
"어서 대답하거라!"
"예, 예. 영주님. 그것이, 제가, 생 각이 날 듯 말 듯 하는데……
"어서!"
"아, 아닙니다!"
그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부부가 아니다?"
"예, 예에! 부부가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조용히 하거라. 부부가 아니라는 증인이 있지 않느냐."
올리버는 비교적 편한 안색이 되 었고 나는 질색을 했다.
얼결에 대답한 이름 모를 이도 마 음 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예. 예! 맞습니다. 영주님! 그러니 부디 절 벌하시고, 연관 없는 이는 그냥 지나가게……
"그런데."
영주가 올리버의 말을 끊으며 태 연하게 중얼거렸다.
"부부가 아니라니 더 무엄한 일 아닌가."
"..예 우"
올리버가 저도 모르게 당황하여 진실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도 하마터면 '이건 계획에 없는 일 아니냐'고 따질 뻔했다.
갑작스럽게 극본에서 벗어난 상황 에 우리가 얼빠져 있는데, 영주만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감히 자신의 일도 아닌데 윗사람 의 일에 끼어든 죄. 그 죗값을 어 찌 치러야 할까."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나는 대충 상황에 맞게 맞장구를 쳤다.
영주와 눈을 마주치며, 눈빛으로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그러자 그가 초승달처럼 눈매를 휘며 가벼이 웃었다.
"이 여인을 끌고 와라. 죗값은 내 성 안에서 물어야겠다."
예? 저요?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올리버가 끌려가고 내가 그 를 구하러 성에 쳐들어가는 스토리 였는데.
왜 갑자기 내가 성에 갇히게 된단 말인가.
어안이 벙벙하지만 보는 눈이 많 은 곳에서 대놓고 따질 순 없었다.
철컥.
"쯧. 운이 없었다 생각하쇼."
병사가 날 보며 툭 내뱉고 지나갔 다.
나는 그렇게, 성의 지하감옥에 갇 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