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챕터: 무의식의 저편에서
레태흐태드.
꿈과 환상의 마녀. 보라색 머리카 락을 발끝까지 늘어뜨린 채, 잠옷 같은 원피스를 입은 여인.
그 마녀가 내 앞에 있었다.
언제나처럼 미소 지으면서.
"……레태흐태드."
"레태라고 불러 달라니까. 난 전부 터 애칭이 갖고 싶었거든."
만날 때마다 도돌이표 같은 대화 였다.
또 꿈속으로 끌려온 모양이었다. 게이트에 입장하자마자,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
'..게이트는 이미 레테흐태드의 영역인 건가.'
투사체로 만났을 때나, 저번에 쌍 등이 마녀를 수습하러 잠시 왔을 때랑은 다르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레태흐태드가 진심으로 맞부딪쳐오는 셈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노이트를 찾았다.
그러나 허리춤을 더듬어봐도, 늘 있던 자리에 노이트가 없었다.
"소용없어."
레태흐태드도 날 한두 번 본 게 아니니 내 수법은 알고 있을 거다.
"지금까지 네가 꿨던 얕은 꿈들과 는 다르거든. 여긴 아주아주 깊은 곳이야. 네 내면이라고도 할 수 있 지."
레태흐태드가 하는 말에 흔들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노이트. 어디 있어?'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사용자 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날 쏴. 지금 당장!'
그러나 사방이 고요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소용없다니까?"
마치 나와 노이트의 대화를 엿듣 기라도 한 것처럼 레태흐태드가 빙 긋 웃었다.
날 놀리듯 내 주위를 빙그르르 돌 았다.
"얕은 꿈은 육신의 통증으로 깨어 날 수 있어도, 이렇게 깊이 잠긴 꿈은 어쩔 수 없지."
레태흐태드가 내 앞으로 훅 다가 와 내 뺨을 어루만졌다.
"유일한 방법은……
후우.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는 내 눈앞 에서 레태흐태드가 후, 바람을 불었 다.
절로 눈을 찡그리자 그녀가 뒤로
물러나며 꺄르르 웃는다.
"비밀이야!"
마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내가 바보였다.
홱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온 통 까만색 일색인 공간이었다.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분간이 가질 않 는다.
저번에 보았던 하얀 공간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깊은 잠이라.'
어찌 됐든 이 역시 잠이라면 분명 깨어날 방법이 있을 거다.
"참 이상한 일이지."
레태흐태드가 몽환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널 보고 있자면,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어."
내 이해나 대답을 요구하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애써 못들은 척 무 시했다.
"그 이유가 뭘까……
꿈결을 그리는 듯, 뭔가를 몽상하 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걸 알아보려고 해."
" 뭐?"
나도 모르게 레태흐태드에게 되물 었다. 그녀를 무시하려고 마음먹었 던 게 무색하게도.
뭔가가 일어나려고 한다는 걸 직 감적으로 알아버린 탓이었다.
"여긴 네 깊은 꿈속이고, 난 이 안 에선 대체로 전지전능한 편이거든."
휙!
레태흐태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나 는 훅 당겨져 그녀의 앞에 섰다.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 을 듣질 않았다.
레태흐태드가 고개를 숙여 나를
더욱 자세히 뜯어본다. 보라색 머리 카락이 사방을 가리자, 내 시야에 레태흐태드가 가득 찼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날 옭아매는 것 같았다.
"자, 널 보여줘."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 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목소리 대신 입만 벙긋벙긋 움직 였다.
"네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것 들이, 곧 너를 이루는 근간이니 까……
꿈꾸는 듯한 목소리에 점점 정신 이 몽롱해졌다.
번쩍 눈을 떴을 때, 내 바로 앞에 내가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무심한 표정 까지. 그건 분명 나였다.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데, 또 다른 나는 무척 태연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나라 고 보긴 어려웠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였고, 턱에는 흉터가 남아있었으니까.
그건 나지만, 내가 아니었다.
'회귀 전의 나야.'
30살쯤 되었을까. 그 정도로 보였 다.
스* .
또 다른 내가 대뜸 혀를 찼다.
"무디군, 무뎌."
"뭐라고?"
"무디다고."
차갑게 끊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
저런 말투를 사용하곤 했지.
전쟁터에선 모든 것이 사치라, 상 대를 설득할 시간도 체력도 없어 찍어 누르는 듯한 어조를 쓰곤 했 다.
이렇게 내 귀로 직접 듣는 건 처 음이지만.
"얼간이처럼 굴고 있잖아."
"내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법한 일 들을 벌이고 있단 거지."
대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여 전히 내가 의아하단 얼굴을 하고 있으니 또 다른 내가 친절하게 말 을 덧붙였다.
"표연원 말이야. 왜 버리고 가지 않았지?"
"그게 무슨……
"표연원만 죽으면 안정적으로 벨 제부브를 죽일 수도 있었잖아. 왜 망설인 거야."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회귀 전의 내가 이랬던가? 아주 낯선 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발끝부터 차올랐다.
"……너도 연원이를 아꼈잖아."
"그것과는 별개지. 그리고 표연원 을 아끼는 마음보다, 벨제부브를 중 오하는 마음이 더 크지 않았나?"
또 다른 내가 눈을 부릅떴다.
"그 자식은 스승님의 원수잖아."
스승님. 혜원 언니가 아니라 스승 님이었다.
"하지만 혜원 언니는 이제 살아있 어. 그 원수를 갚겠다고 연원이를 희생시키는 건...
"그러니 무뎌졌다고 하는 거다. 한
서하."
또 다른 내가 냉담하게 날 비웃었 다.
"네 증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 군."
"잠……!"
그 말을 끝으로 또 다른 나는 스 르륵 사라져버렸다.
내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손끝에 옷자락이 스쳤던 것 같기도 했다.
허망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등 뒤 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서 소 스라치게 놀랐다.
"다 죽여버릴 거야."
뒤돌아보니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내가 있었다.
온통 피 칠갑을 한 채로, 쓰러진 혜원 언니를 부둥켜안고서.
과거의 재현인 것을 알면서도 훅 끼치는 피비린내에 나는 움찔했다.
"벨제부브, 그 개자식을 반드시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을 거라고."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울분을 꾹꾹 눌러 담은 티가 났다.
"모든 게 원망스러워. 왜 하필 나 였지? 왜 하필 내가 이 게이트에휘말리고, 하필 나만 도망치고, 죽 으려 했는데 살아나고, 스승님을 만 나 죽을 수도 없게 되고……
고개를 숙여 혜원 언니의 시신을 내려다본다.
"왜 아무도 우릴 구해주지 않았을 까."
"다들 노력했을 거야."
나는 겨우 항변했다.
하지만 또 다른 나는 내 쪽을 바 라보지도 않았다.
"그럼 뭐 해. 결국 아무도 우릴 구 해주지 못했잖아. 목숨 걸고 우리
구해주라고 돈 많이 받는 게 헌터 아냐? 이런 게 어딨어."
"어쩔 수 없었겠지."
나도 헌터가 되어 모두를 구하진 못했으니까.
이런 말들이 전혀 위로가 되진 않 겠지만.
"……전부 싫어. 티브이에는 자주 나오면서 이럴 땐 아무 도움도 안 된 헌터도,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짓밟는 생존자들도. 차라리 몬스터 가 낫겠어. 걔넨 그냥 살려고 먹는 거잖아."
3년이나 게이트에서 시달리면서
너무도 많은 것들을 알아버린 탓일 까. 눈에 띄게 정신적으로 불안해 보였다.
"근데, 가장 싫은 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날 응시한다.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 도로 피투성이인 채로.
"가장 싫은 건 나야."
애써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하지 만,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 괴한 얼굴만 남았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으면 스승님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데."
혜원 언니의 시신을 붙든 손을 살 짝 펴 보이자, 성수를 담은 유리병 이 보였다.
"벨제부브를 성검으로 찌른 다음 엔, 이 성수로 웅급처치를 해야 했 는데……
나는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실수하는 바람 에…… 스승님, 스승님……
혜원 언니의 시신에 얼굴을 파묻 고 짐승처럼 흐느낀다.
위로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그 먹먹함을 나 또한 알기에. 지금
돌이켜보면, 회귀 전의 나는 게이트 에서 나오자마자 게이트 출입 시험 을 볼 게 아니라 병원을 가야 했 다.
산산조각 난 정신을 어떻게든 짜 맞추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얼기설기 구멍 난 채로 살았으니, 회귀 전의 나처럼 어딘가 망가진 인간으로 성장했겠지.
"네 잘못이 아니야."
공허한 외침이었다.
혜원 언니라면 날 원망하지 않았 으리란 걸 알면서도. 나는 끝내 죄 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헌터를 업으로 삼았으니까.
혜원 언니가 남긴 역천을 등에 짊 어지길 택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아니, 그냥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았다. 시간이 흐르자 비교적 담담하게 마 주할 수 있게 됐지만.
절망에 빠진 또 다른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게이트 밖에서 하하호호 웃으 며 살아가는 것들, 무능한 헌터와 정부. 더럽고 추잡하게 살아남은 생 존자들. 다 너무 싫어."
오래전 기억이라 그럴까. 아니면, 잊고 싶었던 기억이라 그럴까.
이렇듯 선명하게 마주하는 것이 낯설었다.
그저 고통스러운 기억이라고 뭉뚱 그려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당시 내 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했 단 말인가.
"근데, 가장 죽어버렸으면 좋겠는 건..
텁!
나는 또 다른 나의 입을 막았다.
"그만해."
뒷말이 뭔지 예상이 갔기 때문에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잖아."
또 다른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을 또 다른 한 사람에게 하는 말 이었다.
"충분히 들은 것 같은데. 이만 나 와, 레태흐태드!"
내 외침이 사방에 울렸다.
이리저리 휘둘렸지만 결국 이 모 든 것은 레태흐태드가 보여주는 환 상에 불과했다.
여기에 더 이상 휩쓸리고 싶지 않 았다.
사르륵.
바닥에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태흐태드의 원피스 끝이 부드럽 게 스친다. 동시에 손끝의 감각이 사라졌다.
또 다른 내가 파스스 공기 중에
흩어진다.
"이제야 알았어."
어쩐지 기쁨에 찬 어조였다.
"왜 내가 너만큼은 싫지 않았는지 말이야."
"마녀 주제에. 웃기지 마."
민감한 기억을 되살린 탓에 절로 말이 날카롭게 나왔다.
인간을 중오하는 마녀면서. 내가 싫지 않았다고? 거짓말인 게 분명 하다.
"마녀라. 정말 모르겠어?"
레태흐태드는 재밌어 어쩔 줄 모
르겠다는 듯이 까르르 웃는다.
"헛소리는 그만해."
"아냐, 아냐. 세상에, 이런 인간이 다 있다니. 너무 재밌고 홍미로워. 웅?"
탁!
내 뺨을 거머쥐려는 손길을 단호 하게 쳐냈다.
"그만하라고 했어. 레태흐태드."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레태흐태드 는 몽롱하게 웃었다.
"넌 마녀의 자질이 있구나."
확정적인 어조였다.
" 내가?"
"그럼. 네가."
"말도 안 돼. 저때는 그냥, 잠 시…… 절망에 빠져 저랬던 거야."
그 이후로 모두가 죽었으면 좋겠 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맹세코.
오히려 톨룩에 대한 증오심을 더 키웠으면 모를까.
"일시적인 거였다고."
레태흐태드는 몹시 가련한 것을 보살피듯 날 끌어안았다.
" 안타깝게도."
그녀는 아주 작게, 비밀을 속삭이 듯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런 감정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 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