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그건.…"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3마왕 중 둘이나 눈앞에 두고 내가 무슨 반 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난 이 두 녀석들관 달라. 아주 합리적인 편이지.
센티피드가 입을 벌릴 때마다 가
느다란 혀가 보였다. 마치 뱀처럼, 끝이 갈라진 얇은 혓바닥이.
-난 장난감 놀이엔 관심이 없어. 벨제부브 이 녀석하고는 다르지. 우 리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소꿉장난 을 하겠어. 안 그래?
벨제부브는 눈썹을 꿈틀했지만, 더 나서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그니스처럼 무식하게 싸움광인 것도 아니지. 왕이란 자고 로 다스리는 자거든.
그래. 지네여왕, 센티피드.
나타났다 하면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던 이그니스와는 달랐다.
센티피드는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헌터를 해치는 일도 거의 없 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봤자 게이트 안에 존재하는 이상, 결국 우리는 그녀를 공격해야 만 했지.'
모순적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러 니 벨제부브를 오만, 이그니스를 탐 욕에 빗댄다면.
센티피드야말로 합리적인 왕에 속 할 것이다.
그녀는 낮게 속삭였다.
-네가 이 인간들의 우두머리구나.
그래, 꼬마야. 내 이 극심한 피해를 어떻게 보상할 수 있지? 너희의 그 작은 머리통과 약해빠진 몸으로?
센티피드의 혀가 날름 튀어나와 내 머리와 심장을 순서대로 가리키 며 물었다.
"……피해가 심합니까?"
내 말에 센티피드는 쉭쉭 소리를 냈다.
-당연하지! 난데없이 지반이 무너 지고 천장이 박살나면서 내 아이들 이 용암에 타 죽었어!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태어난 지 고작해야 300년밖에 안 된 아이들이었는데! 그 어린 것 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300년이나 산 마족을 아이라고 칭 해도 되는가, 싶었지만 일단 넘어갔 다.
"제가 어떻게 보상해드리면 만족 하시겠습니까."
사실상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인간의 금은보화는 무의미할 거고, 이미 죽은 마족들을 되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지만 어떻게든 이 여왕의 분 노를 진정시켜야 살아 돌아갈 방법 이라도 찾지 않겠는가.
-글쎄다. 어떻게 해야 내 화가 누 그러질까. 흐음...
그때, 뒤에 있던 류라임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제가 했어요!"
-으웅?
"지하가 파괴된 건 전적으로 제 책임이에요. 그러니 서하 님은 잘못 이 없어요."
지하에 폭탄을 설치한 게 류라임
이긴 하지. 그래도 그녀가 나서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물러나요."
"아니에요. 이건 제가 책임지게 해 주세요."
류라임도 단호한 표정이었다. 우리 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센티피드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어디 보자. 어리고, 작고, 먹을 것도 없겠구나.
나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건물만 한 센티피드에 비하면 손톱만큼 작 았다.
-꼬마야. 너는 다른 꼬마 밑에서 명령에 따르는 자 아니냐. 보아하니 이 꼬마가 우두머리 같은데. 난 조 무래기에겐 관심이 없다.
"하지만……
류라임이 무어라 항변하려 하자, 센티피드가 쉬익,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넌 여기서 입을 벌릴 수 있는 위 치가 아니다, 꼬마!
쉬우욱!
[알림: 격이 다른 상대의 피어를
정면으로 맞았습니다!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10% 감소합니다.]
이런. 몬스터들이 종종 쓰는 스킬 이었다.
피어. 상대를 압도하고 내려찍어 이름 그대로 공포감을 유발한다.
스탯이 비슷하면 피어가 들지 않 을 텐데. 센티피드와 스탯 차이가 상당한 탓에 피어가 정통으로 걸렸 다.
-넌 내게 피해를 보상할 방법이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아주 오래 된 법전에 적힌 대로 처리할 수밖에!
센티피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동 공이 사라지고 안광이 사방을 밝힌 다.
-내 아이들이 용암에 빠져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은 것처럼, 너 역시 똑같은 고통 속에서 죽어줘야겠다!
콰득!
"으으윽!"
"서하야! 안 돼!"
"서하님!"
" 대자아아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센티피드의 손이 날 움켜쥐고 자 신이 들어온 길로 되돌아가 지하로 향했다!
'숨이……!'
나를 꽉 쥔 손 때문에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
"누……!"
순식간에 동료들의 목소리가 흐려 졌다. 지하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선명하다.
'노이트!'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 노이트를
불렀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사용자 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쏴! 지금 당장!'
탕! 탕, 탕!
노이트가 날 감싸고 있는 손을 향 해 총을 몇 발 발사했다.
-크윽! 얌전히 있어!
"커혹....
그러자 도리어 손에 힘을 더한다.
이러다 온몸의 뼈가 부러질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 네가 저지른 참상이다. 똑똑 히 보라고.
나는 고통에 질끈 감았던 눈을 살 짝 떴다.
지하는 바닥에 용암이 끓고 있었 고, 반쯤 녹아내린 곤충들이 둥등 떠 있었다.
개중에는 낯익은 것도 있었다. 붉 고 검은 거미 몸체에 사람의 얼굴 을 단 몬스터.
"붉은고치거미
김태병을 구하러 갔을 때 마주했 던 보스몬스터였다.
엄밀히 따지면 거미는 곤충이 아 니지만 센티피드의 휘하에 있었던 모양이다.
-으웅? 네가 저 아이를 어떻 게... 아하!
센티피드의 주황색 눈동자가 코앞 까지 다가왔다. 소름끼치는 눈동자 가 날 샅샅이 관찰한다.
-너였구나! 내 아이에게 소중한 보금자리를 선사해줬는데, 그걸 다 망쳐버린 게!
"보금자리? 웃기지 마. 거긴 우리 의 보금자리였어."
그 게이트는 우리가 먼저 삶의 터 전을 닦아놓은 곳 위에 생겼단 말 이다.
"멋대로 침입한 건 너희잖아. 저번 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이 게이트가 잡아먹고 있는 공간 에 원래 살던 이들은 아직까지도 제집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곳을 자신의 터전이라고 주장한단 말인가.
-그럼? 이 톨룩은 이미 오염으로
썩어빠져서 우리 보금자리도 부족 한데 어쩌란 말이냐.
"그게 무슨……!"
합리고 어쩌고 지껄이더니 결국 마왕은 마왕인 모양이다.
-어찌 됐든 내 심기를 건드렸고, 내 터전을 망쳤으니 널 그냥 보내 줄 순 없어. 내 아이의 원수기도 하다니, 네 녀석과 나는 지독한 악 연이구나.
그럴지도 모르지.
-잘 죽어라. 인간.
녀석이 내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
고 그대로 날 용암에 처박으려는 순간.
철컥.
반격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타앙!
-키에에에에엑! 케에에에!
"하하……
녀석이 한쪽 눈을 잃고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자유가 된 몸으로 난 허공을 딛고 섰다.
"조심했어야지."
철컥.
탕!
마지막 발악이다. 이대로 얌전히 죽어줄 순 없거든.
-그래봤자 죽는 시간만 조금 미뤄 진 것뿐이야!
후욱!
날 향해 손을 휘두르는 걸 보고 공간 간섭으로 피해냈다. 곧장 총구 를 놈에게 겨누고, 탄환을 장전한 다.
우우우웅!
'관통하는 철화!'
타앙!
_흥!
기껏 총알을 날렸지만 놈은 가뿐 하게 피해냈다.
-이 정도 공격에 내가 당할 성싶 으냐!
센터피드가 입을 쩍 벌렸다. 그러 자 붉은 안개가 안에서 새어나왔다.
마치 붉은 안개 게이트에서 봤던 것처럼!
나는 코와 입을 가리고 바닥으로 향했다. 그냥 안개일 리가 없었다. 아마 독이 들어간 독안개일 것이다.
고도를 낮춰 안개를 피한 후 즉각
공간 간섭을 발휘했다.
후우욱!
놈의 매끄러운 지네 몸통에 총구 를 다시 겨누려는 순간.
푸욱!
"……커흡."
탄환을 쏘기 전에, 내 어깨를 관통 하는 고통이 먼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의 다리 중 하나가 날 꿰뚫고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
센티피드가 쉭쉭거리며 웃었다. 자 신의 승리를 직감한 자의 미소였다.
-이제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거 다. 마비독이 발려 있거든.
어쩐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 다.
-후후후후. 널 어떻게 죽이면 좋 을까? 용암에 튀겨줄까, 아니면 땅 에 묻어줄까. 어떤 방식으로 죽여야 내 자식들이 느꼈던 고통을 고스란 히 네가 받을 수 있을까. 응?
내가 축 늘어지자 센티피드는 승 리를 확신했는지 즐거운 목소리로 콧노래를 불렀다.
-역시 용암이 좋겠어! 너희 인간 들은 화상을 입을 때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지? 먼저 네 사지를 담가 녹아내리게 한 다음 몸통, 그 다음 에 머리를 담가 죽일 것이다. 철저 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도록!
듣기만 해도 끔찍한 최후였다.
하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 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직접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쏠 수 있는 건 일반탄환뿐인데.
그걸로 저 외피에 흠집이나 낼 수 있을까 싶었다.
-끝까지 후회하면서 죽어라, 인간!
후욱!
날 감싸 쥔 손아귀가 이글거리는 용암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뜨거운 열기가 빰=에 생생하게 전 달됐다.
'죽기 직전이라 그런가. 시간이 느 리게 흘러가네.'
눈을 감은 채로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온몸을 가격하는 고통이 없었다.
꿰뚫린 어깨만 얼얼하게 통증이 울렸다.
'……뭐지?'
슬그머니 눈을 뜨자, 놀라운 광경 이 펼쳐졌다.
-벨제부브. 이건, 나랑 척지겠다는 건가?
센티피드가 냉담한 목소리로 물었 다.
센티피드의 앞을 가로막은 벨제부 브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눈 동자가, 의미 모를 눈빛을 보내온 다.
"……대체 왜?"
나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왜 냐하면 벨제부브가 날 구할 이유는어디에도 없....
아니. 있지. 맞아, 그걸 왜 순간 잊었을까.
"내 장난감이야. 손 떼."
저 미친 소유욕!
자기 장난감은 다른 녀석들도 손 못 대게 하던 그 성질머리!
너무 급박하게 상황이 돌아가서 저 벨제부브가 날 쫓아올 거라곤 미처 생각 못 하고 있었다.
-장난감? 네 소꿉장난에 장단 맞 춰줄 기분 아닌데.
"나도 장난하는 거 아니다. 내려
놔."
-내 아이들이 죽었어.
센티피드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낮게 가래 끓는 소리가 나면서, 정 말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저 인간 대신 네가 보상 하기라도 할 건가? 아니, 벨제부브. 그러겠다고 답하지 마. 그러면 꽤나 슬플 것 같으니까.
이제 그건 비아냥거림에 가까웠다.
-네가 인간 여자한테 미쳐서 이딴 짓을 벌이는 걸 가신들이 알면 체면 상해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 니겠나. 안 그래? 고작해야 비상식 량에 불과한 인간한테 말이야.
센티피드는 작게 웃기까지 했다.
-그건 상상만 해도 좀 역겹네. 후 후.
센티피드는 어쩌면 도발에 천부적 인 재능이 있을지도 몰랐다.
벨제부브가 정말로 화가 난 것처 럼 보였으니까.
그는 붉은 눈동자를 내리깔면서 광오하게 그녀를 내려다봤다.
"할 말은 끝났나?"
앞서 센티피드가 했던 기나긴 말 들을 싸그리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그래. 이 철부지야.
센티피드의 눈이 한 번 더 빛을 발했다. 기괴한 안광이 눈구멍에서 부터 흘러나왔다.
-오늘 3마왕 자리 중 하나가 공석 이 되겠구나.
"그래. 동의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