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탁, 탁, 탁.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손질하고 살점을 썰어낸다. 사라진 동안 회 치는 연습만 했나.
"드시죠."
내 앞에 놓인 접시 위에는 회가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이제는 차려줄 사람이 없어서요."
"사람이라도 고용하지 그러셨어 요."
그가 재산이 부족하진 않을 테니, 두둑하게 챙겨준다면 일하고 싶다 는 사람이 줄을 설 텐데.
"옆에 사람이 있으면 잠을 못 자 거든요. 습관이라."
전직 헌터들이 종종 이런 문제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걸 어려워하곤 했다.
'1세대 헌터들이 은퇴할 때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정도였으니까.'
그들 중 대부분은 결국 전서호처 럼 사람 없는 곳에 정착하는 걸 택 했다.
내가 사람 많은 곳을 피곤해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거다.
"많은 걸 포기하고 도망 온 것치 곤, 꽤나 유유자적 살고 있죠?"
전서호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전쟁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청 사를 이운우에게 맡기고 도망간 것 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뇨, 뭐. 사실 전서호 씨가 어디
가서 적응 못 하고 사는 것도 잘 상상이 안 가긴 해서요."
이 능글맞은 인간이라면 어딜 갔 어도 잘 살고 있었겠지.
그가 이렇게 은둔하는 삶을 택한 게 오히려 의외일 지경이었다.
하긴. 이운우나 청사가 아니었더라 면 그도 은퇴해서 뭐라도 한탕 했 을지도 모르지만.
"그 능력을 이용하면 더 크게 사 업을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기엔 전 너무 지쳤습니다."
답지 않게 약한 말이었다.
"그리고 자주 모습을 드러내서 절 상기시키면, 은퇴한 보람이 없지 않 겠습니까."
이게 진짜 이유겠지.
이운우가 좀 더 권력 기반을 확실 하게 다질 동안은 전서호가 물러서 있어야 하니까.
"그나저나 제 부탁을 잘 들어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가 내게 부탁한 일은 한 가지밖 에 없다. 이운우를 청사의 길드장으 로 지지해 줄 것.
"제가요?"
"아니면 운우가 한서하 헌터한테 사적인 부탁을 했을 리 없죠. 어릴 적부터 피아 구분은 잘하는 녀석이 었거든요."
그야…… 전서호 앞에서는 이운우 보다 당신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결국 전서호가 먼저 기자 회견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운우를 지 지하는 형국으로 흘러갔으니까.
"전서호 씨 부탁 때문인 건 아니 었습니다."
"그야 그렇겠죠. 한서하 헌터도 그 런 데 휩쓸릴 사람은 아니니까."
그가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배가 옆으로 스윽 밀려난 다. 배가 격하게 휘청거리는 탓에 잠깐 덜컹했다.
"밑에 암초가 있어서 그만."
물 마법사인 그에게 바다 위는 그 야말로 홈그라운드였다.
나는 품에 넣어뒀던 쪽지를 꺼냈 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 다.
"그건?"
"이운우가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걸 전하는 게 제 용건이고요."
스윽.
그에게 전하자 전서호가 천천히 편지를 받았다.
봉투에서 꺼내, 짧고 간략하게 현 황을 알리는 줄글을 주르륵 읽는다.
"......나 참."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전 이제 청사 사람도 아닌데, 이 런 부탁을 하네요."
"이운우가 청사에서 잘 자리 잡길 바란 건 전서호 씨도 같은 마음이 지 않습니까. 한 번만 도와주시죠."
" 흐음......
그가 고민하는 것처럼 콧소리를 냈다.
"제가 돌아갔다가 청사 사람과 마 주치면 혼란만 가중될 텐데요."
"이운우 길드장도 그걸 모른 채 당신을 부르진 않았겠죠. 감수할 만 하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내 말에 전서호도 고개를 끄덕였 다.
이운우가 그런 초보적인 저울질도 하지 않고 전서호를 불렀을 리 없 으니까.
"그리고…… 전청운 씨는 저와 함
께 다른 팀에서 움직일 테니 마법 사팀과 마주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운우는 모르는 이유를 하나 더 짚어냈다.
전청운과 마주하길 꺼렸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거절할 이 유가 더 없군요."
생각보다 빠른 수긍이었다.
"이참에 복귀할 생각은 없습니 까?"
"방금 내뱉은 말을 회수하고 싶어 지는데요."
그가 대답을 흐리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원하신다면 최대한 편의를 봐 드 리겠습니다. 전청운 헌터와 같은 게 이트에 배치하는 일도 없을 거고, 대외 업무는 이운우 길드장이 맡으 면 되니까요."
그런 조건이라면 전서호도 거절한 명분이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운우도 청사를 완전히 잡아 먹으려면 멀었습니다. 그 푸른 뱀은 쉽사리 주인을 섬기지 않거든요."
내가 보기엔 그 정도면 꽤나 잘 자리 잡은 것 같던데.
청사 사람들도 이제는 이운우를 곧잘 따르고 말이다. 그 속내까진 외부인인 내가 모르겠지만.
"청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라고 하면요?"
그가 복귀하는 게 청사와 이운우 에겐 해일지 몰라도 모두에겐 득일 텐데.
"운우 그 녀석이 사람 보는 눈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 은 모양입니다. 믿는다고 보내놨더 니 자기 뒤통수 칠 궁리만 하고 있 는 줄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전서호의 말투 속 잘 벼려진 칼날 을 엿봤기 때문이다.
스르륵.
그가 가늘게 휘고 있던 눈을 떴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세로로 찢어진 동공, 노란색 눈동 자가 뱀처럼 날 응시하고 있었다.
바짝 서린 긴장감에 노이트로 손 이 갔다.
그러자 방금 본 건 착각이라는 듯 전서호가 사르르 눈매를 접어 동공 을 감춘다.
"감이 좋군요.
누구라도 그 포식자 같은 눈을 보 면 긴장할 거다.
"……대체 뭘 보는 거죠?"
나는 저 사람 같지 않는 눈으로 전서호가 보는 세상이 어떤지 궁금 했다.
-서호는 가끔 우리가 못 보는 걸 보는 것처럼 굴곤 했으니까.
-내 눈은 정확하거든.
전서호를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 '눈'에 대한 얘길 빼놓지 않았으니까.
"그 눈으로 어디까지 볼 수 있는 겁니까."
내 물음에 전서호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글쎄요?"
아리송한 대답이다.
"마법사들은 원래 어린 시절 마력 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지 않습니 까."
그래.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대마 법사가 될 정도로 타고난 이들은 그랬다.
'셀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림을 매개로 마력이 발현 됐었지.
"어린 시절 눈이 약했거든요. 그 때문인지, 마나가 저절로 눈에 집중 되곤 했죠. 마치 약한 부위를 대신 하는 것처럼."
마력을 신체 일부분에 집중시키면 일시적으로 그 부분을 강화할 수 있다.
하지만 전서호의 경우처럼 마력이 끊임없이 그 부위에 머문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덕분에 시력도 회복되고 눈도 좋 아졌죠. 다만 부작용은……
그가 제 눈을 가리키며 뒷말을 이 었다.
"쓸데없이 좋아져서 다른 것들까 지 잘 보이게 됐다는 거 정도?"
"다른 것들이요?"
"뭐, 별 거 아닙니다. 이제 와선 쓸모없는 능력이죠."
아니 그래서 뭘 보는 건데!
나는 답답함에 다시 되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아냈다.
'그냥 말해줄 생각이 없는 거야.'
이미 은퇴했다곤 해도 남들이 볼 수 없는 걸 본다는 건 꽤나 큰 특 권이니까.
그 패를 굳이 내게 공개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 를 끄덕였다.
"답장이라도 써주시죠. 이운우에겐 제가 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전서호는 배 아래로 내려갔다. 갑 판 위에 홀로 앉아서 나는 회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서호가 도로 올라와 편지를 건넸다.
"여기요. 다음엔 직접 오라고도 전 해주고요."
"보안상의 이유라면 걱정하지 않 으셔도...
" 아뇨."
전서호가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까 지 봐온 것과는 꽤 다른 미소였다.
"그래도 자식처럼 키운 녀석인데 코빼기도 안 비치니 섭섭해서 그럽 니다."
"아, 네에……
나는 그가 호쾌하게 웃는 것을 멍 하니 바라봤다. 무척 보기 드문 장 면이었다.
"그럼.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습니 다."
꾸벅. 작게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곧 게이트 입장합니다!"
"4개 조 각자 위치 확인하세요. 요 새 위치 지도에서 체크하셨죠?"
"넵!"
"도착하자마자 물자 보급로부터 확보합니다. 마력석 옮기고, 바로 마법진 그릴 겁니다. 자세한 건 무 전으로 좌표 확인하면서 알려줄 겁 니다."
"총괄팀! 마법진 게이트 내부 사정 에 따라 적절히 수정할 겁니다. 즉 각적으로 수정하면서 한 치의 오차 도 없어야 합니다! 실수하면 마법 진도 실패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그 명령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뒤에 있는 부대원들에게 작게 당부했다.
"여차하면 도망치세요. 살아있으면 기회는 다음에도 있으니까요."
내 말에 정로운이 놀란 얼굴을 했 다.
"왜 그러죠?"
"어……. 아뇨. 좀 의외라서요."
그가 뒷목을 긁으며 멋쩍게 답했 다.
"대장이라면 '목숨을 잃는 한이 있 더라도 어떻게든 승리해야 한다!'라 고 말할 줄 알았거든요."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야…… 원래는 그렇게 생각했으니 까.
"……생각이 좀 바뀌었거든요."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뭣해서 대충 대답했다.
"게이트 입구 열고 있습니다!"
"5초!"
카운트다운을 들으며 짐가방을 챙 겼다.
가서 오랜 시간 있을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생존팩이 었다.
"4초!"
나는 스쳐 지나가는 푸른 머리카 락을 발견했다. 로브로 가렸지만, 그건 분명 전서호였다.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남몰래 마 법사팀에 합류한다.
"3초!"
그와 잠깐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2초!"
내 주변으로 혜원 언니와 표연원 이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1초! 입장합니다!"
익숙한 알림이 시야를 가렸다.
[알림: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개체 '한서하(각성자)'를 확인했습 니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눈을 뜨자마자 능력을 발동했다.
'공간 간섭!'
미리 봐뒀던 지도를 떠올리며 공 간 좌표를 계산한다.
'현 위치는 동서쪽. 인근에 마물들 은 좀 보이지만 마족은 없는 것 같 고.'
부글부글, 바닥에 들끓는 용암을 보니 공중 부대 위주로 인원을 꾸 려 오길 잘한 것 같았다.
"먼저 이동하죠."
"그래."
혜원 언니도 공중 부양으로 허공 에 떠서 고개를 끄덕였다.
"류라임 씨. 연원이 좀 잘 부탁드 릴게요."
"흠…… 네. 알겠어요."
류라임은 표연원이 영 마땅치 않 은지 뒷자리에 태워놓고서 시큰둥 하게 굴었다.
"죄송합니다……. 제 능력은 좀 눈 에 띄어서요."
표연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했 다.
류라임의 낫은 나도 몇 번 타본 적 있으니, 뒤에 사람을 태우는 게 어렵진 않을 거다.
"벨제부브는 아마 정중앙의 성채 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팀 에서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 벨제부 브의 위치부터 파악하는 걸 우선으
로 해야 합니다."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벨제부브 대적팀은 내가 이 끌기로 했다. 구성원의 대부분이 내 독립부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용암 지대인 이곳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공중 부대를 기용하는 게 제일 적당하니까.'
그래서 더 숙련자인 혜원 언니를 두고 내가 무리를 이끌게 된 것이 다.
초면인 이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 분 내가 아는 이들이었다.
"고도를 높여 이동합니다. 따라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