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휘이익, 바람이 불었다. 옥상을 누 비는 바람을 따라 옷자락이 나부낀 다.
"카멜롯 씨.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일단 거기서 나와 주시 죠. 불만이 있으시면 조속히 처리해 드릴 테니 저한테 말씀해 주시 면……
"에이, 너무 빡빡하게 군다
일부러 격식을 차려 얘기하는 거 였다.
카멜롯과 얽혀서 좋은 꼴을 본 사 람이 없으니까.
"누나, 내가 불만이 있어서 탈출한 거 같아요?"
"아니십니까?"
카멜롯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울 먹울먹 눈물을 머금었다.
누가 봐도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 로, 아주 감쪽같은 연기였다.
"사실은…… 저, 헌터 같은 거 하
기 싫어여. 근데 어른들이 막, 무섭 게 굴어서, 그래서 도망치고 싶
"카멜롯 씨. 곧 서른이 된다고 들 었는데요."
내 말에 그가 잠시 침묵했다.
생긋 웃는 얼굴은 그대로지만, 어 쩐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우웅? 카멜롯은 그런 거 몰라 요〜."
무리수를 둔다.
그는 검지를 입가에 대고 애교를 부렸지만, 급속도로 싸해진 분위기는 회복되지 않았다.
" 쳇."
탁.
그가 옥상 바닥에 발을 디몄다.
동시에, 고작해야 7살 정도로 보이 던 앳된 외형이 순식간에 변모한다.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지고, 눈 위 로 짙은 쌍꺼풀이 생겨났다.
키가 위로 솟으면서 골격이 뒤틀 린다. 입고 있는 옷까지 화려한 원 피스로 바뀌면, 어느덧 성숙한 외모 의 여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걱정 말아요. 다른 생각은 없었으
니까."
발성도 달라졌다.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다. 꽤나 매혹적인.
성별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변 신술 솜씨가 탁월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여행 온 기분 이라도 내고 싶어서 그랬죠."
"검은 화산 게이트는 현존하는 게 이트 중 가장 고난도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조속히 돌아가시죠."
나도 모르게 낮게 가라앉은 어투 를 사용했다.
그러자 카멜롯이 픽 코웃음 쳤다.
"너무 진지하네. 게이트 그깟 게 뭐라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게 애를 썼다.
'상대는 국빈이다. 국빈이다……. 후우.'
스스로 몇 번 세뇌한 다음에야 뒷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돌아가시죠."
"어어? 저기, 화났어요? 표정이 안 좋은데?"
그가 부러 깐족거리며 내 앞을 알
짱거렸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 냥 끌고 가야겠다.
"실례하겠습니다."
탁.
그의 손목을 잡아채자, 그가 씨익 웃었다.
후욱!
그가 한 걸음 내딛자, 손아귀에 잡 혀있던 손목이 순식간에 작아지면 서 쑤욱 빠져나갔다.
눈앞에서 키가 확 낮아졌다가, 손 목을 빼낸 다음엔 원래대로 돌아온다.
아니, 이전과 다르다.
짧은 머리카락에 골격도 뒤바뀌어 있었다. 어깨가 넓어지고 가슴이 판 판해지면서 팔다리에 근육이 붙었 다.
"짠!"
약 올리듯 내 앞에서 활짝 웃는다.
이제야 내가 아는 그의 모습 같아 졌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기엔 아 직도 좀 앳되다. 청소년 정도.
'참자, 참아.'
나는 자꾸만 허리춤에 있는 노이 트로 손길이 가려는 걸 참았다.
확 그냥 총으로 겨누고 얌전히 돌 아가자고 협박하고 싶네.
"카멜롯 씨."
"네네. 안 그래도 슬슬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실실 웃는 얼굴이 아주 얄밉다.
정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 아낸 내가 대견할 정도였다.
"어디서 찾은 거야?"
"이 앞 옥상에서."
" 옥상?"
이운우가 의아하게 바라본다.
기껏 수많은 헌터들을 속여 도망 친 주제에 간 곳이 옥상이라는 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확실해? 다른 데 갔을 수도 있잖 아. 예를 들면…… 성배가 놓인 곳 이나...
"아닌 것 같아. 사라졌단 말 듣자 마자 거의 바로 발견했거든. 이동기
가 따로 있다고 보고된 거 없지?"
"그건 없긴 해."
이운우가 겨우 긴장감을 푼 얼굴 을 했다.
"깜짝 놀랐네……. 알잖아. 저 헌 터, 왜 지금 국제연합 소속인지."
뭐. 그렇지.
나는 카멜롯이 소지품 검사를 받 으면서 실실 웃는 걸 바라보며 대 꾸했다.
"저 능력이면 사실…… 헌터보단 스파이로 적격이지."
"그래서 지금은 국적 없는 떠돌이
가 됐으니 아이러니하지만."
그와 얽힌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 을 필욘 없겠지. 나는 각설하고 이 운우에게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벨제부브 대적팀은 전부 국내 헌 터로만 이루어진 거 맞지?"
"확실해. 팀워크도 중요하니까. 파 견 헌터는 대부분 외곽 지역으로 돌렸어. 지금 전력으로는 외곽 지역 을 지켜내는 것도 사실 빠듯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조심스럽게 이야길 꺼냈다.
"힘든 결정을 내렸네."
표연원에 대한 얘기다. 나는 침착 하게 말을 골랐다.
"그런가."
"너랑 표혜원 헌터 둘 다 벨제부 브 대적팀에 들어온다 했을 때 많 이 놀랐어."
"나야 들어갈 줄 알았을 거 아냐."
"표혜원 헌터는 의외였지."
언니는 종종 표연원과 관련된 일 이면 사적인 감정이 개입될까 걱정 된다며 자리를 피하곤 했으니까.
아카데미와 관련된 회의에서도 그
랬는데, 이번에 그보다 더한 것에 참가한다니까 놀랐을 만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운우를 위해 뒷말은 삼켰다.
"……네 의도가 다 마음에 든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도 느끼는 바 가 있었어."
이운우와 이전 얘길 하지 않은 것 도 거의 2주였다.
묶인 매듭을 풀어낼 때도 됐다.
"지금까지 내 태도가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핑계만 댈 뿐, 오히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거였단 사 실을 이제야 알았으니까."
이운우가 생긋 웃었다.
누군가의 속을 긁으려고 시동을 걸 때 짓는 미소였다.
"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네. 평 생 모를 줄 알았는데.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역지사지가 최고의 해결책이야."
아주 속을 박박 긁는다. 이때만 기 다렸다는 듯이.
그래도 지은 죄가 있어 입을 다물 었다.
"……지금 얘길 꺼내기 좀 그렇긴 한데. 부탁할 게 있어."
"뭔데?"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아직 제대로 안건에 올리진 않았 지만 문제가 생겼거든."
이운우가 운을 띄운다. 얼굴 표정 이 좀 굳어 있었다.
"무슨 문제. 대적팀에?"
"아니. 마법사팀에."
이운우는 벨제부브 대적팀이 아니 라 마법사팀에 속했다.
애초에 이운우나 윤강백처럼 짊어 진 것이 많은 이들은 이런 데 끼는 게 아니다.
게다가 윤강백이면 몰라도 이운우 는 마법사 아니던가.
이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마법진 에 쓰일 마력을 조각하려면 실력 좋은 마법사가 많을수록 좋았다.
"뭐가 문제야. 마력 대비 필요한 최소한의 마법사 숫자 겨우 끼워 맞췄잖아. 4세대 마법사까지 싹싹 끌어 모으면서 다 준비된 거 아니 었어?"
"겨우 맞췄헜지. 근데……
이운우도 난처한 얼굴을 했다.
"마법사팀에 내정되고 몸 사리라
고 했는데, 몰래 던전에서 부산물 수거하다가…… 크게 다친 모양이 야."
"어처구니가 없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사욕에 눈이 멀어 그런 짓을 벌이다니.
던전이 일반 게이트보다 쉽긴 하 지만 그건 보스몬스터가 리젠되지 않았을 때 얘기다.
방심하다 큰 코 다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한 명 정도는 어떻 게든 더 찾아보면 구할 수 있을 테 니까."
"한 명이 아니야."
세상에.
나는 이운우의 안색이 묘하게 창 백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팀으로 갔다고?"
"같은 길드 소속이었대."
이운우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 어내렸다. 미치겠군. 정말.
"몇 명이나 비었어, 지금?"
"……여덟 명."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나는 억 소리도 못 내고 눈만 크게 떴다.
"소리 내지 마. 아직 아무도 몰라. 제길. 마법사팀 담당 나잖아. 아직 공식적으로 보고 안 올렸어."
"당장 올려! 지금이라도 국제 연합 에 파견 요청해야지."
"가뜩이나 윤강백 길드장이랑 권 력 나눠먹기 하는 것도 짜증 나는 데, 그럴 순 없어. 이번 일이 밝혀 지면 결국 총 책임자는 나야. 청사 만 입지가 좁아진다고."
그럼 대체 어떡하려고 이런단 말 인가.
없는 마법사를 어디서 구해올 수
도 없는 노릇인데.
"한 가지…… 한 가지 방법이 있 어."
이운우가 내게 스윽 쪽지를 전했 다.
"난 당장 파견 온 헌터들 뒷바라 지하느라 움직일 수가 없어. 내 대 신 네가 이것 좀 전달해줘."
"누구한테?"
이운우는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누가 듣고 있진 않은지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청사의 전 길드장인,"
푸른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왔다.
"전서호…… 그분한테."
나는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벌렸 다가 다시 닫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완전히 종적을 감춘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부터 시작해 서, 과연 그 사람이 되돌아올까, 하 는 원론적인 질문까지.
겨우 말을 고르고 골라 이렇게 툭 내뱉었다.
"……어딨는지 알아?"
이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면 됐다. 나는 한숨과 함께 속삭였 다.
"너 나한테 빚진 거야."
동시에 이운우가 건넨 쪽지를 챙 겼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가서 어떻게든 전서호를 설득해야 했다.
"알아. 다음에 네 부탁, 무리한 거 아니면 뭐든 하나 들어줄게."
"그 말 지켜야 한다."
"무섭네, 벌써부터."
두고 봐라.
청사의 길드장에게 뭐든 부탁해도 된다니. 그건 흔치않은 기회니까.
"부탁할게."
" 오냐."
나는 이운우의 머리를 툭, 치고는 자리를 떴다.
당장 2주 안에 전서호를 설득해야 하니, 갈 길이 바빴다.
* * *
퐁당.
물속에 뭔가 빠지는 소리가 났다. 바다를 향해 드리운 낚싯대가 바람따라 유유히 흔들렸다.
"팔자가 좋으시네요."
나는 간략히 평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서호는, 낚싯대 옆에 반쯤 누울 수 있는 의자를 두고 얼굴엔 모자 를 덮어쓴 채였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 다.
"운우가 보냈나 봅니다. 다른 이에 게 알려준 기억은 없으니."
"맞아요."
타악.
그의 배에 발을 디뎠다. 전서호는 그제야 모자를 옆으로 거두어내고 얼굴을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한서하 헌터."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서호…… 전 길드장님."
"그냥 전서호 씨라고 불러도 됩니 다."
늘 빈틈없이 차려입은 모습만 보 다가 이런 행색을 보니 꽤나 색다 르다.
정말 어부처럼 간단히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머리도 부스스하고, 수염도 드문드 문 나 있었다. 신발도 세련된 구두 대신 부츠를 신고 있었다.
"이거 참. 대접할 게 따로 없는 데."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휙, 손가 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바다 한가운데가 움푹, 파 이면서 네모난 어항 모양으로 두등 실 떠올랐다.
그 안에서 물고기들이 놀라 펄떡 였다.
"회라도 준비해드릴게요."
딱!
손가락을 튕기자 물고기만 툭 배 위로 내던져진다.
그 괴물 같은 컨트롤에 헛웃음만 나왔다.
"……낚싯대는 왜 있는 겁니까?"
"운치 있지 않나요?"
빙긋 웃는 얼굴이 예전과 아주 똑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