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화
"……저요?"
표연원이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느냐고 되묻는 어조로 중얼거 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해도 돼."
나는 내심 그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다.
"너한테 강요할 순 없으니까. 아직 공식 회의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지 만 너한테 미리 말하는 거야. 네 의견이 제일 중요하잖아."
그는 조금 멍해 보였다.
"아……. 죄송해요. 지금 당장 말 하긴 어렵네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당연하지. 좀 더 고민해 보고, 못 할 거 같으면 얘기해도 돼."
나는 혼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너한테 이런 얘길 꺼내서 미안해.
연원아. 나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 았는데……
"아니에요. 누나가 무슨 잘못이 있 다고요."
다정한 말투에 도리어 내가 더 아 팠다.
표연원은 한동안 침묵했고,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날 보며 물었다.
"제가 거절하면, 그 자리엔 누가 서게 되는 거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고 싶 지 않았으니까.
그가 거절하면 두 번째 적임자는 나였고, 그걸 알게 되면 표연원이 이 요청을 거부하지 않으리란 걸 나도 알았기 때문이다.
"알려주세요. 적어도 이 문제에 관 해선 저도 알 권리가 있어요."
표연원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 로 내게 말했다. 그의 말이 타당했 다.
그래서 난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답 했다.
"..나야."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내 고유 스킬 알잖아. 너 보단 내가 생존 가능성이 더 높아."
"하지만 벨제부브를 붙잡아두는 데는 제가 적임자고요."
그는 영특한 머리로 누구도 알려 주지 않은 핵심을 찔러왔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먼저 얘길 꺼낸 게 나면서도, 나는 아직 표연원이 '제가 할게요.'라고 답하는 걸 들을 준비가 덜 되어 있 었던 거다.
"연원아. 혜원 언니를 생각해. 언 니가 이 일을 알면, 무슨 표정을
하겠어."
"제가 이 요청을 거부하면, 누나가 그곳에 들어가게 되잖아요."
"나도 거부하면……
"그럼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서겠죠."
결국 이건 폭탄 돌리기에 불과한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으 니까.
누군가는 그곳에 남아야 한다는 것.
"……누나. 괜찮아요."
도리어 표연원이 날 위로했다.
그가 가볍게 나를 껴안았다. 나보 다 훌쩍 커버린 그는 어느새 나를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커버렸다.
"헌터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죠."
그게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는 말인 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 말이 흡사 내게 '헌터가 되기로 했으면 동료의 죽음 정도는 각오해 야 하지 않냐'고 속삭이는 것 같았 다.
"난…… 항상, 내가 무모하기만 했 어 서.으날 잃는 각오는 했어도, 널 잃은 각오는 한 적이 없어서.
그래서 더욱 아팠다.
네가 고등학생이던 때부터 키가 이만큼 커지는 과정을 내가 다 지 켜봤는데.
네가 일반인이던 때부터 정령과 계약해 한 명의 헌터로 자리하는 그 일련의 과정을 함께했는데.
내가 어떻게 널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겠어.
"연원아. 그냥 못 하겠다고 해."
나는 거의 애원했다.
이운우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혜원 언니랑 날 생각해야지."
그러나 표연원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자의 낯빛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와 표연원은 약속 이라도 한 것처럼 아침 일찍 일어 났다.
혜원 언니는 밤새 일을 처리하고 새벽 늦게야 들어온 것 같았다.
표연원이 익숙하게 아침밥을 준비 하자 맛있는 냄새가 집 안 가득 퍼 졌다.
나는 표연원의 안색을 살폈다. 그 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해 서, 순간 어젯밤 일이 내 꿈은 아 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와〜. 맛있는 냄새 나네?"
혜원 언니가 하암, 하품을 하며 거 실로 나왔다.
"아침밥 다 됐어요. 볶음밥이에 요."
"맛있겠다!"
고슬고슬한 밥알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어제 너무 피곤해서 오자마자 쓰 러져서 잤다니까."
"무슨 일이었어요?"
"하마터면 이중장부 만들었다고 감사 뜰 뻔했어."
혜원 언니는 툴툴 대면서 밥을 한 숟가락 크게 퍼 입에 넣었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방심한 순간, 혜원 언니가 훅 치고 들어왔다.
"맞다, 서하야. 어제 너 불렀던 건 무슨 얘기였어?"
푸흡!
나도 모르게 볶음밥을 내뱉을 뻔 했다. 겨우 참아내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어? 미안, 미안. 내가 밥 먹는데 일 얘길 꺼냈네."
"큼, 큼. 아니에요. 그게 아니
라.."
나는 표연원을 힐끗 바라봤다.
그는 주방을 대충 정리하고 자기 몫을 덜어 막 식탁에 앉았다.
한 숟가락 채 먹기도 전에 입을 연다.
"혜원 누나. 나 검은 화산 게이트 공략에 함께하게 됐어."
"어? 뭐……. 역천도 클리어팀에 들어갈 거니까 당연히 너도 같이 갈 거긴 했는데."
"아니. 그쪽 말고, 벨제부브 전담 팀으로."
표연원이 거기까지 말하자 혜원 언니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차마 언니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표연원은 차분하게 모든 것들을
설명했다. 왜 자신이 선택됐는지.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모 든 것을.
"……그래서. 나는 그 제안, 수락 하고 싶어."
혜원 언니는 말이 없었다.
한 입 크게 욱여넣은 쌀알들이 넘 어가지도 못한 채 입 안에 담겨있 었다.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이야. 누나. 나는 이미 다 각오했어."
표연원은 독단으로 자신의 결심을 혜원 언니에게 강요하는 대신, 상황 을 설명하고 그녀에게 동의를 구했다.
"많이 고민해봤는데. 역시 내가 하 는 게 맞는 거 같아."
혜원 언니는 겨우 쌀알을 삼켜내 고는 내게 물었다.
"서하야……. 너도 동의한 거야?"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동의 하지 못했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 다.
혜원 언니는 입을 차마 다물지 못 한 채 표연원을 바라봤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
"누나. 내가 거절하면 그 다음 사 람이 떠맡게 될 거야. 난 이미 이 그니스를 놓치고서 나 때문에 다른 무고한 헌터가 희생될까 봐 밤잠 설치면서 고민했어. 그렇게 해서 살 아도 산 게 아닐 거야."
담담한 어조였지만 묵직한 신념이 느껴졌다.
"그리고, 혹시 몰라? 내 능력은 아 직 연구 중에 있고 무궁무진한 가 능성이 있잖아."
표연원이 애써 활짝 웃었다. 누구 도 따라 웃지 않았지만.
"당분간 던전을 오가면서 더 연구
할 생각이거든. 어쩌면 거기서 뭔가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고……
표연원도 말끝이 살짝 떨려왔다. 말하다 보니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 다.
여전히 혜원 언니는 입을 벌린 채 표연원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표연원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 를, 기이하게 뒤틀린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
"아니."
나는 표연원의 말을 끊어냈다. 차 마 더 들을 수가 없었다.
"넌 안 죽을 거야."
표연원의 의아한 얼굴을 보며, 한 번 더 되뇌었다.
"……널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 야……
그래. 나는 언제나 제3의 선택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거든.
표연원이 죽느냐, 모두 다 실패하 느냐.
그 두 가지 갈림길에서 완전히 다 른 길을 개척해내야만 했다.
* * *
여기저기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가뜩이나 예민한 기감에 사람들이 많이 잡히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 갑……. ……그분이…….
……사라졌……!"
"……니다. 당장 사람들……!"
나는 슬쩍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후우, 숨 막혀.
국제 연합에서 파견 온 헌터들이
도착하느라 온통 난리였다.
대외적으로 중요한 행사기도 하니 까 말이다.
의전 담당자들이 사방으로 뛰면서 귀빈들을 모시느라 요란이었다.
'듣자 하니 누가 사라진 것 같던 데. 뭐, 헌터니까 위험할 일은 없겠 지.'
보디가드를 곁에 두는 경우가 왕 왕 있긴 한데, 사실 웃기는 일이다. 그냥 허울에 불과할 뿐이고.
막상 무슨 일이 생기면 헌터가 보 디가드를 지키는 일이 생길지도 모 른다.
'저번에 파견 나갔던 때 본 얼굴들 이 몇 있긴 하던데……'
나는 윤강백을 통해 봤던 파견 헌 터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되짚어봤 다.
'필립, 그 자식은 아직 구금 중일 거고.'
그 패거리가 한국에 들어온다 해 도 나한테 해코지를 하진 못할 거 다. 여긴 내 홈그라운드니까.
"1, 119 좀 불러요!"
"허억! 어린애가 저길 어떻게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이 내 등 뒤를 바라보며 경악 어린 표정 을 짓고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어린아이가 건물 위에?'
주변에 건물이 많아 높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져도 그러려니 했는 데, 건물 외곽에 한 명 있던 모양 이다.
"애야! 놀라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
"119 불렀어요?"
"네, 곧 온대요!"
웅성웅성,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었 다.
고개를 들자 멀찍이서 누군가 보 였다. 건물 옥상에 쳐진 울타리에 걸터앉아 태연하게 발을 휘휘 젓는 다.
태연한 움직임이었다.
'……일반인은 아닌데.'
가만히 앉아있지만 대충 알 수 있 었다. 일반인의 기척이 아니다.
헌터다.
'어린아이로 보여.'
이번에 받은 리스트 중에 저렇게 어린 애가 있던가? 내 기억엔 없었 다.
'진짜 어린애도 아니니, 구해줄 필 욘 없겠지.'
119도 이미 부른 것 같고.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는 때였다.
"헌터! 헌터 맞죠!"
누군가 날 향해 소리쳤다.
아차.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헌터라고? 헌터면 얼른 저 애 좀 구해줘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애가 저러고 있는데 그냥 갈 거 예요?"
순식간에 쏠리는 시선과 관심이 당혹스럽다. 그냥 이대로 자리를 뜰 까…… 싶었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와!"
"근처에 헌터가 있어서 다행이야. 저 애도 오늘 갈 운명은 아닌 게 지."
"조심해요, 언니!"
어차피 의전 팀에서 애타게 찾는 인물인 것 같고, 의도한 건 아니지 만 미아 찾기 한 셈 치지, 뭐.
'공간 간섭'
눈을 감았다 떴을 땐, 나도 건물 옥상에 서 있었다.
"우와, 그거 누나 고유 스킬이야?"
아이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바벨의 귀마개를 차고 나온 게 다 행이었다. 행사 일을 맡진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차고 있던 건데.
"돌아가시죠."
"웅? 뭐가아?"
천연덕스럽게 굴지만 내겐 통하지 않는다.
귀찮게 더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 다.
"당신을 찾느라 밑에 난리가 났어 요."
"진짜? 때 되면 돌아간다고 친절 하게 쪽지까지 남겨뒀는데."
멀리서 봤을 땐 몰랐지만, 가까이 서 보니 누구인지 감이 왔다.
딱 이렇게 생긴 남자가 있었거든. 사진 속에선 이것보다 더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검은 머리카락에 은회색 눈동자. 독특한 조합이라 잊을 수 없다.
"'쉐입쉬프터', 카멜롯 씨."
"그 이명은 싫다〜. 몬스터 같잖 아."
카멜롯,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변신의 귀재. 그가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