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걘 기동성이 좋지도 않아."
나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뒤져 겨우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모르겠어? 이번 작전에서 '탈출' 은 부차적인 목표야. '시간 끌기'가 1차 목표라고."
"차라리 내가 하는 건……?"
이운우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하면 확실히 살아서 탈출할 확률은 높겠지. 하지만 말했잖아. 중요한 건 탈출이 아니라니까."
나는 멍하니 노이트를 내려다봤다.
내가 갖고 있는 특수 탄환들 중, 상대를 속박하는 스킬은…… 없다.
탈출은 몰라도, 벨제부브를 확실하 게 붙잡을 만한 힘이 없었다.
"이미 다른 마왕과 마주한 적이 있잖아. 그때 마주했던 마왕과 다르 게 상성이 나쁜 것도 아니니, 시간 끌기엔 표연원 헌터가 제격인 것
같은데."
"벨제부브가 나한테 집착하는 거 알잖아. 나라면 충분히 벨제부브를 묶어두고, 나중에 탈출할 수도 있 어."
내 항변에 윤강백도 고개를 살살 저었다.
"우리끼리 하는 공략이면 모를까, 국제 연합이 개입한 이상 그런 불 확실한 요소는 최소화해야 해. 한서 하 헌터."
나는 멍하니 윤강백을 바라봤다.
혜원 언니와 연수원부터 동기였으 니, 그도 분명 알 것 아닌가.
언니가 표연원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나는 시선을 돌려 전청운도 바라 봤다.
그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똑바 로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 다.
"냉정하게 생각해라."
그리고 뒷말을 덧붙인다.
"연화도 게이트에서 네 스스로를 내던질 때, 김기택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했다. 그때 네가 뭐라고 말
했었지?"
"……게이트 안에서 사람 목숨은 개미만도 못하니…… 아깝게 여겨 선 안 된다고."
내 목숨을 걸었을 때와 달리 뼈아 픈 말이었다.
"어쩔 수 없어. 국제 연합으로 파 견 오는 헌터들에게 이런 역할까지 떠맡길 순 없으니까. 외교적인 문제 도 있고. 이 역할은 국내 헌터들 중 한 명이 도맡아야 해."
이운우는 그 뒤로 표연원이 그 역 할로 제격인 이유를 줄줄 설명했다.
분명 논리적이고 타당한 말들이었
지만, 제대로 이해되는 건 없었다.
"한서하."
이운우가 날 부르며 내 뺨을 거머 쥐었다.
고개를 자신에게 고정하고, 초점 잃는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네 목숨을 망설임 없이 던질 수 있다면, 타인의 목숨도 그렇게 배팅 할 수 있어야지."
그가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
"저번에 네가 그랬던 것처럼."
검은 화산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 그가 내게 애원했던 것이 떠올랐다.
- 머리로는 네가 필요하단 걸 알았 으니까.
그가 자존심을 모두 내버리고, 울 먹이는 얼굴로 내게 부탁했었다.
제발 출전하지 말아 달라고.
- 그리고 너도 알잖아. 참전한 이 상, 게이트에 입장한 이상. 내가 헌 터로 활동하는 이상…… 목숨은 언 제 잃어도 이상할 거 없다는 거.
내 대답이 네 심장을 찢어놨겠구 나.
지금 내 심정이 그러한 것처럼.
나는 냉철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
동자를 바라보면서 이제야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내 목숨을 등한시하 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억장을 무너뜨렸는지 말이다.
"표연원 헌터의 죽음에 네가 책임 을 느낄 필요는 없어."
- 내 죽음에 네가 책임을 느낄 필 요는 없어.
"억지로 밀어 넣을 순 없는 거고. 결국 표연원 헌터의 선택에 달린 문제니까."
- 내가 스스로 선택한 거야. 네 말 을 들었는데도 멈추지 않은 건 나니까.
내가 했던 말들이 오버랩됐다.
"그만해."
" 뭘?"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고스란히 내게 되돌려주려고.
날 선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날 상처 입히려고 그러는 거잖아.
나는 뒷말을 삼켜냈지만, 그는 내 가 내뱉지 못한 말들을 들은 것처 럼 굴었다.
이운우가 씨익 웃었다.
저번에 전청운에게 보여준 적 있 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고 싶어 하는 미소였다.
"내가? 아닌데."
천연덕스럽게 거짓을 내뱉는다.
"……헌터가 되기로 했으면 목숨 을 버릴 각오 정도 해야 한다고. 그러니 전쟁터에서 죽을지언정 나 머지 모두를 살릴 수 있으면 수지 맞는 장사라고. 그렇게 말했던 건..
그가 뱀처럼 속살거렸다.
"너잖아. 서하야."
나는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 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지만, 깊은 절망에 다리가 잘게 떨렸다.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우리가 제안 할 거야. 표연원 헌터가 심적인 부 담을 덜 느끼도록 그나마 친분이 있는 네가 제안해주길 요청하는 거 고."
이운우, 이 개자식.
절망 다음엔 분노가 치밀어 올랐 다.
적격인 헌터로 표연원이 선택된 데는 분명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내게 칼자루를 쥐여 주는 건 이운우의 선택이다.
"물론 거절해도 돼. 그 다음으로 적격인 헌터가 한서하 헌터란 걸 알면서도 그가 거절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타악!
나는 참지 못하고 이운우의 멱살 을 잡아챘다.
"큽……!"
순간적으로 목이 졸리며 그가 외
마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입가엔 여전히 미소를 띤 채였다. 개자식.
"하하. 이거 왜 이래?"
"꼭 이래야 했어? 다른 방식도 많 았잖아."
내가 했던 말들에 그가 상처받았 다는 건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정말로 표연원의 목숨이 달린 이 상황에서 그래야만 했냐고.
"다른 방식? 어떤 거."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이런 상황에 편승해서
은근슬쩍 흘리지 말고."
"네가 전하기 싫으면 말아. 공식적 으로 제안할 수도 있으니까. 네가 표연원 헌터에게 제안하도록 한 건 우리 나름의 배려였어."
그야 겉으론 그렇겠지!
이런 동귀어진을 제의할 땐, 그나 마 친분 있는 이가 소식을 전하게 해 심적인 부담을 덜고 거절을 말 하기 쉽게 하는 게 매뉴얼이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그 도 알고, 나도 알았다.
"스스로 네 목숨을 헐값으로 여겼 으면, 다른 사람 목숨도 그 정도
값이 될 수 있단 걸 알았어야지."
치가 떨리도록 실감되는 말이었다.
-이상한 거 부탁하면 거절하고. 알겠지?
당장 오늘, 혜원 언니의 당부를 들 었으면서 또다시 목숨을 내던지려 했으니까.
"진정하게, 둘 다."
윤강백이 우리 둘을 말렸다.
나는 이운우의 멱살을 잡았던 걸 탁 놓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이운우 길드장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어 보이는데. 반론이 있 나, 한서하 헌터."
"……없습니다."
"모두가 생존하는 게 당연히 제일 좋겠지만 항상 그럴 순 없다는 거. 자네도 알지 않나."
"……예. 알아요."
그때마다 내 목숨을 배팅했으나, 이번엔 내 친동생 같은 녀석의 목 숨을 배팅한 게 다를 뿐이다.
그래. 이운우를 탓해봤자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객관적으로 표연원은 4세대 중 가
장 뛰어난 헌터였고, 그의 능력은 포박술에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알지만…… 누군가 죽어야 한다 면, 제가 죽을 줄 알았습니다."
"가끔은 선택지가 없기도 하지."
윤강백은 너무도 담담한 목소리였 다.
그도 혜원 언니의 곁에 있었으면, 표연원을 모르지 않을 텐데.
너무 많은 이들을 잃으면 이렇게 담담해지는 걸까.
나도 수없이 많은 이들을 잃었는 데, 왜 항상 아프기만 한지.
"……알겠습니다. 제가, 제안할게 요."
그게 나을 것이다. 내가 아는 표연 원은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남을 사지에 밀어 넣을 수 있는 아 이가 아니니까.
공식적으로 제의가 들어온다면 고 민하다 수긍하겠지.
하지만 내 얼굴을 보면 마음이 조 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 * *
탁.
문을 닫자, 막 씻고 나왔는지 수건 을 머리에 얹은 표연원이 웃으며 날 맞이했다.
"이제 왔어요? 혜원 누나는 더 일 찍 왔던데."
"잠깐 일이 좀 있어서. 언니는?"
"길드에 일이 생겼나 봐요. 연호 형 전화 받고 잠깐 나갔어요."
"심각한 일이래?"
표연원은 머리를 탈탈 털며 대답 했다.
"그런 건 아니고, 장부에서 좀 이
상한 점이 발견됐나 봐요."
흐음. 역천 길드 운영에 관한 일이 면 혜원 언니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쪽은 걱정되는 게 없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오늘 회의에선 무슨 얘기가 나왔 어요? 또 게이트가 열릴 것 같대 요?"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는 저 애였다.
" 아니......
나는 무너질 것 같았고, 무너지고 싶었지만 겨우 참아냈다.
"아! 그리고 누나가 해준 조언 덕 분에 저 감을 좀 잡은 거 같아요."
"내 조언?"
"왜, 전에 얘기해준 적 있잖아요. 제가 계약한 건 숲이 아니라 숲의 정령이니까, 제 힘도 식물처럼 보이 지만 사실 식물이 아닌 거 아니냐 고요."
"어어. 그랬지."
5황자를 보러 나가기 전에 잠깐 그런 얘길 했던 기억이 났다.
"처음에는 느낌이 잘 안 왔는데, 좀 연습하다 보니 알 것 같아요.
오늘도 던전에 가서 연습하고 왔거 든요."
표연원은 그러면서 이제 불에 타 지 않는다는 등, 결국 자신이 소환 한 것이니 완벽하게 식물이라기보 단 자신의 역량에 좌우되는 것이었 다는 둥 하는 얘길 늘어놨다.
나는 그것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얘는 지금 이그니스를 잡으려고 이렇게 분투하는데.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차라리 표연원이 이그니스를 상대
하는 거라면 나도 함께 싸웠을 텐 데.
아니. 하다못해 그 녀석과 싸우다 죽는 거라면 표연원도 후회는 없었 을지도 모르는데.
"……누나. 서하 누나."
"어, 어? 웅."
집중하지 못하는 날 보며 표연원 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아냐. 무슨 일은. 그런 거 없어."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에이. 표정이 그게 아닌데요?"
표연원이 상냥하게 말을 걸 때마 다, 내 안에 있는 양심이 불타오르 는 것 같았다.
심장이 꽉 죄이며 아파 왔다.
"괜찮아요. 말해봐요. 무슨 일이에 요?"
나는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이걸 지금 말하는 게 맞을까?'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지금이 아 니라면 언제 또 표연원에게 이 얘 길 꺼낼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 다.
'혜원 언니도 없는 지금 말하는 게
나을까.'
물론 언젠가는 언니도 알아야 하 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연원아, 사실은……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 었다.
"사실은…… 이번에 검은 화산 게 이트 공략에 다시 도전할 거야. 국 제 연합의 도움을 받아서."
"아, 드디어요? 너무 오래 방치하 긴 했죠. 그곳에 살던 주민분들도아직까지 보상 절차가 진행 중이
"새로 개발한 마법진을 이용하면 직접 싸우지 않아도 놈들이 못 빠 져 나오게 막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길 수 있대."
"와! 그거 잘됐네요! 좋은 소식 아 닌가요?"
웃으며 말하는 표연원에게, 나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벨제부브 를 붙잡을 사람이 필요한데. 가장 적합한 헌터로 지목된 게…… 너야. 연원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