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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212화 (223/361)

212화

챕터: 혁명의 불씨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불안하게."

다니엘이 긴장감 어린 분위기를 깨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사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 을 들고 왔다. 찻잔에 와인을 부어벌컥벌컥 마셨다.

"천천히 마셔."

"이 정도론 끄떡없어."

다니엘은 갑자기 병나발을 불 기 세인 이사벨라를 보며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먼저 접근한 건 나였지만, 그 이 후부턴 다니엘, 당신이 먼저 날 찾 아왔잖아."

이사벨라의 말에 다니엘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 을 뿐이었다.

이사벨라가 로젤리타가 아니란 걸.

"처음엔 나한테 반한 줄 알았지."

" 뭐'?"

"그렇게 황당하게 보지 말아줄 래?"

다니엘의 반응과 별개로, 이사벨라 를 사모하는 남자들은 줄을 서고도 남았다.

멜몬드 백작가 앞에 사람들이 줄 을서 수도 바깥까지 늘어졌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금방 아니란 걸 알았어. 당신 눈빛은 뭐랄까…… 사랑에 빠 졌다기보단, 뭔가 그리운 걸 찾아

헤매는 느낌이었거든."

이사벨라는 와인을 한 잔 더 따라 홀짝였다.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친해졌지 만, 여전히 우린 서로에 대해서 많 이 모르지."

이사벨라도, 다니엘도. 각자의 사 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해."

"과찬이군."

"왜? 명예로운 황제 폐하의 기사 인 데다, 가문으로 옭아맬 수 없기

에 모든 귀족들이 당신을 탐내잖아. 우습지 않나?"

귀족 부인인 이사벨라와 황실 직 속 기사인 다니엘이 만날 일은 거 의 없었다.

이사벨라는 다니엘을 늘 먼발치에 서 바라볼 뿐이었지만, 사교계에서 들리는 그에 대한 소문은 알고 있 었다.

그 고명한 귀족들이 남몰래 탐내 는 평민 기사.

금은보화도, 가문의 명예도, 가족 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아 무도 흔들 수 없는 그 고고함.

이사벨라는 그게 우습다고 생각했 다.

"다들 앞에선 당신이 평민이라고 비웃지만, 뒤에선 당신을 갖고 싶어 하는 꼴이라니."

이사벨라가 싸늘한 비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내 찻잔으로 그것을 가 려 낸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렸 을 땐, 비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 고 온화한 미소만 남아있었다.

"기사직을 하사받았으니 평민은 아니야. 명예 작위도 있고."

다니엘이 시선을 돌리며 작게 대 꾸했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수십, 수백 번 도 넘게 받은 모욕을 견뎌낼 수 있 었던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스스로 귀족 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 이다.

"명예. 명예 작위라. 당신에게 먼 저 인사를 건네는 귀족이 몇이나 있지?"

"……아무도."

"그래. 시골 촌구석 남작위보다 못

한 명예 작위가 무슨 의미가 있다 고. 허울 좋게 꾸며내는 것에 불과 한데."

이사벨라의 말이 다니엘의 가슴 한편을 찔렀다.

무도회장에 가면 한미한 가문의 귀족도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낮은 지위의 사람이 먼저 인사하 는 것이 예의이니, 모두가 다니엘을 모르는 척했다.

평민이었던 이에게 예를 갖추는 게 싫어서.

"그래서 나도 무도회장을 안 가.

나도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싫거 든."

자존심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으니, 사람들은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저 평민 기사가 아주 고고한 절개 를 가지고 있다고.

제 주인이 아니면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이다.

"우습지."

그 꼴들이. 다니엘은 소리 내어 웃 고 싶었다. 우습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정작 입가에 지어진 건 한

쪽 입꼬리만 올라간 비틀린 미소였 다.

"난 당신이 참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해."

이사벨라는 와인을 한 잔 더 마셨 다. 빠른 속도였다.

"평민이라는 것과 별개로 말이야."

다니엘은 눈썹을 꿈틀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글쎄......

다니엘은 전제부터 잘못됐다고 말 해주고 싶었다.

자신은 평민이 아니며, 그렇기 때

문에 '평민이라는 것과 별개로 좋 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말도 안 되 는 소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가 몰락 귀족이라는 사 실을 밝힐 순 없으니 말끝을 흐리 며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 능력이 있지만 평민이라 발굴되지 못한 원석들 말이야."

"아니. 그들 중 정말로 능력이 뛰 어난 이가 있었으면 신분과 상관없 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거야. 나처럼."

"일평생 농사만 짓는 농민이 자신

에게 음악을 짓는 재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그 평민이 정말로 재능이 있었다 면."

다니엘은 평민들 가운데 재능 있 는 이들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소수고, 대체 로 그들보단 잘 교육받은 귀족 자 제들이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그리고 나 같은 평민 출신이 아 주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기사나 마법사처럼, 신분보단 실력 이 더 중요시되는 분야는 종종 평민 출신들이 나오곤 했다.

다니엘의 말에 이사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은 귀족들이잖아. 다니엘. 기사들이 왜 대부분 귀족일지 생각 해봤어? 귀족들은 저 평민들보다 훨씬 수가 적은데도?"

"그야, 귀족들 중에 더 뛰어난 기 사가 많았던 탓이지."

"아니. 저들은 기회를 얻지 못한 거야."

이사벨라는 단호하게 다니엘의 말 을 부정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해서, 기사가 될 재능이 있는 이들도 그 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평민들을 찾아가 전부 조사해본 것도 아닌데 확신이 넘치는군."

다니엘은 차게 비웃었다.

"난 당신이 내 말에 동의할 줄 알 았는데."

이사벨라도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 로 다니엘을 바라봤다.

"멜몬드 백작부인. 이 고귀한 저택 안에만 있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저 평민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

럼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 아니 야."

다니엘은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 억들이 떠올라 손이 잘게 떨렸다.

몰락 귀족이 되어 노예로 팔려나 간 그 직후, 그는 진창을 헤맸다.

로스 가문과 연관이 있던 다른 귀 족가에서 그를 구출하지 않았더라 면 진작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 다.

"오히려 그들은 추악하고, 교육받 지 못해 본능에 충실하지. 백작부인 인 당신은 그들 틈바구니에서 단 10분도 버티지 못할걸?"

"당신도 평민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이사벨라는 상처받은 어린아이처 럼 덜덜 떨기보단, 냉담한 얼굴로 그와 마주 서는 걸 택했다.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게 뭐가 나쁜데?"

"생존뿐만이 아니야. 자신들의 욕 망에도 솔직하거든. 먹고 싶은 걸 먹기 위해 도둑질하고, 자고 싶은 데서 자기 위해 집주인을 죽이는 그런 종류의 솔직함 말이야."

"귀족들이 고급 음식을 먹고 고급 옷으로 치장할 때 그들은 빵 한 조

각 더 먹기 위해 자식을 팔아!"

"그래.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면 서 말이지. 빵 한 조각에 자식을 내다 파는 족속들이 짐승과 다른 게 뭔데?"

이사벨라는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 극한의 상황에 처해본 것도 아니면서 입은 뚫려서 잘도 나불대 네. 그들이라고 그러고 싶었겠어? 당장 배곯는 아이 둘 중 하나라도 살려보겠다고 그러는 걸 대체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그 말 을 하니 좀 웃기는군."

다니엘은 입매를 비틀며, 부러 날 카로운 단어들을 골라 쏘아붙였다.

"사치스러운 귀족. 그 대명사가 당 신 아니던가. 멜몬드 백작부인."

이사벨라는 입을 다물었다.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게 사치스러 운 귀족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건 익숙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니엘이 그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난…… 당신이 날 이해할 줄 알 았어."

귀족들 사이에서 늘 맞지 않는 옷 을 입은 것처럼 삐걱댈 때.

남들은 그걸 보고 본 적 없는 매 력이라고 칭송할 때 이사벨라는 홀 로 외로웠다.

그 사이에서 평민 출신인 다니엘 과 친해진 것이 어쩌면 마음의 위 안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면. 좀 다를 줄 알았어."

이사벨라는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눈물이 맺혀 앞이 흐려졌지만, 여 기서 울고 싶지 않았다.

"날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당 신 착각이야."

다니엘은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평민 출신이라고 해서 무조 건 그들을 위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 거칠고 난폭한 손속을 제일 잘 아는 게 난데."

그는 떨리는 손끝을 애써 감췄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 았다.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하고 고급 향유를 뿌린 주제에 평민이니 뭐니 나불대는 이사벨라가 가증스럽고 역겹기까지 했다.

"내가 착각했던 모양이야."

이 여자가 로젤리타와 닮았다고 생각하다니. 그런 끔찍한 상상이 어 디 있겠는가.

"나도, 사람을 잘못 봤나 봐."

이사벨라는 마시던 찻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와장창!

와인이 카펫에 스며들고,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만 돌아가겠어."

"그래."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들은 속으로 직감했다. 밤마다 즐기던 비밀 티타임은 오늘밤이 마 지 막이라고.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갔다.

탁.

창문이 닫히고, 그의 흔적을 따라 커튼이 사르륵 흔들렸다.

이사벨라는 자리에 앉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스르륵.

천장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 따라갈까?"

"아니. 됐어."

갈색 머리카락이 코끝까지 내려오 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정돈되 지 않아 엉망이었다.

"셀. 소리는 여전히 차단되고 있는 거겠지?"

"물론이지. 중요한 얘기가 새어 나 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역시 저 새…… 저 남자를 따라가서 어디 떠벌리진 않는지 봐야 하지 않을 까?"

셀은 마법사의 로브를 간신히 어 깨에 걸치는 수준으로 입고 있었다.

"아니야. 됐어."

"왜? 말하는 게 아주 싸가지가 바 가지야! 홍! 지가 골목길에서 동냥 하면서 일주일은 굶어봐야 저딴 소 리가 안 나오지."

"혁명군에 대한 얘긴 꺼내지도 않 았잖아. 그리고 어디 가서 떠들어봤 자 야밤에 귀족 부인과 밀회를 한 다며 추문만 돌 테지."

다니엘이 귀족 여인과 스캔들이 나는 걸 달가워할 타입은 아니었다.

"누님. 너무 슬퍼하지 마."

"누가 속상해한다고. 계획이 틀어 졌으니 골치 아플 뿐이야."

"흐음, 하긴. 명예 작위긴 해도 중 앙에서 쬐끔이나마 영향력 있는 놈 들 가운데 제일 포섭 가능성이 높 았는데. 아쉽게 됐지, 뭐."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셀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지구의 협력자와 저 둘이 내통하고 있었으 니 말이다.

'다니엘과 내가 서로 알고 있으면 그 지구인이 허튼 마음을 가졌을

때 훨씬 빨리 알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본인이 평민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올리 버는?"

"조만간 복귀할 것 같던데."

슬픔이나 아쉬움에 빠져 있을 시 간이 없었다. 세상을 바꾸는 데, 그 런 사소한 감정은 불필요하니까.

"곧 크로스타운도 작업에 들어갈 거야. 준비해 둬."

"넵! 알겠습니다〜."

휙, 이사벨라가 뒤돌자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혁명의 깃발처럼, 붉은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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