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대단하십니다, 저하! 제가 어리석 어 저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 했습니다!"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병사들이 하나둘, 입을 열어 5황자 의 업적을 칭송했다.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니, 난……
그가 도움을 요청하는 얼굴로 내 쪽을 바라봤다. 난 생긋 웃어 보였 다.
"우연인지 아닌지, 저하께서 던지 신 횃불에 적군이 모두 타 죽었으 니 모두 저하의 공이라 할 수 있습 니다."
5황자가 '너마저!'라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나는 최소한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비축해둔 식량까지 모두 타 버렸 으니... 지원군이 오길 기다리긴 힘들겠습니다."
"그, 그래!"
5황자가 소기의 목적을 떠올렸는 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이 부족하니 하루도 여기서 버틸 수가 없구나! 적을 섬멸했으 니 그걸로 만족하고 이 게이트는 포기해야겠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기껏 승리한 게이트에서 퇴각하자
고 하니 아쉬움이 남는지 병사들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5황자는 단 호했다.
"난 황실 요리사가 정성껏 차린 음식이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는 다!"
막무가내였지만 황자 신분이다 보 니 다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조아 렸다.
"마법사들! 불을 끄도록!"
뒤늦게 전투 마법사들을 불러 타 오르는 불길을 잡았다.
병사들 앞인지라 애써 멀쩡한 척 하지만, 5황자가 속으로 피눈물을흘리고 있을 게 뻔했다.
원치 않게 공을 세웠으니 또 전쟁 터로 끌려갈 게 뻔하다면서 말이다.
"퇴각 준비를 하라!"
"예!"
"알겠습니다!"
5황자는 퇴각 준비 명령을 내리고 서 뒤돌아섰다.
"세드릭. 리트. 따라오도록."
"예, 저하."
잔뜩 굳은 목소리로 우릴 부른다.
5황자는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닫았다.
탁.
"어, 어쩌지?"
휙 돌아보는 얼굴이 잔뜩 울상이 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저하. 진정하십쇼."
세드릭이 그를 자리에 앉혔다.
시녀에게 차를 내오라고 명한 다 음, 무릎을 꿇고 5황자와 눈을 맞 춘다.
"오늘 일은 우연의 일치였을 뿐입 니다. 이 다음 기회에 더 훌륭하게
일을 망치시면 됩니다."
다독이는 건지, 욕하는 건지 다소 헷갈리는 어조였다.
"그렇겠지? 왜 하필 그놈들은 거 기 숨어있어서……!"
"저하.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 을 이었다.
"아직 기회는 많습니다. 그리고 예 정보다 일찍 황궁으로 돌아가게 되 었으니, 그걸로도 충분한 수확이죠. 저하가 아둔한 지휘관이 되려 하시 는 근본적인 이유는 황궁에서 편히 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 그래. 맞아."
5황자가 떨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 봤다.
"네 말이 옳다."
"저하, 그럼 이만 저희도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내가 툭 작별을 고하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어딜?"
"그야, 저희는 혹마법사가 아닙니 까. 기본적으로 '그분'께 속한 이들 이라, 돌아갈 곳은 정해져 있습니 다."
아리송하게 말을 하자 5황자가 살 짝 울상을 지었다.
"같이 돌아가지 않는 게로구나."
"예, 저하.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 요."
나는 다음에 또 그를 만날 일을 대비해 복선을 깔아뒀다.
"저희의 '그분'께선 게이트를 좋아 하셔서 이렇게 종종 산책을 나가는 건 허락해주시니까요."
5황자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혹마법사란 존재가 마족에게 귀속되는 존재란걸 알고 있겠지.
"세드릭 경. 둘을 배웅해주게."
세드릭이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모두 사살된 것으로 추정 되긴 하나, 혹시 모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 말게."
5황자는 손을 휘휘 저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이마를 짚 기도 했다.
* * *
세드릭은 복도를 걷는 동안 말이 없었다.
내심 그가 이것저것 눈치챘을 거 라 생각했기에 그 침묵은 아주 예 상 밖이었다.
덕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젠 궁금하신 게 없나 봅니다."
내 말에 드디어 그가 멈춰 섰다.
"세드릭 경."
뒤돌아선 그는, 생각보다 아주 침
착한 낯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이해됐을 뿐이다."
역시나.
눈치가 없진 않을 테니, 퍼즐 조각 을 맞추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 을 거다.
"흑마법사, 그분……. 웃기지도 않 는군."
"그렇다기엔 5황자 저하는 철석같 이 믿으시던걸요."
"순진한 분이시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병사를 베 어내던 이를 수식하기엔 적절하지않은 것 같은데.
"네가 지구에서 온 줄도 모르고."
휘익,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날 렸다.
마치 연출이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5황자 저하껜 비밀로 해주세요."
" 뻔뻔하기까지."
그가 뭐라 비꼬든 상관없었다.
그가 당장 내 목을 노리고 달려오 지 않는 것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제 손을 잡기로 마음먹으신 것 아닌가요?"
세드릭은 입을 다물고 날 응시했 다.
"내가 거부하면, 날 죽일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한 소 리였다.
"선택권은 애초에 없었군."
"목숨을 바쳐서라도 5황자 저하를 지키는 방법도 있죠."
"내가 죽으면 더더욱 네 손에 혼 들릴 텐데. 누구 마음대로."
맞는 말이다. 옆자리가 빈 5황자를 손아귀에 놓고 굴리는 게 아주 어 려운 일은 아닐 테지.
세드릭만큼은 아니어도 꽤 신뢰를 사고 있으니까.
"왜 5황자 저하지?"
"접근하기 쉽고, 적당히 세상물정 모르니까요. 누가 과보호한 덕분에 요."
내 말에 세드릭이 헛웃음을 지었 다. 그의 보호가 독이 되어 돌아왔 으니, 허탈할 만도 했다.
"나쁜 거래는 아닐 겁니다. 5황자 저하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저도 최선을 다할 거거든요."
물론, 그가 황제가 되고 나서도 톨
룩에 황제 자리가 있을진 모르겠지 만.
"5황자 저하를 황제로 올리면. 네 가 얻는 이득이 대체 뭐길래 이러 는 거냐."
"그거야……
이걸 솔직하게 말하긴 그렇다.
5황자에게 충성하는 세드릭이 정 말 목숨 걸고 우릴 막으려 들 수도 있으니까.
"톨룩이 지구를 정복하면 저도 크 게 한자리 해먹게 잘 봐달라는 의 미라고 쳐두죠."
내 말이 꽤 그럴듯했는지 세드릭 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만 퇴각할 준비를 하시죠. 5황 자 저하 입단속도 해주시고요."
갑자기 흑마법사가 끼어들어 5황 자 옆에서 바람을 넣었단 얘기가 황제한테까지 들리면 곤란하다.
"……네가 5황자 저하를 황제로 만들어주겠다 했을 때."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거짓말이겠
지."
때아닌 양심 고백이었다. 나는 그 를 스쳐지나가면서 어깨를 툭툭 두 드렸다.
"다음에 또 보자고요."
그는 뒤돌아보지도, 내 말에 대꾸 하지도 않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죽으면 5황자 가 홀로 남겨질 것이 두려웠을까, 아니면 그저 5황자를 황제로 만들 고 싶었을까.
둘 중 어느 것이 그의 마음을 동 하게 만들었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 겠지.
* * *
우리는 상공에서 그들이 철수하는 걸 지켜보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밤하늘의 별 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냈네요."
정로운이 중얼거렸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대장을 못 믿거나 그런 건 아니 고요! 그냥, 우리 측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톨룩에 공을 세워주
는…… 그런 게 정말 가능한 일인 가 싶었거든요."
그거야 그렇지. 보통은 양립하기 어려운 전제들이니까.
"게이트가 닫히면 시신은 남지 않 지. 불에 탄 고깃덩어리는 그게 정 말 시신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도 어 렵 고."
신도아가 설명을 덧붙여줬다.
이 둘이 뒤에서 열심히 움직여준 덕분이다.
"〈춤추는 종이 인형〉을 불타는 사 람 그림자처럼 표현한 것도 절묘했 죠."
"쓸모없는 아이템을 수백 개씩 챙 기길래 무슨 쓸모인가 했는데 말이 지."
"두 분이 그걸 밤새 땅에 설치하 지 않았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계획 이었을 겁니다."
나는 공로를 둘에게 돌렸다.
나랑 류라임은 5황자 옆에서 호의 호식한 게 고작이었지만.
둘은 몬스터들을 도축해 사람 모 양으로 조각하고, 그걸 불로 태워 시신처럼 만드는 등 여러 잡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톨룩 음식도 꽤 맛있더라고요! 두 분도 다음에 한번 드셔보시면 좋을 텐데."
"라임 씨……. 여기서도 먹을 거 찾아다녔어요?"
"찾아다니다뇨. 눈앞에 있었는걸 요!"
정로운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렇게 작으면서 그 많은 양을 어떻게 다 먹는지 모르겠군."
신도아도 고개를 휘휘 저었다.
평범한 대화 같았지만, 류라임의 고유 스킬을 생각하면 다소 오싹하기도 했다.
"이만 돌아가죠. 우리도."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사벨라는 야밤에 찻물을 달였다.
백작부인인 그녀가 직접 차를 우 리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시녀를 부를 수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 다.
탁.
익숙한 소음과 함께 창문이 벌컥 열렸다.
하늘하늘한 커튼이 바람결에 펄럭 이고, 그 틈새로 붉은빛이 엿보였 다.
"다니엘 경."
"오랜만입니다. 멜몬드 백작부인."
둘이 딱딱한 어조로 예를 차려 인 사했다.
다니엘이 이사벨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자, 이사벨라가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아, 정말. 낯간지러워서
못 해먹겠네."
"누가 할 소릴."
다니엘이 웃으며 반박했다.
"차가 식겠어."
"언제나 고맙군."
"별말씀을."
이사벨라가 익숙하게 차를 권했다. 다니엘의 취향을 반영한 홍차였다.
"아, 최근에 떠들썩한 소문이 있던 데. 퀘트럴 후작가의 넷째 영식과."
"말도 마."
다니엘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입에 담자, 이사벨라는 질색하는 표 정을 지었다.
"에스코트를 하고 싶다길래 한번 허락해줬더니 신나서 여기저기 떠 들고 다닌 것뿐이야. 난 그 영식과 맹세코, 그날 퀸즈크로스 무도회 이 후로 본 적도 없다고!"
사교계의 꽃, 가시 달린 장미. 그 명칭의 주인과 함께하는 이는 항상 소문의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이젠 이런 스캔들도 지겨울 지경 이야."
"과연.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흔드는 팜므파탈다우시군. "
"비꼬지 말고."
다니엘은 가증스럽게 찻잔을 들어 우아하게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참 신기하지."
이사벨라가 그런 그를 바라보면 입을 열었다.
"내 입으로 말하니 우습지만, 날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당신이 처음 이야."
푸우읍!
다니엘이 차를 뿜었다.
이사벨라가 잽싸게 피해 차를 뒤 집어쓰진 않았지만, 옷자락에 살짝튀었다.
"아. 미안."
"됐어. 이 정도야, 뭐."
"잠깐 이상한 소릴 들은 것 같아 서."
"난 진심인데."
다니엘은 애써 모르는 척했다. 황 급히 화제를 돌릴 만한 게 필요했 다.
"그래서. 오늘 난 왜 부른 건데?"
이사벨라는 눈을 내리깔고 다른 곳을 보는 체하면서 다니엘을 쓱 훑었다.
"당신한테 얘기할 게 있거든."
이사벨라는 오늘, 멜몬드가 아니라 비욘드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니엘을 포섭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