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챕터: 누군가의 파편
뭐?
갑자기 왜?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다니엘이 갑자기 이사벨라의 이름 을 입에 담는 건 아주 부자연스러 운 일이다.
'둘이 서로의 존재를 눈치챘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 다 니엘이 갑자기 이사벨라에게 호감 을 느껴 정보를 묻는 건 아닐 테 니.
그런 정보라면 나보단 중매쟁이를 찾아가는 게 더 빠르다.
"그게 무슨 말이죠?"
"모르는 체하지 말고. 이사벨라 그 여자가, 네 또 다른 정보원이잖나."
시치미 떼는 건 시간 낭비겠군.
"그래서요? 제가 정말로 이사벨라 의 정보를 팔길 원하는 건 아니겠
죠. 그게 당신에게도 마냥 이득은 아니란 걸 알 텐데요."
내가 다니엘에게 이사벨라의 정보 를 판다는 건, 역으로 생각하면 이 사벨라에게 다니엘의 정보를 팔 수 도 있다는 뜻이다.
다니엘도 그런 사태를 원하진 않 을 텐데.
"……알고 있어. 하지만 아무리 생 각해도……. 아냐. 그럴 리 없지."
달깍.
다니엘은 펜던트를 닫았다. 쓸데없 는 짓을 했다는 표정이었다.
"두 분이 저 몰래 뒤에서 만날 줄 은 몰랐는데요."
"언제까지고 너한테 휘둘릴 순 없 는 노릇이니까."
휘둘려준 적도 없으면서.
'다니엘과 이사벨라. 좋은 조합은 아닌데.'
이사벨라가 혁명에 대한 얘긴 꺼 내지 않은 모양이지만, 이 둘 사이 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었 다.
'어린 시절 몰락한 귀족으로 평민 에게 좋은 기억이 없는 다니엘과,평민 출신 이사벨라라……
아무리 생각해도 파국뿐이다. 그래 서 되도록 둘이 만나지 않길 바랐 던 건데.
"5황자에 대한 정보 값은, 후불로 내는 건 어떤가요?"
" 후불?"
"네. 당신이 제 손을 잡은 이유도 어차피…… '황제'의 몰락을 위해서 가 아닙니까."
내가 그 지위를 입에 담자 다니엘 이 좀 더 진지한 얼굴을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보겠다
는 제스처였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5황자를 황태자 후보로 만들 생각이라고요."
"들었지. 내가 그때도 허황된 생각 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랬죠."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당신도 협력해줬으면 하는데요."
"이사벨라, 그 여자도 네 허무맹랑 한 계획에 참여하겠다고 하던가?"
" 네."
"미쳤군."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죠."
황제를 끌어내리려면 이 정도 강 수는 둬야지.
"어렵지 않은 일이죠. 안팎으로 돕 는다면요."
내 말에 다니엘은 잠시 입을 다물 었다.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내가 지구에서 왔다는 걸.
"안팎으로……
그 말을 중얼거린다. 아주 승산이 없는 게임은 아니란 걸 자각한 모 양이다.
"5황자가 황제가 되면, 나한테 무
슨 이득이 있지?"
"당신은 '황제'라는 자리엔 크게 관심이 없죠. 현 황제에게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내 말에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 다.
"황태자 즉위식 때, 황제가 갖고 있던 신의 가호가 황태자에게 넘어 가면 황제는 무방비 상태가 되죠."
다니엘의 눈빛이 희번덕거리며 빛 났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 이다.
"그럼 그때가 기회겠어."
"황제도 바보가 아니거든요. 가호 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더욱 철 통같이 호위를 세우겠죠."
"내가 그 호위야."
다니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 옆에 서있을 거라고."
흥분한 것도 이해가 가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쉽진 않은 법이다.
"경비가 삼엄해지기 전 황제를 죽 이는 게 제일 손쉬운 방법이죠. 그 러려면, 황태자 즉위식이 열리는 자 리에 당신이 있어야 하고요."
즉위식이 끝난 다음엔 황제를 죽
이기가 훨씬 복잡해질 테니까 말이 다.
"난 이미 황제 폐하의 기사다. 즉 위식 때 내가 못 들어갈 리 없지."
"황제의 기사는 많지 않습니까. 게 다가 지금 당신은 평민 신분으로, 호위기사들 가운데 출신 성분이 가 장 불명확하죠. 그런 당신이 황태자 즉위식에 참석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까?"
내 말에 다니엘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이것저것 사릴 게 많은 귀 족 출신들은, 짊어진 것이 많아 함 부로 움직이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은 개중 가 장 경계해야 할 위험 분자라고 할 수 있다.
"5황자의 편에 서서 그의 최측근 이 되세요."
나는 작게 속삭였다. 진리를 알려 주는 것처럼.
"아직 세력이 약한 5황자이니, 그 를 돕는다면 큰 신뢰를 살 수 있을 겁니다."
5황자의 바로 옆을 꿰차고 있던 세드릭 말고는 5황자를 섬기는 기 사가 없었다.
게다가 다니엘은 명망이 높은 기 사이니 그가 은근슬쩍 지지하는 행 보를 보이면 혹하는 이들도 꽤 있 겠지.
"3황자나 1황녀의 세력은 이미 견 고하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보단 가능성이 있겠군……
다니엘도 이것저것 저울질을 해본 결과, 내가 한 제안이 최선의 선택 지란 걸 알아챈 것 같았다.
"좋아. 나도 협력하지."
긍정적인 대답에 나도 고개를 끄 덕였다.
좋아,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 협상도 끝났으니 이만 가볼 게요."
나는 지구로 돌아가기 전에 한마 디 툭 남겼다.
"아, 이사벨라에 대해선…… 괜히 캐내려 하지 말아요. 당신도 로스 가문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누구나 사연이 하나씩 있는 법이니까."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다니엘은 대꾸가 없었다.
* * *
달빛이 창문에 어슴푸레하게 내려 앉았다.
다니엘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 지 못하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펜던트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데도, 어딘가 불안한 느낌 이 들었다.
달깍.
펜던트를 열자 낡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로스 가문이 파멸의 길을 걸은 그
날, 저택은 온통 불에 탔다. 그 탓 에 사진도 반쯤 타들어 가 있었다.
사진은 두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 었다. 한 명은 어린 시절 다니엘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다.
나머지 한 명은…….
"……로젤리타."
꾸욱,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 다.
로스 가문이 몰락하던 날, 다니엘 은 명예, 작위, 재산뿐만 아니라 하 나뿐인 누나도 잃어버렸다.
"하하……. 사진이 타버려서,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네."
하필이면 얼굴 부분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사진 아래 조그맣게 쓰여진 이름 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누군지 못알 아봤을지도 모른다.
너무 어린 시절에 헤어진 탓일까, 끔찍한 기억을 지워버린 탓일까.
다니엘은 이제 제 누님의 얼굴조 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달깍.
펜던트를 다시 닫고서, 경건한 마 음으로 목에 걸었다.
무너지는 저택 속에서 찢어지는 비명을 들은 것이, 그녀에 대한 마 지막 기억이었다.
'아마도 그날, 그 안에서 죽었겠 지.'
훗날 수소문했지만, 몰락한 로스 가문의 생존자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대로 불꽃과 함께 스러졌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그 여자 때문 일 거다.
"이사벨라 멜몬드."
그녀의 장미 꽃잎처럼 붉은 머리 카락이 그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 들었다.
'웃기는 일이지. 붉은 머리가 한둘 도 아닌데.'
그저, 그렇게 선명한 붉은색은 드 물어서 신경이 쓰이는 것뿐이다.
어두운 색이 섞인 자신과 달리 선 명한 붉은 머리카락만큼은 기억이 선명했다. 얼굴은 몰라도, 그 머리 카락만큼은.
'만약 그 여자가 정말로 로젤리타
누님이 라면……
아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이사벨라 멜몬드의 결혼 전 성이 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 됐 건 그 여자는 백작부인이다.
'나처럼 평민 행세도 아니고, 귀족 행세라니.'
이사벨라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고 듣긴 했지만, 입양아라는 이야기 는 들은 적이 없었다.
만약 입양된 딸이라 하더라도, 보 통은 친척의 아이를 입양하지 아무 것도 모르는 평민을 입양하진 않는다.
이사벨라가 이 황궁에서 귀족 행 세를 하는 것 자체가 그녀가 로젤 리타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였 다.
'누님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헛 된 망상까지 하는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야지. 이사 벨라, 그 여자는 깨끗이 잊어버리 고, 오로지 복수만 생각하는 거야.'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와인 잔을 기울였다.
이리저리 요동치는 그의 마음처럼, 와인이 잔 안에서 빙그르르 헛돌았 다.
* * *
전쟁 게이트는 시시각각 발발했고, 우리는 언제나 전쟁을 준비해야 했 다.
해외 파견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내 독립부대도 예외는 아니 었다.
한밤중에 짐을 챙기자 그 소리에
깼는지 표연원이 거실로 나왔다.
"깼어?"
"네. 요즘 계속 게이트를 쏘다녔더 니, 감각이 좀 예민해져서요."
내 탓이 아니니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혜원 언니는 아마 내일쯤 돌아올 텐데."
"네. 들었어요. 저도 아마 내일 저 녁엔 다른 게이트에 들어갈 거 같 아요."
"무슨 게이튼데?"
"크진 않고 작은 규모라서 저 혼
자 다녀올 것 같아요. 배경이 숲속 이거든요."
숲속이라면 누구도 표연원을 쉽게 이길 수 없겠지.
그는 차츰 경험을 쌓으면서 초짜 티를 벗어가고 있었다.
"그럼 금방 돌아오겠네."
"아, 아뇨. 조금 더 걸릴 거예요."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멋 쩍은 듯이 웃었다.
"훈련을 좀 할 게 있어서요. 아무 래도 제 능력이 광범위해서, 게이트 밖에선 연습하기가 어렵더라고요."
"방심하지 말 것, 너무 오래 끌지 말 것. 두 가지만 지켜."
표연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기술이라도 연구하는 거 야?"
"……화염에 저항하는 법을 배우 고 있어요."
화염. 그 단어에 나도 잠시 멈칫했 다.
고개를 돌려 표연원을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생긋 웃고 있었다.
"왜 그래요? 누나가 말했잖아요.
헌터로서 책임을 지라고."
"……그러긴 했지."
표연원이 뜬금없이 화염 저항력을 키우는 건, 아마도 이그니스 때문일 거다.
표연원의 약점인 불꽃. 그 불꽃에 특화된 마왕, 이그니스.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 같았다.
"잘 되겠어?"
"아직은 어려워요. 식물이 불에 타 는 건 당연한데, 방법이 있을까 싶 기도 하고요."
그야 그렇겠지.
목화토금수 오행에서도 나무는 불 꽃에 못 이기지 않던가.
"드라이어드한테 물어봤더니 뜻 모를 얘기만 하고 말이죠."
"뭐라 했는데?"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중얼거렸 다.
"제가 다루는 게 식물이긴 하지만, 식물은 아니다……라고 하던걸요."
그것 참 알 수 없는 말이네. 뭔가 조언을 해주고 싶었는데, 나도 영 감이 안 잡혀서 어깨를 으쓱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결국 네가 계약
한 것도 숲의 '정령'이지 숲 자체는 아니잖아?"
"그렇죠."
"그러니 네가 소환하는 그 필드도 진짜 숲이라기보단, 숲의 정령이 내 린 권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요……
표연원이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같이 고민해줘서 고마워요. 조심 히 다녀오고요."
"응. 그럴게."
나는 노이트를 총집에 집어넣는 걸 끝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자, 드디어 모든 것이 시작될 차례 였다.
'5황자. 당신을 전쟁영웅으로 만드 는 계획의 시작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