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와아! 오빠다!"
"잘 지냈지, 엘리사."
나는 인형들 사이에서 둘의 대화 를 훔쳐 들으면서,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둘이 남매라고?'
아니, 엘리사가 엘프처럼 보이긴
했는데...
세상에 엘프가 에녹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설마 정말 남매일까?
엘리사는 달려가서 에녹에게 와락 안기려다가 발목에 걸린 족쇄 때문 에 멈춰 섰다.
그 반동으로 넘어지려는 것을 에 녹이 받아낸다.
"조심해야지."
"응! 그럴게!"
엘리사가 씨익 웃었다. 해맑은 미 소였다.
"그동안 잘 지냈지? 자주 못 찾아
와서 미안해. 최근에 일이 너무 많 았거든."
에녹이 퍽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던 그의 모습과 거 리가 있었다.
"아냐! 오늘은 기쁜 날이야. 오빠 도 오고 요...
안 돼! 나는 깜짝 놀라 엘리사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요정님'이라고 말하 려고 했던 건지, 엘리사도 퍼뜩 입 을 다물었다.
" 요'?"
"요…… 요리도 맛있었고~!"
"비앙카가 잘 챙겨주는 모양이네."
" O 으
-» O .
겨우 얼버무렸다.
엘리사는 내게 그랬던 것처럼, 에 녹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 놨다.
상상 친구 로지와 수다를 떤 것, 오늘 샌드위치가 아주 맛있었다는 것 그리고 비앙카와 싸운 얘기까지 말이다.
"왜? 널 챙겨주는 사람은 비앙카 뿐인데. 친하게 지내야지."
"그치만 비앙카가……
엘리사는 툭 내뱉으려다가 뒷말을 삼켜 냈다.
비앙카가 '네 오빠는 널 여기 버리 고 갔다'는 폭언을 해서 싸웠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 얘길 들으면 아마 에녹 도 마음 아파하겠지.'
그 무감각한 사내가 슬픔에 빠지 는 장면이라. 보기 드문 광경이긴 할 거다.
"비앙카가 나쁜 말을 했어. 난 잘 못 없어."
"그래, 그래. 많이 속상했겠네."
에녹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맞장구 를 쳤다. 동생이 귀여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조였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비앙카한테 막,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으 »엘리사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에녹은 간간이 긍정의 표시로 고개 를 끄덕이곤 했다.
"오빠는 요즘 어때? 또 상사가 막 괴롭혀?"
"……아니. 괜찮。}."
에녹의 상사라면 황제일 텐데. 엘 리사는 그것까진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긴! 나 보러 오기 힘들 정도 로 맨날 일 시키잖아. 너무해."
"음……. 그렇지. 최근에 일이 또 생겨서, 더 바빠질 거 같아."
"무슨 일?"
"……그냥, 처리할 서류가 많아 서."
거짓말이다.
기사인 에녹이 서류 정리를 할 일 이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는가.
그가 기사단장이었다면 모를까, 황
제의 개인 호위기사면서.
"그래, 뭐. 오빠처럼 능력 있는 문 관은 많지 않다고 했으니까! 능력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
문관? 아예 종목까지 속였다.
그 창지기 에녹이 문관이라니!
양심도 없지. 에녹도 난처한 얼굴 로 작게 긍정을 표했다.
"으응……. 맞아."
둘이 대화하는 꼴을 보자니 대충 상황을 알겠다.
'에녹이 그때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었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 까.
-가끔은. 모든 걸 버려야 할 필요 가 있는 법이지.
구름 아래 숲 스테이지형 게이트 에서, 프레드가 우리에게 왜 엘프숲 을 빠져나왔냐고 물었을 때 에녹은 이렇게 답했었다.
더 소중한 게 있다고.
그게 무엇인지, 이제 명백히 알겠 다.
'동생 엘리사. 그게 당신을 황제 밑에 굴복하게 만드는 거군.'
정확한 이유가 뭔지는 모른다.
황제가 엘리사를 인질로 잡은 건 지, 외부의 뭔가로부터 엘리사를 보 호하고 있는 건지.
'에녹 정도 힘이면 엘리사 하나 황 궁 밖으로 도망치게 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하긴. 도망만 치면 뭐 하겠는가.
이 대륙이 전부 황제의 땅인데. 어 디로 달아나봤자 평생 도망자 신세 에 불과할 거다.
"그런데, 인형이 하나 더 늘었나?"
그때 등골이 오싹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녹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 응? 무슨 소리야?"
"내가 가져다준 것 말고 다른 인 형이 섞여 있는 것 같아서."
인형 틈바구니에 숨어 있는 걸 눈 치챈 모양이다.
경지에 이른 기사라 기감이 지나 치게 예민하다.
'투사체다 보니 사람이라고 생각하 진 않는 것 같은데. 이거 들키면
위험하겠어!'
아무리 작아졌다곤 하나 외형은 원래 내 모습 그대로기 때문이다.
에녹이 날 못 알아볼 리도 없는 데!
"아, 아아, 그거! 비앙카가 선물로 준 거야!"
" 비앙카가?"
"응! 내가 갖고 싶다고 졸랐거든. 몰래 가져다준 거야. 그러니까 비 밀!"
엘리사가 애써 둘러댄다. 에녹은 잠시 침묵했다.
두근, 두근.
긴장감에 근육이 잔뜩 수축했다.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만약 들키 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지도 몰 랐다.
'이대로 튀어? 인형인 줄 알았던 게 갑자기 사라지면 이상하게 생각 하겠지만, 지금 도망가면 내 얼굴은 안 들킬 텐데.'
여러 가지 대안들을 고민하는 동 안, 에녹이 한발 물러섰다.
"알겠어. 비밀로 해줄게."
"응, 웅!"
휴, 천만다행이었다.
아주 심장이 쫄깃하다. 아직도 심 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나는 한층 더 숨죽인 채 둘의 대 화를 지켜봤다.
"이제 슬슬 가봐야 할 거 같아."
" 벌써?"
얼마 지나지 않아 에녹이 자리에 서 일어났다.
엘리사가 칭얼거렸지만, 에녹도 어 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다음에 다시 올게."
" 언제?"
" 그건......
"다음엔 언제 오는데? 나 맨날 이 렇게 기약 없이 오빠만 기다리는 거 너무 힘들어. 내가 말라비틀어지 는 것만 같아. 대체 언제 올 건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없어?"
엘리사가 원피스 자락을 꽉 쥐었 다.
"……미안해. 내가 더 공을 세우 면……
"언제 올지 모른단 소리네."
엘리사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됐어. 얼른 가버려."
비앙카에게 그랬던 것처럼, 엘리사 는 무릎을 모으고 그 사이에 고개 를 묻었다.
강한 거부가 담긴 몸짓에, 에녹도 어찌 달래줄 도리가 없는 것 같았 다.
"최대한 금방 다시 올게. 정말로."
에녹이 엘리사의 머리를 살살 쓰 다듬었다. 엘리사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잘 지내. 엘리사."
끼이익, 탁.
문이 다시 닫혔다.
엘리사는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 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 엘리사."
내가 밖으로 나오며 그녀를 부르 자,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요정님. 아직 안 가셨네요!"
애써 웃는 얼굴을 그려낸다.
"괜찮아요. 오늘은 요정님이 있으 니까, 혼자가 아니잖아요."
나는 엘리사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결국 나도 떠나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방금 봤죠? 아까 그분이 제 오빠 예요. 가짜가 아니라고요. 비앙카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 오빠 는 진짠데."
"응, 봤어."
엘리사는 그렇게 띄엄띄엄 이야기 를 이어갔다.
그녀가 얼마나 제 오빠를 아끼는 지, 그 오빠가 얼마나 가끔 찾아오 는지. 그리고 오빠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녀가 얼마나 괴로운지. 제 아픈 속내를 모두 털어놓았다.
시간이 꽤 흘러 엘리사의 목소리 가 갈라지고 혹사당한 성대가 자꾸 만 쇳소리를 냈다.
"끝도 없이 상대를 기다리는 기분 을, 요정님은 아세요? 그때는 벽돌 개수를 세고 먼지를 쫓아봐도 시간 이 정말 느리게 흘러요. 저는 아주 작게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확 커지 는 것처럼 아프고요. 그리고 또
"엘리사. 그만하는 게 좋을 거 같 은데."
"네? 왜요?"
"목이 아프잖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더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어 번 소리 가 샜다.
"목소리가 엉망인걸."
"아니라니까요. 제 목소리는 원래 이래요."
"엘리사."
내가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엘리사는 그제야 멈칫했다.
"그만해."
"하지만……
엘리사가 잔뜩 쉰 목소리로 대꾸 했다.
"제가 얘길 멈추면 요정님은 가버 릴 거잖아요."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제가 계속해서 얘길 꺼내면, '오 늘'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요. 그 렇죠?"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나는 도 통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애를 써도, '오늘' 이 영원히 이어질 순 없을 텐데.
"그러니까 계속할래요. 요정님, 제
가 노래를 불러드릴게요."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졌는지 급기 야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이미 목소리가 상한 탓에, 노랫소 리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핏물이 배어 나오는 것 같 은 그 노래가 너무도 처절해서, 나 는 차마 노래를 멈추라고 말을 꺼 낼 수가 없었다.
" 하하......
노래가 두어 곡 끝난 다음엔 정말 로 한계가 찾아왔다.
엘리사는 눈물조차 나지 않는 얼
굴로, 날 보며 쓰게 웃었다.
"오늘이…… 끝났네, 요."
더 이상은 못 하겠다는 포기 선언 이었다.
"이제…… 가셔도 좋아요……. 펜, 던트도 드릴게요."
엘리사가 목에서 펜던트를 빼내 내게 건넸다.
내 몸통만큼 큰 펜던트를 들고서,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괜, 찮……아요."
"……내가,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 다고 하면. 네게 너무 잔인한 말일
까."
엘리사가 설핏 웃었다.
"네. 차, 라리…… 영원히…… 오 지, 않, 겠다고…… 해요."
엘리사가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너울거리면서 음 영을 드리운다.
"누군, 갈…… 기약 없이…… 기다 리는 건, 한…… 명이면…… 족하 니, 까요."
언제 올지 모르는 에녹을 기다리 면서 애가 타는 소녀에게, 나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건 너무 잔혹한짓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영원히 안녕이야."
"즐거, 웠어요. 요……정님."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았다 뜨자, 나는 다니엘의 침실에 서 있었다.
목에 드리운 칼날이 이제는 익숙 하기까지 했다.
" 펜던트!"
다니엘이 빠르게 내게서 펜던트를 낚아챘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다……
겉에 새겨져있는 로스 가문의 문 장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더니, 달 깍 펜던트를 열었다.
"아......
안타까움이 가득 밴 탄식이었다.
"찾던 물건 맞죠?"
내 물음에 대답도 않는다. 무슨 생 각에 푹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다니엘을 재촉해 대답 을 받아낼 생각도 들질 않았다. 엘 리사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아른거 린 탓이었다.
그 애를 주기적으로 찾아갈 수 없 는 이상, 내가 값싼 동정으로 그 애를 찾아가는 건 오히려 독이 될 테지.
누군갈 기다리는 데 이제 지쳤다 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찾던 게 맞아……. 확실해."
"거래는 끝난 거겠죠."
"물론이지."
불편한 속내와 별개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앞으로 5황자가 어디로 파견될지, 관련된 정보를 얻거든 알려줬으면 해요."
"군사 회의에 참석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지. 하지만 정보가 새어 나 간다는 게 너무 티 나면 안 되는 거, 명심하고."
"당연하죠."
나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은 없다.
정보가 새어 나간다는 의심이 들
기 시작하면 내가 세운 계획도 말 짱 도루묵인걸.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겠 지'?"
"원하는 게 있나요?"
다니엘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 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툭 내뱉는 것이다.
"이사벨라 멜몬드. 그 여자의 정보 를 구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