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다니엘이 성공한 모양이지.'
외국으로 돌던 5황자가 한국으로 복귀한 것만으로도 소기 목적은 달 성한 셈이었다.
'이제 남은 건, 5황자를 강력한 황 위 계승 후보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공을 몰아주느냐지.'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 이운우와 윤강백의 동의가 필요하고 말이다.
'이 부분은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 둘에게 충분한 설명과 설득이 필요한 차례다.
"근데 왜 전부터 이 사람을 찾는 거야?"
이운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 나도 네게 할 말이 많았다.
"네 도움이 필요해."
내 뜬금없는 말에 이운우가 또 무 슨 일을 벌이려고 그러냐는 듯 바라봤다.
아니야. 이번엔 진짜 중요한 일이 라니까.
윤강백과 이운우 둘 다 둘째가라 면 서러울 정도로 바쁜 인물들이었 지만,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30분 뒤에 회의가 있어서 오래 시간을 내긴 어려운데."
윤강백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어차피 그 뒤의 얘긴 더 듣고 싶 어질 테니까.
"우선, 한 가지 확실히 해 두죠. 저는 톨룩이 아니라 인류의 편이라 는 걸요."
"시작부터 무섭네."
이운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할 이야기를 들 으면 내가 왜 그런 선언을 했는지 알 거다.
"톨룩에 내 쪽 사람이 있어."
"네 쪽 사람……이라고 하면?"
"톨룩에 스파이를 심어뒀단 거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윤강백이 휴 대폰을 꺼내 들었다.
"미안한데 급한 일이 생겨서. 회의 는 다음 주로 미룰 수 있겠나? 부 탁하네."
짧은 통화 이후, 내게 더 말해보라 며 재촉했다.
"그쪽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따르 면, 우리 쪽에서 일명 '더미'라고 불리는 사령관은 5황자 시온입니 다."
"5황자……?"
상당히 구시대적인 명칭에 이운우 가 되물었다.
"그래. 5황자. 톨룩은 황제를 중심 으로 돌아가는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거든."
"그거 놀라운 일이군."
윤강백이 싸늘하게 덧붙였다.
"자네가 톨룩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다니 말이야."
"테오도르에게 들은 것들이 많아 서요."
일단 대외적으로 나는 테오도르의 주인이니까 먹히는 변명이었다.
윤강백은 호쾌한 미소 뒤로 싸늘 한 눈빛을 감췄다. 나는 애써 모르 는 척하면서 뒷말을 이었다.
"이게 중요한 점입니다. 적군의 우 두머리는 '황제'고 그 직위는.... 계승된다는 거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윤강백이 미 소를 입가에 띠었다.
먹잇감을 배불리 먹은 포식자와 같은 얼굴이었다. 배부른 사자처럼.
"5황자 시온을 황제로 만들자?"
"그런 셈이죠."
"왜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내가 겪은 바로, 회귀 전에 황태자가 됐던 3황자가 아주 귀찮 은 녀석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차치해두고 말하자면…….
"5황자는 우리에게 이로운 군주거 든요."
역시 이게 핵심적이지.
"5황자는 열정적이지도 않고 전쟁 에 흥미도 없습니다. 그저 황족이니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쟁터에 끌려 온 것뿐이죠. 오히려 어떻게 무능을
입증해서 황궁으로 돌아갈까 궁리 하고 있을 거예요."
내가 바로 옆에서 봤으니 잘 안다.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성정이 좀 달라졌나, 싶었지만. 더미에 대한 평판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 었다.
"무능력한 이를 황제로 만들어 톨 룩의 힘을 약화시킨다……. 나쁜 계 획은 아니지만 너무 막연하군."
윤강백이 혹평을 했다.
"너무 비효율적인 방법 같은데."
물론 그렇겠지. 윤강백의 말도 일
리가 있다. 이 부분을 빼면 말이다.
"톨룩의 황제는 '불사'의 존재입니 다. 적어도 황제 직위를 가지고 있 는 동안에는요."
"뭐……'?"
적장이 죽지 않는다는 건 꽤나 뼈 아픈 일이다.
적군의 혼란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수뇌 부를 제거하는 것이니까.
"신의 가호가 있거든요. 정확히 말 하자면 땅의 가호지만요."
"대체 그게 뭐길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게요. 어찌 됐든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호 가 있고, 그게 황가의 권력을 공고 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거 죠."
땅의 가호니 뭐니 하는 얘길 줄줄 늘어놔봤자 큰 의미는 없을 테니 생략했다.
중요한 건 황제가 불사의 존재란 거다.
"이 가호는 황태자 즉위식 때 황 태자에게 전수되고, 그 즉위식까지 앞으로 1년이 남았어요."
내 친절한 설명에 윤강백과 이운
우도 이해한 듯 고갤 끄덕였다.
"무능력한 5황자가 그 가호를 잇 게 하자, 그 말이지?"
"맞아. 아니면 톨룩을 상대하는 데 꽤 애를 먹게 될 거야. 황제가 있 는 한 톨룩군은 멈추지 않을 테니 까."
이미 회귀 전에 내가 겪어봐서 하 는 얘기다.
"좋아. 그러니까, 왜 '황제'의 자리 에 무능한 사람을 올려놔야 하는지 는 이해했어.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 이 남아."
윤강백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5황자가 그렇게 무능력한데 어떻 게 황제로 만들겠단 거지? 톨룩인 들도 눈이 있을 텐데. 현실성이 있 는 얘긴가?"
"전시 상황에선 가능하죠. 판을 뒤 엎을 카드가 있으니까."
둘 다, 내가 무슨 말을 내뱉을지 이해하는 얼굴이었다.
"전쟁 영웅."
그래. 전쟁 중에 권력을 잡으려면, 결국 영웅이 되는 게 최고다.
"그래서 우릴 찾아온 거군."
"5황자를 전쟁영웅으로 만들게끔,
자작극을 꾸며달라?"
이운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지구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정도 까진 아니어도, 대충 그럴듯한 성과 를 낸 것처럼 보이면 돼요. 대신 나머지 게이트를 철저하게 몰아붙 이면 상대적으로 잘난 것처럼 보이 겠죠."
게다가 나는 이미 자작극으로 내 목적을 달성한 적이 있지 않은가.
'테오도르 때도 대성공했단 말이 야.'
이번이라고 못 할 게 뭐가 있는가.
스케일이 더 커진 것뿐이다.
"한서하 헌터.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만…… 역시 지지하 긴 어렵군."
윤강백이 난색을 표했다.
"그 5황자를 전쟁영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나?"
"5황자가 출전한 게이트는 저희 부대가 전담으로 마크하겠습니다."
"결국 전쟁터에서 '공'은 적을 얼 마나 죽였느냐, 얼마나 큰 손실을
입혔느냐와 직결될 텐데?"
소수 부대인 우리만 상대해서는 5 황자가 전쟁영웅으로 올라서기 힘 들다는 걸 지적하는 말이었다.
"다른 게이트가 죄다 참패해서 돌 아오면, 그나마 괜찮은 성과를 거둔 게 눈에 띄겠죠."
"그걸 전쟁영웅이라 할 수 있나?"
"결정적인 한 방은 따로 준비하면 됩니다. 우선은 황제가 5황자를 쓸 모 있는 녀석이라 생각하고 계속 기용하게 두는 것부터 시작할 거고 요."
무모하다 말릴 테니 지금 말을 꺼
내진 못하지만, 여차하면 전처럼 톨 룩 내부에 잠입하는 방법도 있다.
'날 리트로 알고 있을 테니 그때 난리 통에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하 면 되겠지.'
5황자의 기사였던 그 남자는 날 의심하겠지만, 5황자가 날 반긴다 면 그도 별수 없을 거다.
"제가 바라는 건 단 하나입니다. 5 황자의 상대는, 저희 부대에게 맡겨 주세요."
나는 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당부했다.
"그리고 나머지 게이트는 무슨 수
를 써서라도 완벽하게 승리해야 합 니다."
내 말에 이운우가 씨익 웃었다.
"그건 당연한 얘기고."
"그 정도뿐이라면 크게 문제될 건 없겠지."
윤강백도 내가 요구한 게 과하지 않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말한 게 정말 사실이라면,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셈 치겠어. 하지만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발을 빼야 할 거야."
그는 여전히 내 계획이 현실성 없
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야 그렇겠지. 아직 혁명에 대해 선 얘길 꺼내지 않았으니까.'
내 계획이 들어맞는다면, 5황자가 황제가 되는 일도 없을 거다.
'그때가 되면 황제라는 지위가 남 아있을지도 의문이거든.'
혁명에 대한 얘길 꺼내기는 아직 이른 것 같아 말을 아꼈다.
톨룩에 사람을 심어뒀단 얘기도 충분히 파격적인데, 그 내부 사정에 개입하고 있단 것까지 알려지면 정 말 내가 스파이로 의심받을지도 모 른다.
"대체 언제부터 톨룩에 사람을 심 어둔 거야?"
"테오도르가 지구로 귀화한 직후 부터."
나는 회귀 전에 미리 알고 있던 이들을 찾아갔을 뿐이었지만, 고스 란히 말할 순 없었다.
약간의 각색을 더하자 그럴듯하게 들렸다.
"테오도르가 귀화하기 전부터 알 고 있었던 이들이야. 톨룩에 대한 반발이 심한 자들."
"아, 맞아. 그자는 네게 종속되어
있었지.''
일단 공식적으론 그랬다. 테오도르 도 그 종속의 목걸인가 뭔가 하는 걸 여전히 목에 차고 다니고.
내가 그의 주인……이라는 설정이 니까.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걸 애써 떨쳐냈다. 멀쩡한 사 람을 내게 종속된 걸로 만든 게 좀 찔렸다.
"5황자가 어디에 파견될지 미리 정보를 구하면 바로 알릴게요."
"그렇게 해주면 우리도 최대한 자 네 부대가 맡을 수 있게 편의를 봐
주도록 하지."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끝났다.
윤강백이 내게 뭔갈 요구하면 순 순히 응해줄 생각도 있었는데.
"자네에겐 빚진 것도 있으니까."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본 꿈에 대한 얘긴가.'
윤강백이 하도 돌아오지 않길래 마중을 간 적이 있었지.
그가 내게 빚을 졌다고 할 만한 건 그 일뿐이었다.
"넌 나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어, 한서하."
이운우는 불퉁한 표정이었다.
"나한테 독단적이라고 타박했으면 서. 너야말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 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아. 그래, 분명 이운우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일단 네 선택의 당위성은 이해했 어. 그러니까 여기서 더 뭐라 하진 않겠지만, 넌 그 독단적인 방식을 좀 바꿀 필요가 있어.
그가 노이트에 대한 정보를 동의
없이 떠벌렸을 때 했던 말이다.
고스란히 돌려받게 되다니, 좀 멋 쩍어 졌다.
"헌터들이 원래 좀 그런 경향이 있지. 나나 서호도 그래서 혜원이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윤강백이 뒷말을 흐렸다. 저도 모 르게 내뱉은 말인지 아차 하는 기 색이 역력했다.
"역천의 길드장에게 안부 전해주 게."
그가 슬그머니 공식 명칭으로 바 꿔 부르며 말을 끝마쳤다.
이운우와 나는 잠시 서로를 바라 보다가 픽, 웃었다.
"다음부턴 서로 얘기하고 뭐든 진 행하자. 응?"
"너야말로."
"더 숨기는 건 없는 거겠지?"
이운우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아 잠시 침묵했다.
"……물론이지."
"야! 당장 말해! 또 뭐 숨기고 있 어!"
"숨기는 거 없다니까!"
이운우가 내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닦달했다.
"내가 너한테 한두 번 당하는 줄 알아? 안 속아!"
"너야말로 나한테……!"
나는 톡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다 물었다.
회귀한 뒤엔 이운우가 내 뒤통수 를 친 것보다, 내가 이운우에게 숨 긴 것이 더 많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