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백목련이 황당하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비르디아가 그렇게 얘기했다고 요?"
"네. 정말로요."
"당신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으니 아마 진짜겠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떨떠름한 표정 이었다.
"느닷없이 해외 출장에, 성물 비르 디아를 보고 온 것도 충분히 놀라 운데. 그 비르디아가 당신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하니까…… 좀 현실성이 없네요."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백목련이야 나를 옆에서 지켜본 시간이 있으니 이렇게 말하는 거지, 남들이 들었으면 무슨 헛소리냐고 대꾸했을 거다.
"하긴. 당신한테서 현실성을 찾는 것도 웃기는 얘기긴 하죠."
백목련은 혼자 어떻게든 수긍했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성좌'라고 했다고 요?"
옆에서 듣고 있던 박노아가 물었 다.
그는 백목련 밑에서 꽤나 고생했 는지 살이 쏙 빠져 아주 핼쑥해 보 였다.
"예. 그런데, 박노아 씨. 잠은 자고 있나요?"
"그럼요.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수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강행군이네.
내가 고개를 돌려 백목련을 바라 보자 그녀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쩔 수 없다고요. 일종의 낙하산 이니까."
낙하산이긴 하다.
백목련이 어렵게 자리를 마련해서 들어간 거니까.
"적어도 연구원 흉내 정도는 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한데……
물론 백목련의 말이 옳지만, 박노
아의 몰골을 보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박노아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보다, 하던 얘길 마저 해주시
난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죽을 것처럼 힘들어 보이긴 하지 만, 으레 저런 경우 진짜 죽는 일 은 별로 없으니까 괜찮겠지.
"분명 성좌라고 했어요. 잘은 모르 겠지만 제 생각을 읽은 게 아닌가
싶어요."
"비르디아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어 요."
백목련이 그렇게 말하곤 박노아에 게 묻는다.
"박노아 씨."
"히익! 네, 네?"
박노아가 심하게 기겁했다.
하지만 백목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성좌라는 단어는 박노아 씨가 스 스로 지어낸 명칭이라 했죠?"
"네, 네. 맞아요."
박노아가 테가 얇은 안경을 손으 로 올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이들을 귀신이라 생각했 다가, 나중엔 신이 아닌가 싶었죠."
갑자기 머릿속에서 이상한 목소리 가 들리면 귀신이라 생각할 법도 했다.
"그런데 귀신이라기엔 원한에 가 득 차 보이지 않았고, 신이라기엔 전지전능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성좌라는 이름을 지어냈다 했지. 일전에 들은 이야기다.
"저 혼자만 그렇게 부르고 있었는 데..
"보통 이런 건 최초로 발견한 사 람이 이름을 지으니까, 명칭이 뭔지 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아마 비 르디아도 이해를 돕기 위해 성좌라 고 지칭했을 뿐일 겁니다."
내 말에 박노아도 동의를 표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불쑥 예 언이라. 내용도 심상치 않고요."
백목련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 는 것 같았다.
'예언의 내용은…… 어차피 공식적
으로 기록된 부분이니까.'
그 내용까지 이들에게 숨길 필요 는 없어 보였다. 다만 한 가지 문 제는 내 회귀에 대한 것이다.
'백목련에게 진지한 의견을 구하려 면 내 회귀 사실을 밝히는 게 맞 아.'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번에 넌지시 얘길 꺼냈 을 땐……
-PTSD로 은퇴한 헌터들에게서 혼 히 볼 수 있는 증상이죠.
-환청, 환각은 PTSD를 겪는 헌터 들에게 흔한 증상이니까. 그리고 그 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요.
반응이 꽤나 싸늘했다.
'날 믿는 것과는 별개로, 이건 너 무 허무맹랑한 이야기잖아.'
날 당장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고 주장해도 뭐라 반박하기 어려운 수 준이다.
'내가 헌터라서 더 그런 걸 수도
있어.'
아주 멀쩡해 보이는 이들이라도 헌터인 이상 여러 가지 일들을 겪 기 마련이다.
동료의 죽음. 생사의 갈림길에서 겨우 살아난 순간.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까지.
정부에서 헌터를 가족으로 둔 이 들에게 '헌터의 위험 신호 15가지' 를 안내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내가 현장에서 물러난 것도 아닌 데 불쑥 이 얘길 꺼내면 완전히 미 친 사람 취급을 받을 거야.'
잠시 들었던 고민이 싹 사라졌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백목련의 그 능력으로 내 회귀 여 부를 확인할 수도 있지만……
백목련이 말한 것처럼 '진리'의 범 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상 위 험한 일이다.
세계가 전부 다 같이 회귀한 것이 라면, 세계가 판단하기에 이 세상은 회귀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않 은가.
"예언 중에 '성좌에 오르려는 욕심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니.'라는 구절이 있잖아요."
백목련이 불쑥 말을 꺼냈다.
"성좌에 오르려는 욕심……. 말이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긴 하죠. 꼭 성좌가 진짜 자 리인 것처럼 표현했잖아요."
박노아가 맞장구를 치자 백목련이 그런 뜻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성좌가 꼭 후천적인 것처럼 말하 잖아요."
그 말이 맞았다.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요."
"하지만…… 대체 어떻게요?"
그 말에 침묵이 흘렀다.
"성좌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게 우리 셋뿐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고 가정해보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들 중 하나가, 후천적으로 성좌 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게 가능할까요?"
박노아가 부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는 우리보다 성좌를 더 가까이 서 느낀 인물이니, 그 말을 흘려듣긴 어려웠다.
"제가 들었던 그들의 대화는…… 사람이라기엔 어딘가 이상했는걸 요."
"하지만 후천적으로 성좌가 될 수 있다면, 사람 말고 다른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백목련이 바로 반박했다.
인간이 인간답다고 생각되는 기준 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박노 아의 얘길 들어보면 그들은 꽤나 높은 지능을 가진 것 같다.
그렇다면 고등한 사고가 가능한 생명체는 거의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나는 불현듯 무언가가 머 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지. 있잖아.'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처럼 자아가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 만 그들은 분명 생각할 수 있는 존 재들이 었다.
나는 허리춤에 달린 총집의 무게 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노이 트.'
내 영혼의 단짝, 내 영원한 전우.
에고를 가진 리볼버, 노이트.
"잠깐만요."
나는 얼굴이 창백해진 걸 느꼈다.
"아이템은요?"
" 네?"
백목련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난 정말로, 약간 속이 안 좋았다.
"희귀하긴 하지만 분명 있지 않습 니까. 자아를 가진 아이템이."
내 말을 듣자 백목련도 눈을 동그 랗게 떴다.
그녀의 시선이 유려하게 흘러 내 허리춤에 닿았다.
"에고를 가진 무기들 말입니다. S 급 이상의 무기들 중엔 종종……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내 말이 끝나자, 숨 막히는 침묵이 찾아왔다.
노이트는 우리끼리 하는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을 거다. 정확히 말 하자면, 듣는다기보단 이해하고 있 다고 해야겠지.
"저……. 확인차 물어보는 건데 요."
박노아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한서하 씨의 리볼버…… 에고 무 기인가요?"
" 네."
우리는 귀신 얘길 하다가 귀신과 맞닥뜨린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었 다.
"어디까지나 가설이니까요."
백목련이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애써 말을 돌렸다.
"어찌 됐든 확실한 건 없어요. 정 말 이 성좌라는 존재들이 후천적으 로 그 위치에 오른 건지도 추측일
뿐 정확하지 않고요."
"맞아요. 그리고 아마 찾아보면, 자아가 있고 지능이 높으면서 의사 소통도 할 줄 아는 존재가 하나쯤 더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박노아는 갈수록 말끝을 흐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가능성이 희박 하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거겠지.
'아니지. 톨룩에서 봤던 인공 지능 정도면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가졌 다고 봐도 되려나.'
생명체처럼 성장한다고 했으니, 아 주 틀린 말은 아닐 거다.
하지만 그 인공 지능은 톨룩에서 도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고 했 다. 성좌'들'이라기엔 무리가 있다.
하하하하. 어색한 웃음이 연구실 안에 울려 퍼졌다.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그때, 알림이 울렸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한숨을 내쉽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쉿 표시를 했 다.
그러자 백목련과 박노아가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노이트. 우리 얘기 다 들었지?'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긍정을 표합니다.]
'그럼 알려줄 수 있어? 뭐가 진실 인지. 에고를 가진 아이템이 후천적 으로 성좌가 될 수 있다는 우리의 추측이, 사실이야?'
이건 꽤나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노이트를 내 영원한 전우라고 칭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주 종 관계기 때문이다.
내가 노이트의 사용자인 이상, 노 이트를 다루는 법엔 능숙해도 노이 트와 깊게 대화할 일은 별로 없었 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비르디 아가 쓸데없는 이야길 했다며 타박 합니다.]
비르디아와 아는 사이인 것처럼 말한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그 추측 이 맞는다며 긍정을 표합니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자 양옆에서 백목련과 박노아 가 궁금해 미치겠단 표정을 하고 날 바라본다.
동시에 알림창이 폭발적으로 늘어 났다.
[알림: 특수 탄환 '쏟아지는 불꽃' 이 이런 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 었다고 열화를 토합니다!]
[알림: 특수 탄환 '찬동하는 목책' 이 사용자를 욕하지 말라며 경고합 니다!]
[알림: 특수 탄환 '아늑한 바람'이 진정하라며 둘을 말립니다.]
잠자코 있던 특수 탄환들이 제각 기 의견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알림이 이리저리 울리는 탓에 머 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모두 조 용히 하라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잠시 알림이 멈췄다.
이윽고, 노이트가 한 번 더 목소리 를 냈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너무 많 은 것을 아는 건 오히려 독이라고 조언합니다.]
'알아. 하지만 이건 나도 알아야겠 어. 적어도 내 예언에 그들이 등장 한 이상은.'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제3세력이 아니다.
내 회귀와 연관된 자들이고, 이미 시스템에 관여하면서 이 전쟁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니까.
나는 박노아에게서 성좌에 대한 얘길 들었을 때 열린 칭호를 확인 했다.
[칭호를 확인합니다.]
〈재입장한 플레이어〉
설명: 재입장한 플레이어에게 주 어지는 칭호입니다.
부가효과: 세계의 흐름에 쉽게 개 입합니다. 성좌들의 주목을 받습니 다. 위기가 닥치면 비교적 쉽게 딛 고 일어섭니다.
읽어도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알 기 어려웠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러니까 알려줘, 노이트.'
만약 저 예언이 노이트를 향한 말 이라면,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게있었다.
예언에선 분명 성좌가 되고자 하 는 욕심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 하 지 않았던가.
'성좌가 되고 싶어?'
혹시 노이트가 내 회귀의 원인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잡한 감정 이 들었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격하게 부정합니다.]
'정말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도
돼.'
회귀한 직후엔 연화도 게이트 안 이라 분명 원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는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까지 든다.
혜원 언니도 살았고, 나로 인해 인 생이 바뀐 이들도 수없이 많다.
전쟁 양상도 많이 비틀었으니, 다 시 그 개고생을 한 보람이 있다고 해야지.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치를 떨 며 싫다고 외칩니다.]
[알림: 두 번 외칩니다!]
두 번 외칠 정도면 정말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