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챕터: 비르디아의 예언
"축하드립니다."
국제 연합 문양이 새겨진 조끼를 입은 사내가 내게 말을 건넸다. 막 게이트에서 나와 헌터들을 후송하 는 차량에 올라탄 참이었다.
"뭐가요?"
"1등 하셨잖아요."
"소식이 빠르네요."
"다들 눈여겨보고 있었으니까요."
그래. 한국에서 우릴 파견한 이유 가 또 여기 있었지.
독립 부대인 13부대의 효용성을 보기 위해서.
"이번 게이트가 스테이지형 게이 트일 줄은 저희도 예상 못 했지만 요."
"그러게 말이에요."
필립 그 자식들이랑 한바탕 붙을 줄 알았는데. 잔뜩 긴장한 채로 게이트에 들어간 게 우습게 됐으니.
'알고 싶지 않은 것들도 알아버렸 고.'
어딘가 서글픈 눈빛을 한 에녹 같 은 것 말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았을 법한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혹시 생각해뒀어 요?"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웃 으며 답했다.
"비르디아에게 뭘 물어볼지 말이 에요."
그래. 1등 상품엔 그게 걸려 있었 지.
영국의 국보.
허공을 재료 삼아 예언의 실을 잣 는 방적기. 산업 혁명의 상징다운 성물이 다.
"예, 뭐."
비르디아에게 뭘 물어볼지. 그건 대충 정해져 있었다.
"제아무리 비르디아라 해도 대답 할 수 있는 질문엔 한계가 있다곤 하더라고요. 아주 만능은 아닌 모양 이죠."
"그렇겠죠."
정말로 그게 만능이었으면 영국에 서 '이번 전쟁은 톨룩과 지구 중 누구의 승리입니까?' 하고 물었을 것이다.
너무 먼 미래, 또는 영향력이 큰 질문은 할 수 없다.
그 예언의 존재 자체가 미래를 흐 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썩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그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내가 비르디아에게 묻고 싶은 것
들은 끝도 없이 많았다.
내가 왜 회귀했는지. 이운우와 표 연원이 봤던 회귀 전 기억은 대체 뭔지.
그리고…….
- r세상이 타락하고 오염하여 그 끝이 보일 때, 시간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행하라.」
새하나교의 예배 때 보았던 예언 의 돌. 그곳에 적혀있던 심상치 않 던 문구들.
'국가에서 새하나교 재산을 몰수할 때 게이트 연구소로 흘러들어왔지. 그리고 감정 결과, 그 예언의 돌은 진짜였어.'
정말로 게이트에서 출토된 석판이 란 소리다.
'새하나교의 교리도 아주 거짓이라 고 보긴 어려웠던 것처럼, 그 예언 의 돌이 담고 있는 내용도…… 새 하나교와는 별개로, 뭔가 다른 의미 를 갖고 있을 확률이 커.'
아직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비르디아가 어디까지 대답을 해줄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질문들 중 하나라도 해 결된다면 그걸로도 큰 수확이었다.
후송 차량에서 내려 짐을 풀었던 숙소로 돌아왔다. 먼저 도착해 있던 류라임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
"서하 님! 서하 님!"
"류라임 씨."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거 같 죠? 저, 게이트 들어가자마자 이상 한 사람이 저한테 아는 척해서 너
무 놀랐어요!"
류라임은 스테이지형 게이트를 처 음 겪었던 모양이다.
신도아는 몰라도, 본래 일반인이었 던 정로운과 류라임에겐 낯선 일이 었을 거다.
"우리 셋 다 인간 진영에 있었다."
신도아가 호들갑 떨기 바쁜 류라 임을 대신해 상황을 설명했다.
"중세 왕국 같은 곳의 기사처럼 보였는데…… 엘프는 보지도 못하 고 게이트가 끝나버렸지."
아마도 중앙군에 속해 있었던 모
양이다. 만약 정말 전쟁이 발발했으 면 이들이 엘프를 토벌하러 왔겠지.
"기여도 1위 하셨다고 들었어요. 역시 대단하네요."
정로운이 멋쩍게 뒷목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도움이 되지 못한 게 아쉬운 모양이다.
"이게 누구야?"
그때,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비꼬 는 듯한 어투에 익숙한 억양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필립이 나를 내 려다보고 있었다.
"기여도 1등 아니야?"
"무슨 일이죠?"
류라임이 뾰족하게 대꾸했다. 필립 은 그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운이 좋네〜. 필드형이 아니라 스 테이지형이라서. 웅?"
그딴 생각을 하고 있었나. 필드형 이었으면 뭐가 달라졌을 줄 알고?
착각도 유분수지.
"알다시피 우리 연합이 세력이 좀 커서 말이지. 그 힘을 제대로 발휘 못 해서 다들 몸이 좀 근질근질~하 거든."
그가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비르디아 교섭권. 우리에게 넘겨 줬으면 하는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씨익 웃는다.
"제안은 아니고, 협박이야."
우습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말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한 가지 짚어줬다.
"네 연합은 이제 큰 의미가 없을 텐데."
그들은 대부분 1등할 자신이 없으
니 아이템이라도 나눠 가지자며 모 여든 이들이니까.
내 말에 필립이 입꼬리를 말아올 렸다. 잔뜩 이죽이는 어투로 말을 잇는다.
"내가 고용했거든."
그들 모두를? 그거 믿기 어려운데.
"나도 꽤 절실해서 말이야."
그래 보였다.
이 정도면 그는 외교 활동이나 헌 터 생활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라, 비르디아 교섭권을 얻으려 고 온 것처럼 보였다.
'국제 연합에서 미리 정보를 흘렸 나?'
아마 정보책을 통해 이번에 비르 디아 교섭권이 경매에 걸렸다는 걸 알고 참여한 것 같았다.
"안타깝네. 그렇게 절실했으면 1등 을 했어야지."
"스테이지형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그랬을걸?"
"과연 그럴까?"
내가 픽 웃자 필립이 발끈한 얼굴 을 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아주 머리가 빈 건 아니네.'
이렇게 보는 눈이 많고, 내 측근이 많은 곳에서 싸워봤자 그의 손해다.
"몸조심하라고. 1등 씨."
그가 나지막한 경고를 남기고 뒤 돌아섰다.
기여도 1등이란 걸 확인받은 다음 엔, 국제 연합의 안내를 따라 영국 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까지도 필립은 의뭉스러운 눈빛을 보내올 뿐, 섣불 리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사건은 마지막 날 밤에 일어났다.
바스락.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 오니 방문 밑에 쪽지가 남겨져 있 었다.
쪽지 내용은 간단했다.
「네 동료를 우리가 데리고 있다. 다치는 꼴 보기 싫으면 본관 뒤편 으로 오도록니평범한 협박 쪽지다.
나는 쪽지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공간 간섭.'
사방으로 기감이 뻗어 나간다. 바 로 옆방에 인기척이…… 없다.
'류라임이 없어.'
이거 어쩐다. 정말로 류라임이 그 들에게 끌려간 걸까?
'하지만 류라임도 여러 사람의 능 력치를 흡수해서 일반 헌터보다 훨 씬 강한데.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데려갔다고?'
물론 약물 같은 걸 쓰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우선은 신도아와 정로운을 불렀다.
"무슨 일이지?"
"둘 다 류라임 씨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죠?"
"저는…… 내일이면 떠나야 하니 까 짐을 싸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마 점심쯤이 마지막인 것 같아 요."
"나도 그쯤이다."
저녁에 류라임을 본 사람은 없단 얘기였다.
"그 녀석들이 류라임에게 수작을
부린 건가?"
신도아가 눈치 빠르게 정답을 맞 혔다.
"아마도요. 이런 쪽지가 남겨져 있 었거든요."
둘에게 쪽지를 보여주자 낯빛이 심각하게 변했다.
"납치일까요?"
"앙심을 품고 있으니 가능성이 없 진 않지."
"함정일 수도 있고요."
어찌 됐든 움직이긴 해야 했다.
함정이라 할지라도 당해줄 수밖에
없는 함정이다.
"본관 뒤편으로 갑니다."
내 말에 신도아와 정로운이 고개 를 끄덕였다.
* * *
본관 뒤편은 온통 나무로 뒤덮인 산속이었다. 일반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산 한복판에 건물을 지은 탓 이었다.
어둠 속에서 숲을 걷고 있자니 다 시 게이트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때 였다.
날카로운 기감에 인기척이 잡혔다.
'대략 40명 정도인가.'
필립도 그 사이에 숨어있는 게 느 껴졌다. 나는 말없이 뒤따라오는 신 도아와 정로운에게 멈추라는 신호 를 보냈다.
'류라임의 기척은…… 딱히 없는 데.'
아무래도 함정이었던 모양이다.
'류라임을 다른 데로 불러놓고 우 리한텐 협박 어린 편지를 보낸 건 가.'
되지도 않는 장난이군. 응답해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이만 뒤돌아 가자는 의미로 그들에게 수신호로 후퇴를 명령했 다.
의아해하면서도 뒤돌아서 려는데.
'공간 간섭!'
나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에 스킬 을 발동했다.
파바박!
역시나. 내가 있던 곳에 화살이 내 리꽂힌다.
"모여요!"
내 외침에 후퇴하려고 움직이던 부대원들이 등을 맞대고 모였다.
'빙 둘러싸고 있잖아.'
우리가 이동한 다음 뒤따라오는 무리가 또 있었던 것 같다.
'앞뒤로 적이야. 젠장. 빠르게 이동 하느라 뒤를 체크하지 못한 게 실 수였어.'
우리를 빙 둘러싼 헌터들이 위협 적으로 느껴졌다.
'쉽게 볼 순 없어. 협공은 엉망일 지 몰라도, 개인의 성취는 꽤 훌륭 한 이들끼리 모였으니까.'
긴장감 어린 공기가 흘렀다.
다가온 이들 사이로 한 사내가 나 온다.
"자. 어디 한번 똑같이 말해보시 지. 1등 씨."
필립이 재수 없게 웃는다.
"전처럼 당당할 수 있나 보자고. 응?"
"뭔가 착각하나 본데."
아쉽게도 나는 그가 생각하는 그 런 사람은 아니라서.
이렇게 사람 우르르 데려온다고 꼬리를 내릴 정도로 약하지 않거든.
"난 너처럼 돈 주고 사람 부리면 서 잘난 척 안 해. 내 실력으로 승 부하지."
내 말에 필립도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나를 향한 적개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공격해!"
"파이로!"
-뼤 이 이 이!
이제는 익숙한 울림이 사방에 울 렸다.
게이트가 아닌 곳에서 파이로를 부르는 건 거의 처음 같았다.
"뭐, 뭐야, 저건!"
"으아악!"
화르륵. 불꽃으로 점철된 거대한 새가 나를 감싸 안는다.
주변에 가까이 붙어있던 이들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 화를 면했지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주변 나 무들을 불태우며 불씨를 키웠다.
"물! 물 마법!"
"갑니다!"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물벼 락이 촤아악 쏟아져 내렸다.
- 삐이 이!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아타노르를 꺼트리기엔 많이 부족했지만.
"잘했어. 파이로."
내가 손을 뻗자 파이로가 고개를 숙여 그 부리를 내게 부비적거렸다. 이제는 나보다 한참이나 커버린 녀 석이었다.
"대, 대장……!"
뒤를 바라보니 파이로의 불꽃에 허덕이는 정로운이 보였다.
'오래 꺼내두진 못하겠어.'
나야 파이로의 불꽃에 영향을 안 받지만, 부대원들은 이 불꽃으로 된가마 속에서 겨우 버티는 셈이었다.
"불이야! 불이 났다!"
인근 나무들이 타오르면서 시작된 불꽃이 쉽사리 잦아들지 않고 있었 다.
'이 정도로 소란이 일었으면 다른 이들도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겠지.'
일종의 SOS 신호였다.
필립을 못 이겨서가 아니라, 내가 필립을 죽여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 이다.
'게이트 안이었다면 죽여도 모르는
척할 수 있지만, 게이트 밖에선 아 니거든.'
여기서 싸우면 괜한 외교 싸움으 로 번질 수도 있었다.
'물론, 불에 타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저 자식들이 죽거나 말거나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까지 내 책임이라 하면 곤란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