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나는 한 번 더 샤노테에게 경고했 다.
"인간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 서 내려가는 건 너무 위험해."
"그럼? 그냥 이렇게 당하고만 살 란 얘기야?"
샤노테가 날카롭게 응수했다.
"상대는 우리보다 숫자가 훨씬 많 잖아. 잠깐은 우리가 우세일 수 있 어도, 금방 뒤집힐 거야."
실제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말에 반박하기 어려웠는지 샤노테 가 침묵했다.
"우리만 죽고 끝이 아니야. 인간들 이 보복을 하러 숲까지 올라올 거 라고!"
" 그건......
"그땐 어린아이들도, 노인들도 전 부 좋은 꼴 보진 못할 거야. 너도 그런 걸 원하지는 않잖아."
샤노테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젊은 엘프들이 맞서 싸워 인 간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싸울 수 있는 젊은 엘프들 이 죽고 난 다음에 남은 이들은?'
지금도 어린애들을 납치하기 위해 숲까지 들어오는 인간들이 수두룩 한데.
지켜주는 이 없이 남은 어린아이 들이 무슨 꼴이 될진 뻔한 일이었 다.
"그럼 어떡하면 좋은데."
샤노테가 절망감 어린 얼굴을 했 다.
"그냥, 계속 이렇게 당하기만 하 면……. 우리가 고통받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아이들이 잡혀가잖아."
동생을 잃을 뻔한 사내가 작게 중 얼거렸다.
"대체 내가 뭘 어떡해야 하는데."
나는 툭 내뱉었다.
"숲의 가호가 약해졌다 했지."
샤노테가 고개를 들었다.
"이유가 뭔지 알아?"
"아니. 그것까진……
"인간들이 대범하게 이 안까지 들 어오는 이유도 결국 숲의 어머니께 서 이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잖아. 그 문제를 해결하면, 인간들도 섣불 리 행동하진 못할 거야."
샤노테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대 답했다.
"이미 마을의 어르신들도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신 일이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적어도 인간 마을에 내려가 그들 을 죽이는 것보단 현실성 있는 얘
기 같은데?"
내 말에 샤노테는 한동안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러더니 아직 집 안 에 남아있던 이들에게 이렇게 일렀 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줘."
"샤노테?"
"엘렌도 돌아왔으니, 오늘 하루는 좀 쉬고 싶어서 그래. 재스퍼, 콰르 텟. 너희 둘은 잠시 남아줘. 감사의 표시로 건네줄 게 있거든."
샤노테의 말에 다른 엘프들은 주 춤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떠나자 샤노테는 반딧불이 가 들어있는 반투명한 상자를 건넸 다.
호롱불 대신 앞을 밝히기 위해 쓰 이는 물건처럼 보였다.
"조용히 따라와."
그가 우릴 어디론가 안내했다.
* * *
깊은 숲 안쪽까지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인적이 드물었
던 탓인지 나무와 넝쿨들이 빽빽하 게 들어차 있었다.
사락, 사락.
풀 밟는 소리만 사방에 울려 퍼졌 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샤노테가 멈 춰 섰다.
"이 앞이야."
" 뭐가?"
"숲의 어머니께서, 이 앞에 계셔."
그 말에 바짝 긴장감이 돌았다. 무 려 '신'으로 칭송받는 이가 이 앞에 있단 소리 아닌가.
이 드넓은 엘프 숲을 수호하고 인 간들의 침입을 막는 강력한 존재가 말이다.
촤르륵.
앞에 드리운 나무 넝쿨을 걷어내 고 앞으로 들어가자, 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와..
"아름다운 광경이군."
에녹도 한마디 거들었다.
수천 년, 수억 년은 족히 그 자리 에서 버렸을 법한 거대한 나무였다.
이 정도면 나무라기보단 벽처럼
보였다.
아주 오래 묵은 고목 주변으로 반 딧불이들이 날아다녔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리 운 나뭇가지 아래 수없이 많은 반 짝임이 나부끼는 모습이 사무치도 록 아름다웠다.
"숲의 어머니……
그야말로 숲의 주인이었다.
"내가 보기엔 멀쩡한데. 뭔가 문제 가 있나?"
"말했잖아. 마을 어른들도 영문을 모른다고."
샤노테가 나무줄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계속해서 괴롭다고 호소하고 계 시는데……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르 고 있어. 쇠약해지기만 하시고."
이게 쇠약해진 거라고? 믿기지 않 을 정도였다. 지금도 이렇게 울창한 데.
'갑자기 숲의 가호가 약해질 정도 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 기엔, 눈앞의 거목은 너무 정정해 보였다.
'대체 뭐가 문제지?'
나는 거목을 한 바퀴 빙 둘러 관 찰해봤다.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엘프들도 눈치채지 못한 일이라 했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 는 아닐 거야.'
나보다야 엘프들이 숲에 대해서 훨씬 잘 알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곳, 그 속에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그런 문제를 파악하 는 데 아주 특출하고 말이다.
'공간 간섭.'
눈을 감고 스킬을 발동하자 인근 의 구조가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거목의 정보도 상세히 알 수 있었 다.
'나뭇가지 멀쩡하고. 새 둥지가 여 럿 있구나. 나무줄기에도 별다른 건 없어.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톡톡, 나는 바닥을 작게 두들겼다.
"재스퍼?"
샤노테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지만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콰르텟
에녹의 다른 이름을 불렀다.
"왜 그러지?"
"샤노테 잡아둬."
"응? 뭐?"
에녹은 되묻지 않고 샤노테를 붙 잡았다.
말은 참 잘 듣는다. 황제의 충견답 다.
"뭔데? 왜 그래?"
나는 샤노테가 어리둥절해하며 묻 는 것을 무시하고 총을 장전했다.
철컥.
"쉽게 나올 것 같지가 않거든. 좀 험하게 다뤄야 하는데."
이 나무를 신격화한 너희가 마냥 두고 볼 만한 짓거리는 아닌 것 같 아서.
그 뒷말은 겨우 삼켜냈다.
지금부터 하는 짓이 신에 대한 모 독으로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노이트. 관통하는 철화!'
우우우우웅!
총구 앞에 에너지가 모이기 시작
했다. 흔들리는 총구를 부여잡고, 머릿속으로 공간 간섭을 펼쳤다.
'빗나가면 안 돼.'
한 발은 몰라도, 이미 쇠약해진 나 무가 두 방까지 버틸 수 있을지 확 신이 없었다.
'단번에 끝내야 해.'
우우우웅!
덜덜덜, 총구가 떨리는 것을 겨우 갈무리했다. 바닥에 바짝 붙이고, 겨눈다!
타아아앙!
"뭐, 뭐 하는 거야아아아!"
샤노테의 경악 어린 비명이 동시 에 울려 퍼졌다.
총알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며 큰 구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상한 나무뿌 리가 고스란히 보였다. 샤노테는 에 녹만 아니었으면 당장 뛰쳐나와 내 멱살을 잡았을 거다.
"숲의 어머니께, 대체 무슨 짓을! 재스퍼! 미쳤어?"
"기다려봐."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충격은 좀 완화시켰다. 그렇다 해도 무시할 수있는 수준은 아닐 거다.
쿠구구구…….
바닥이 잘게 흔들렸다.
"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내가 한 게 아니야."
샤노테가 울부짖길래 태연하게 응 수해줬다.
"드디어 나오고 있는 거지. '원인' 이."
쿠구구구구…….
땅의 흔들림이 점점 거세지고 있 었다. 이제 숲이 덜덜 떨리는 것처 럼 느껴질 정도로 거셌다.
"샤노테. 위험하니까 달려들지 마. 아니면 정말 널 쏴야 할지도 모르 니까."
내 살벌한 경고에 샤노테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대충 수긍한 것 같아 에녹에게 말을 건넸다.
"창 들어. 곧 나올 거야."
내 말에 에녹이 샤노테를 놓아줬 다. 그리고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눈에 익은 창이 튀어나왔다.
'귀속 아이템인 모양이지.'
평범한 창은 아닌 것 같으니 그럴 만했다.
샤노테는 갑자기 나타난 무기에 놀랐지만 그보다는 내가 말한 '원 인'이 더 궁금한 듯했다.
"대체…… 뭘, 말하는 건데?"
그가 불안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 다.
미안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할 새 가 없었다.
촤아아아악!
- 키에에엑!
뚫린 구덩이에서 거대한 지렁이 같은 것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D급 몬스터, 붉은점지렁이.'
본래는 D급이었겠지만, 이 정도로 거대한 붉은점지렁이는 본 적이 없 다.
'숲의 지하에서 나무뿌리를 갉아먹 으며 사는 몬스터인데. 색깔도 그렇 고, 이건…… 돌연변이인가?'
본래 붉은색인 붉은점지렁이와 다 르게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원래 붉은점지렁이는 이렇 게까지 크지 않다!
"으아아악! 저게 뭐야!"
샤노테가 기겁을 하며 뒤로 나자 빠졌다.
"뭐긴 뭐야. 저게 이 밑에서 나무 뿌리를 갉아먹고 있었으니까 숲의 가호가 약해졌던 거지!"
"저, 저런 게 밑에 있었다고?"
엘프들에게 땅 밑을 측정할 수 있 는 방법이 있을 리가 없으니 꿈에 도 몰랐을 거다.
그저 숲의 어머니와 감웅하며 끝 없이 괴롭다고 호소하는 이야기만 들었겠지.
"저건…… 오염된 마물이잖아! 어 떻게 신성한 숲까지……
오염?
잘은 몰라도, 저 붉은점지렁이가 일반적인 D급 마물과 다른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 에녹!"
내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이 에녹 이 창을 휘둘렀다.
콰과과곽!
지렁이 주제에 외피가 단단하다. 에녹의 창과 외피가 팽팽하게 접점 을 이룬다.
- 키에에엑!
"조심해! 입에서 산성침을 내뿜으 니까!"
내 말에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푸욱!
창이 결국 승리해 외피를 뚫어냈 다!
그러자 붉은점지렁이가 마구잡이 로 몸부림치던 것을 멈추고 에녹에 게 고개를 돌렸다.
쩌어억, 입이 벌어지더니 그 안에 서 산성침이 들끓었다.
그 틈을 노렸다.
철컥.
공격하기 직전이 본디 제일 무방 비한 법. 나는 순식간에 놈의 뒤통수 부근에 나타났다.
'저기다!'
관통하는 철화를 장전하고 싶지만, 아직 쿨타임이 다 돌지 않았다.
대신, 놈의 매끈한 뒤통수에 한 가 지 눈에 띄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아까 쏜 총알!'
외피를 살짝 뚫어내고 반쯤 박힌 총알이 보였다.
일반 탄환으로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저곳을 노려 야 한다.
- 키에에에엑!
가득 찬 산성침이 에녹에게 쏟아 지려는 찰나.
탕!
총알이 먼저 박힌 총알을 깊숙하 게 내리눌렀다.
- 케게게겍!
사아아아아!
놈의 비명과 함께 산성이 흘러넘 치면서 바닥을 적셨다. 살벌한 소리 가 울렸다. 땅이 녹아내리는 소리였 다.
' 에녹은?'
빠르게 시선을 굴려보니 다행히
그는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먼저 몸을 뺀 모양이었다.
-키에에엑!
그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놈 이 고개를 빙글 돌려 날 바라본다.
입 안에는 여지없이 산성액이 준 비되어 있었다.
'공간 간섭!'
촤아악!
이동하자마자 내가 있던 자리에 산성액이 흩뿌려졌다. 섬뜩한 순간 이었다.
"샤노테. 숲 안에 숨어."
나는 한 번 더 자리를 이동해 샤 노테에게 일렀다.
"하지만……
"넌 무기도 없잖아. 활 있어?"
"아니."
"그럼 숨어!"
내 호통에 샤노테가 서둘러 몸을 옮겼다. 이걸로 신경 쓸 요인이 하 나 줄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에녹과 등을 맞 댔다.
"내가 당신이랑 같은 편에 서는 날이 올 줄이야."
나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회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새삼 놀라워 작게 중얼거 리자, 에녹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 다.
"그러게 내가 톨룩으로 넘어오라 하지 않았나."
"헛소리하지 말고.''
싸늘하게 대답하자 에녹도 입을 다문다.
-케에에에엑!
붉은점지렁이는 뒤늦게 우릴 발견 하고 사납게 울부짖었다.
"한 명이 어그로 끌면, 다른 한 명 이 공격하기. 어그로 핑퐁 신경 쓰 면서. 어때?"
"좋은 생각이다."
탓!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 으로 튀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