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사르륵, 로브가 바닥에 쓸리며 부 드러운 소리를 냈다.
어두운 색의 천을 푹 뒤집어쓰고 걷자니 주변의 시선이 슬며시 우릴 스치고 지나간다.
여관에 들어가 주인장에게 물었다.
"방이 있나?"
"둘이 같이 묵을 거요?"
척 봐도 수상하게 생긴 우리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그가 물었다.
어차피 오늘 밤 침대에서 묵으려 고 방을 구하는 건 아니었기에 고 개를 끄덕였다.
"3실버. 스튜까지 먹을 거면 4실 버."
짤랑.
숲에 있던 약초들을 판 돈을 건네 자 여관 주인이 옆에 있던 어린아 이를 툭툭 쳤다.
"2충 제일 끝 방으로 안내해드려
라."
"네! 절 따라오세요!"
아이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생긋 웃는 얼굴엔 활기가 넘쳤다.
"이쪽 방을 쓰시면 되고, 빨래가 필요하시면 저희한테 말씀해주세 요! 스튜도 주문하셨나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은 온갖 사람들이 오가는 곳 이니, 정보를 얻기 안성맞춤이었다.
"네, 그럼 편히 쉬시고 이따 내려 오셔서 절 부르시면 스튜도 준비해 드릴게요!"
"잠깐만."
돌아서려는 아이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네?"
"우린 높으신 분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다. 여기서 노예 시장이 열린다고 들었는데. 어딘지 알고 있 나?"
일부러 고압적인 어투를 사용해 물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것도, 신분을 감 추기 위해서 그런 것처럼 보이겠지.
'사실은 이 거추장스러운 귀를 가
리기 위해서지만.'
내 물음에 아이는 머뭇머뭇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건 잘 몰 라서요……. 저는 그냥 이 여관에서 만 일하는 거라."
나는 주머니에서 1실버를 꺼내 아 이에게 쥐여주었다.
"쓸 만한 정보를 찾아오면 하나 더 주마."
아이는 제 손아귀에 놓인 은빛 동 전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가보거라."
"네! 편히 쉬세요!"
탁. 드디어 문이 닫혔다.
나는 가볍게 챙겨온 짐을 방 한구 석에 내려놓았다.
"무슨 생각이지?"
에녹이 물었다. 여태까지 아무런 질문도 없이 날 따라 움직인 게 용 했다.
"뭐가?"
"갑자기 인간 마을로 내려온 거 말이다."
"말했잖아. 당신도 이대로면 인간 쪽이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걸 알 텐데?"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 브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천이 가볍게 흔들린다.
"너와 나, 둘의 무력은 강한 편이 지만 '엘프' 진영을 승리로 이끄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니까."
과연 인간 진영을 붕괴시킨다 해 도, 에녹과 나 단둘이 살아남은 것 을 엘프 진영의 승리라고 칠 수 있 겠는가.
게다가 입장한 헌터의 수를 생각
해보면 전력으로도 어느 쪽이 우위 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대로 스테이지에 실패하고 3개 월간 페널티를 받을 생각이야?"
"어쩔 수 없다면, 순응하는 수밖 에."
그가 담담하게 답했다.
뿌리 깊은 체념이 느껴지는 어조 였다.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난 그래선 안 돼."
내 3개월은 무엇보다 값지거든. 그 시간이면 뭐든 할 수 있단 말이다.
'게다가 할 일도 산더미 같다고. 5 황자한테 공적도 몰아줘야 하고, 혁 명도 일으켜야 하고, 벨제부브 그 개자식도 언젠가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니까.'
그런데 3개월이나 능력치를 빼앗 긴 채 가만있으라고? 그럴 순 없 지.
"다른 수라도 있단 말인가?''
"스테이지가 제시한 선택지는 단 둘이지. 첫째, 엘프가 이긴다. 둘째, 인간이 이긴다."
내 말에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항상 제3의 선택지를 찾아내 거든."
최악, 차악의 선택지를 택해야 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게 휘둘리 는 건 아니다.
"아예 판을 부숴버릴 거야. 그러 면, 이 스테이지가 짜놓은 그림이 완전히 무너지겠지. 그때 가서도 우 리에게 같은 선택지를 제안할 수 있는지 보자고."
내 말에 에녹은 잠시 침묵하더니, 짧게 의견을 덧붙였다.
"부디 그렇게 해서 뭔가 바뀐다면 좋겠지만 말이야."
* * *
왁자지껄. 사방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가득하다.
저녁 시간대가 되자 1층에 사람들 로 북적였다.
"여기, 스튜 두 개."
"네에! 금방 준비됩니다
아까 봤던 아이에게 스튜를 주문 하자 살갑게 웃으며 대답한다. 꽉 찬 테이블 사이로 빈자리를 겨우 찾아 앉았다.
"여기. 주문하신 스튜 나왔습니 다!"
정말 빠르군.
숟가락으로 스튜를 대충 휘적거려 봤다. 일명 사냥꾼의 스튜로 온갖 잡다한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이라 맛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게이트에선 몬스터 고기도 구워 먹는데 그보다는 훨씬 낫지.'
나는 태연하게 스튜를 한두 숟가 락 입에 넣었다.
그때 였다.
쾅
"방이 없단 말이오?"
"예, 예에……. 나으리. 죄송하지만 지금 한창 마물들이 나오는 시기라 오가는 용병들이 많습니다요. 그래 서 자리가 여의치 않습니다......
"실수하지 말게. 우리가 모시는 분 이 어떤 분인 줄 알고!"
뭔진 몰라도 여관 주인이 누군가 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훨씬 잘 차려입은 사내가 여관 주인에게 마구 윽박지 르고 있었다.
그 소리가 주변 용병들의 심기를
상당히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거, 이보쇼. 얼마나 대단한 분을 모시는지는 몰라도, 방이 없다 하지 않소."
"너희는 빠지거라."
남자가 콧대 높게 자존심을 세운 다.
용병들은 울컥하는 모양이었지만, 상대가 귀족과 관련된 것 같으니 참는 듯했다.
'이것 봐라……
이런 촌구석에 귀족 나리라. 심지 어 마땅히 묵을 곳도 없어 여관을찾아다닌다고?
'구린 냄새가 나는데.'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요양하 러 왔다면 아예 저택을 하나 빌렸 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라면 목적이 뭔지 뻔했다.
'노예를 구하러 왔구나.'
모르긴 해도 엘프가 하나 잡혔다 는 소리에 급하게 달려온 것 같았 다.
'엘프 노예가 쉽게 잡힐 리도 없으 니까. 수요가 많으니 돈이 있어도
구하기 쉽지 않겠지.'
그것 때문에 이런 변방까지 귀한 몸이 행차하신 모양이다.
우리에겐 좋은 일이었다. 인신매매 가 어디서 일어나는지 저 귀족이라 면 알고 있을 테니.
"왜 이리 오래 걸리느냐."
그때, 양옆에 시종을 끼고 한 남자 가 등장했다.
그가 등장하자 아까까지만 해도 잘난 체를 하던 이가 황급히 고개 를 숙인다.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안에
서 기다리시지요."
"네가 하도 오질 않으니 그런 것 아니냐."
"이봐. 어서 방을 준비하라니까!"
"하, 하지만……!"
여관 주인이 힐끗 용병들 쪽을 살 폈다.
보통 손님이라면 어떻게든 내보내 서 방을 마련했을지도 모르지만, 용 병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도 무사 하지 못할 테니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여관 주인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
며 간청했다.
"나으리. 저희 여관은 지금 방이 가득 차서 빈 곳이 없습니다. 부디 자비를...
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관 주인 이 철푸덕 뒤로 넘어졌다. 귀족 사 내가 그를 걷어찬 것이었다.
"말이 많구나. 방이 없다고?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가득하니 방이 없지! 당장 끌어내서라도 방을 만 들어라. 나보고 바닥에서 자란 소릴 하는 게냐!"
그가 용병들을 자극하자 심사가
뒤틀린 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 어 섰다.
촤악, 스윽.
그러자 호위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검을 뽑아들고 그들 앞을 가로막는 다.
퉤, 누군가 거칠게 침을 뱉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후루룩. 그 사이에서 에녹이 눈치 없이 스튜를 들이켜고 있는 것만 빼면 말이다.
"에이, 재수 없게……
"하필이면 귀족이 여길 와 가지
고."
몇몇 용병들은 괜히 얽히기 싫은 지, 식사만 하러 왔던 건지 뒷문으 로 빠져나갔다.
"쳇.."
남은 이들도 호위기사의 칼끝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는지 인상을 찌 푸리고만 있었다.
그때 도화선에 불을 지핀 건, 역시 나 입을 나불거리는 귀족 사내였다.
"쯧쯧. 천하게 태어났으면 주제 파 악이라도 잘 할 것이지……
그 중얼거리는 말에 울컥한 용병
하나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 개자식이이이!"
후우우욱!
둔탁한 도끼가 휘둘러졌다. 거의 어린아이만 한 크기의 도끼날이 살 벌했다.
콰드득!
그러나 도끼는 애먼 바닥만 박살 냈다.
도끼가 바닥에 꽂혀 주춤하는 순 간, 기사 한 명은 귀족을 자기 뒤 에 보호하고 나머지 한 명이 용병 을 가격했다.
후욱!
용병이 뒤로 날아가 테이블에 부 딪혔다.
쨍그랑! 콰직!
그릇이 깨지고 탁자가 박살났다. 갑작스러운 충돌에 앉아있던 용병 들도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정신을 잃은 용병을 그대로 두고, 그 주변에 있던 이들이 무기를 거 머 쥐었다.
그리고 한꺼번에 기사에게 달려들 었다.
나와 에녹은 나서지 않고 멀찍이
서 구경만 했다.
'뭐, 저 귀족을 나중에 찾아가서 어떻게든 협박할 거긴 한데. 굳이 눈에 띄게 지금 나설 필요는 없으 니까.'
그래서 나도 에녹과 함께 스튜나 퍼먹고 있었다.
후욱!
어디선가 날아온 용병 하나가 우 리 테이블을 덮치기 전까진 말이다.
와장창!
"으으윽!"
당연하게도 스튜는 엎어지고 난장
판이 됐다.
용병이 우리 앞에서 신음을 흘리 는 건 크게 신경 쓸 일도 아니었 다.
"이런. 스튜가……
에녹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스 튜가 문제가 아니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 엘프……
"엘프잖아! 엘프다!"
테이블이 엎어지면서 로브 자락이 말려들어가, 머리를 가리고 있던 천 이 걷힌 것이다.
덕분에 이 뾰족한 귀가 사방에 드 러나게 됐고.
"엘프? 엘프라고?"
동시에, 엘프 노예를 사러 온 것으 로 추정되는 귀족 남자의 관심도 한눈에 받을 수 있었다.
'망했네.'
일이 벌써부터 꼬이기 시작한다.